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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뜻밖의 고백

화가 김점선이 처음 털어놓은 ‘임신, 육아, 건강하게 자란 아들 이야기’

사진·여성동아 사진파트

입력 2007.05.18 15:44:00

개성 넘치는 그림 세계로 많은 팬을 갖고 있는 화가 김점선. 외아들을 둔 그는 아이도 그처럼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키우려 했다고 한다. 아들 이름을 ‘순자’로 짓고, 학교에도 보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엄마의 바람과 달리 일반적인 길을 택한 아들은 어느새 나이든 엄마를 돕는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내가 아들을 낳았지만, 아들은 나를 부활시켰다’고 말하는 김점선이 직접 쓴 아들 이야기.
화가 김점선이 처음 털어놓은 ‘임신, 육아, 건강하게 자란 아들 이야기’

임신을 원한 적이 있었다. 중학생일 때, 그러니까 부모에 대한 비판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내 맘에 들게 아이를 기르는 사람이 주변에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돌봄으로 자라면서도 그들을 비판했다. 나는 아이를 낳아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르고 싶었다.
섬세한 보살핌, 예민한 감각으로 우울과 잠재의식까지를 읽어내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내가 아이를 낳아서 출발부터 아주 좋게 기르고 싶었다. 바로 내가 되고 싶은 이상적인 인간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주면서, 어린이를 덜 자란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신성이 잠재된 미지의 존재로 경건하게 대하는 엄마로 살고 싶었다. 초경도 시작되기 전에 임신부터 원한 셈이다.
그런데 막상 결혼적령기에 도달해서는 결혼에 의문 부호를 달았다. 이것은 나를 기른 주변의 문화에 문제가 있다는 증표다. 왜 아주 자연스럽게 아기를 갖고 낳아 기를 생각이 안 들게 인간이 자라났단 말인가? 아무튼 전혀 임신할 의사 없이 떠돌던 나를 자극한 일이 두 가지나 일어났다.
어느 가을날 길에서 건강한 아들을 데리고 걷는 젊은 예술가 김중만(사진작가)을 만났다. 그는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이었다. 세 살 된 아들과 함께 저보다 키가 더 큰 서양여자를 데리고 마주 오고 있었다. 그때 그 아이가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저렇게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구나! 저렇게 자연스럽게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구나! 저것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이다!

화가 김점선이 처음 털어놓은 ‘임신, 육아, 건강하게 자란 아들 이야기’

그날부터 나는 왜 스스로 결혼도, 아이를 낳을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일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혼을 결심하게 만든 두 번째 사건은 김상유 선생님(화가)과 관련해 일어났다. 그는 내가 미술을 전공하기 전부터 존경하는 선생님이었다. 그분은 나를 처음 본 날, 나의 초기 그림-도롱뇽을 광목에 그린 그림, 주홍색과 흰색과 검정만으로 된 그림-을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했다.
“김점선은 단군 이래 최고의 화가다.”
그런데 그로부터 3년 후에는 나를 꾸짖었다.
“결혼하지 않고 부모한테 돈 타내서 물감 사는 인간이 화가냐?”
먼저 칭찬하고 나서 꾸짖는 방법에 내가 말려든 걸까? 아무튼 그 순간 나는 깊은 수치심을 느꼈다. 나는 그림으로 성공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사는 목표였다. 선생님이 그러려면 결혼을 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도 아주 가난한 남자와. 그래서 한 달 후 나는 실질적인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가난한 남자였다. 그리고 몹시 가난하던 시절, 아기를 가졌다.

