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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창 (窓)

글·함정임‘작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 사진제공·REX

입력 2007.07.12 10:52:00

내 방의 창을 통해 난 겨울밤의 어둠은 얼마나 깊고, 여름 하늘의 오후는 얼마나 오묘하며, 봄 하늘의 아침은 얼마나 우울한지, 또 가을 하늘의 저녁은 얼마나 부드러운지 알게 되었고, 그 창가에서 시를 쓰고 마침내 첫 소설을 썼다….
내 마음의 창  (窓)

태풍이 오려는지 먹구름에 큰 바람 부는 유월 어느 저녁이었다. 바람 구두를 신고 아청빛 저녁 숲길을 걸었던 랭보처럼 불안정한 초여름 바람을 핑계로 젊은 문학도들과 에덴동산으로 향했다. ‘솔바람’이라는 고전음악실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곳에 가면 부산 서쪽 끝 낙동강 하단의 고즈넉한 풍경이 발아래 펼쳐져 있다. 무엇보다 창(窓). 신록이면 신록, 비바람이면 비바람, 나지막한 동산을 걸어올라 솔바람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언제나 어둡고 텅 빈 고요 속에 투명하게 빛나는 넓은 유리창이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 유리창과 마주하는 사람의 입에서는 아! 하는 감탄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러면 나는 나만이 아는 세상의 진귀한 보물을 찾아가 보여주는 안내자의 심정으로 기쁨과 안도의 탄성을 내질렀다. 너와 나 할 것 없이, 그 창과 마주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행복의 미소가 흘렀다. 그 순간만은 그때까지 짊어지고 있던 세속의 짐과 가슴속 근심을 훌훌 벗어던진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투명한 자유인이 되는 것이었다.
나에게 ‘창(窓)’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중 하나다. 무슨 연유로, 또 언제부터 그것이 나의 삶의 환경을 좌우하는 기준이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어도,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되기 전부터 그것에 대한 애착이 깊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소녀시절 세상과 문학을 만나게 해준 아름다운 창에 대한 추억
창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대학 시절, 당시 살고 있던 분당의 단층집 옥상에 또 한 층을 지을 때였다. 두 살 위의 막둥오라버니는 몇날며칠 밤낮없이 설계도를 그렸고, 어느 날에는 완성된 설계도를 가운데 펼쳐놓고 엄마와 막둥오라버니와 나는 머리를 맞대고 검토했다. 설계도는 훌륭했는데, 수정이 불가피했다. 막둥오라버니가 그린 설계도에는 창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창에 관한 한, 막둥오라버니는 내 의견을 그대로 따랐는데, 엄마의 연료비 걱정을 듣고 나서는 창을 반으로 줄여야 했다. 그러나 내 방의 창만은 처음의 형태와 크기 그대로였다. 나는 막둥오라버니가 그린 그 창을 통해 들판의 바람소리를 듣고 들판가 농장의 수목들과 농장 뒤편에 배경처럼 놓여 있는 동산의 실루엣과 그 위의 하늘, 그리고 구름을 바라보곤 했다. 그 창을 통해 겨울밤의 어둠은 얼마나 깊고, 여름 하늘의 오후는 얼마나 오묘하며, 봄 하늘의 아침은 얼마나 우울한지, 또 가을 하늘의 저녁은 얼마나 부드러운지 알게 되었고, 그 창가에서 시를 쓰고, 마침내 첫 소설을 썼다.

세상에서 가장 투명한 창(窓)을 만난다는 것…
청춘 시절, 잠깐 파리로 떠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어머니와 형제들과의 이별의 정도 정이려니와 바로 나에게 처음으로 시심(詩心)을 주고, 소설이라는 또 하나의 놀라운 세상을 열어준 그 창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곳이 찻집이든 낯선 여행지의 숙소이든, 또 한동안 기거할 거처이든 나에게는 내 마음의 창을 찾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첫 체류지였던 파리에서 나는 아파트 건물의 육층 고미다락방에 머물렀는데, 화가의 아틀리에 겸 거처였던 그곳이 나를 사로잡은 것은 말할 나위 없이 센강을 향해 나 있는 창이었다. 보름달 형상의 그 창으로 센강과 노트르담이 들어와 있었고, 나는 깊은 밤을 지나 청회색 여명에서부터 핏빛 노을이 오래오래 지속되는 여름 저녁과 어슴푸레한 밤의 어둠 속에 묵묵히 서 있는 노트르담을 보며 세상의 모든 견고한 것의 아름다움과 고독을 되새기곤 했다.
거센 바람 몰아치는 초여름 저녁, 에덴동산으로 이끄는 내 발길의 의미를 젊은 문학도들이 어찌 알랴. 지척에서 몇 년을 살았어도 동산의 소롯길은 처음 밟아본다는 청춘들이었다. 오래전 문학도들의 사랑이었다던 에덴동산은 이제는 번잡한 도시에 떠 있는 외딴섬이었고, 솔바람은 그 섬의 등대인 셈이었다. 한 계절을 보내고 또 한 계절을 맞이하는 소설가 선생의 행보(行步)쯤으로 여기고 도란도란 따라오는 청춘들에게 그저 싱그러운 미소를 던질 뿐이었다. 조금만 올라가면 돌에 새겨놓은 유치환의 ‘깃발’을 만나고, 또 조금 더 올라가면 등나무를 만나고, 또 그 등나무 정원에 들어서면 태고의 소리처럼 아스라이 흐르는 ‘음악’을 만나고, 그리고 그 음악을 따라 솔바람의 투박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세상에서 가장 투명한 창(窓)을 만난다는 것을 속으로 흐뭇하게 되뇔 뿐이었다. 문득 어둠 속에 텅 빈 채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창과 마주치는 영혼들의 행복한 얼굴을 떠올리는 것처럼 설레는 산책은 없는 것. 오래 전 막둥오라버니가 만들어준 이 투명한 구멍으로 내가 세상(문학)을 발견한 것처럼 그들도 그들의 창을 발견할 수 있을까? 내 생애 최초의 창에서 익혔던 보들레르의 시구(詩句)가 뜨거운 가슴을 빠져나와 동산에 메아리쳤다.
“혹은 어둡고, 혹은 빛나는 이 구멍 속에 인생이 숨쉬고, 인생이 꿈꾸며, 인생이 괴로워한다.”
아아, 살다 보면, 괴로움이어도, 숨쉬고, 꿈꾸며, 살아간다는 것이 축복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태풍 바람 거세어도 비는 아직 하늘의 것, 솔바람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산소처럼 가벼웠다.
함정임씨는…
내 마음의 창  (窓)
이화여대 불문과와 한신대 문예창작과 대학원 졸업.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광장으로 가는 길’이 뽑혀 등단한 뒤 소설집 ‘이야기, 떨어지는 가면’, 장편소설 ‘행복’, 산문집 ‘하찮음에 관하여’, 미술에세이 ‘나를 사로잡은 그녀, 그녀들’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책을 펴냈으며 ‘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 등을 번역. 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여성동아 2007년 7월 5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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