좋은 화가가 되기 위해 선택한 ‘가난한 결혼’, 임신 7개월 후에야 비로소 병원 찾아
건강한 사람을 낳겠다는 결심으로 커피 한 잔, 드링크 한 병도 안 마셨다. 술, 담배는 물론이고 되도록이면 인스턴트 음식도 멀리했다. 그렇게 건강한 사람을 낳을 준비를 하면서 살았다.
병원에 처음 찾아간 날, 내가 이미 임신 7개월이라는 소릴 들었다. 산부인과 의사가 말했다.
“뭘 믿고 이런 노산에 이렇게 태평이냐?”
“가난이요” 하고 말하려다가 묵묵히 있었다. 그때 내 나이 33세였다. 왜 이렇게 늦게 병원에 왔냐고 다그치는 의사가 우스웠다. 마치 의사는 무료진료소를 운영하는 사람 같았고, 이 세상에 진료비를 걱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투였다. 진료비를 내지 않으면 쫓아낼 게 뻔한데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진료비를 걱정하는 사람의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가 우스웠다.
하지만 아이는 조용하고 품위가 있었다. 아주 어릴 때도 까불지 않았다. 배 속에서도 9개월이 되어서야 놀았다. 만약 내가 임신에 대한 책을 읽고, 임신에 대해 호들갑을 떨면서, 호사스럽게 임신생활을 했더라면 나는 야단법석을 벌였을 것이다. 아이가 놀지 않는다고 생난리를 피웠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임신하고도 임신에 관한 책을 읽지 않았다. 그래서 임신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었다. 그런데다가 주변에는 아이를 낳아본 경험이 있는 여자도 없었다.
집 나와서 가난한 남자와 살림을 차렸기 때문에 읽던 책은 전부 다 친정집에 있었다. 책이 읽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가난한 중에 돈을 아껴서, 단 한 권의 문고판 책을 샀다. 괴테였다.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마치 세상이 그 책 한 권만 남기고 다 물에 잠겨 버린 듯이 그 책을 읽었다. 그러면서 내 배 속의 사람에게 말했다.
‘사람은 이렇게 가난할 수도 있다. 고통스럽기도 하다. 너도 그런 걸 알아야 한다. 인생은 이렇게 다양한 느낌들로 꽉 차 있는 것이다. 각오해야 한다!’

화가 김점선이 처음 털어놓은 ‘임신, 육아, 건강하게 자란 아들 이야기’

아들이 설치해준 컴퓨터로 그림작업을 하는 화가 김점선.


태중에서 고통을 당해서 그런지 그 사람은 아기 때부터 의젓했다. 태중에서 그 사람은 충분한 영양소를 모체로부터 공급받지 못했다. 너무나 가난해서 먹고 싶은 음식을 그 어미가 먹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매일 달걀을 먹으려고 노력했다. 두세 개쯤 먹는 날도 있었다. 삶은 달걀을 먹으면서 태중의 사람에게 말했다.
‘먹고 싶은 걸 다 먹는 건 품위 있는 짓이 아니다. 달걀은 좋은 단백질이고 완전식품이다.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도 행복으로 알아야 한다. 세상은 그런 곳이다!’
나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태중의 사람한테 설명해주었다. 다행히 아기는 아무런 이상 없이 잘 자라주었다. 임신중독증이 있어서 주사기를 여섯 개나 몸에 꽂은 채 아이를 낳아야 했지만, 자연 분만했다. 그리고 일 년 동안 내 젖을 먹여 길렀다. 임신 중에도 수유 때도 목이 마를 때마다 우유를 마셨다.

원하는 방식으로 키우고 싶었지만, 스스로 자라난 아들
나는 영원히 미혼모로 아이를 키우려 했다. 사회에 대한 반항으로 호적 같은 걸 만들지 않고 원시인처럼 구석기 시대 방식으로 아이를 기르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아이가 백일이 조금 지났을 무렵, 남편이 나 몰래 동사무소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고 출생신고도 해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법적 가족이 되었다. 남편으로 인해서 나의 인생관이 침해를 받은 것이다. 내 생각은 또 있었다. 아이는 아들이지만, 이름을 ‘순자’라고 지으려 했다. 씩씩한 남자이름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평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은 ‘상욱’이라는 이름으로 동회에다 신고해버렸다. ‘무엇 하나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결혼이구나’ 하면서 혼자 슬퍼했다. 더욱이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남편은 순자라는 이름으로 너를 부르려고 했다고 아들한테 일러바치기까지 했다. 아들은 펄쩍 뛰면서 큰일 날 뻔했다고 아버지를 고마워했다. 그럴 때 나는 속으로 다시 슬펐다. 너희들이 내 깊은 뜻을 이다지도 모르다니!
아들이 대학생이 된 어느 날 말했다.
“엄마! 순자라는 이름이면 멋지겠어!”
나는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그러면서 속으로만 말했다. 그걸 깨닫는 데 이십 년도 더 넘게 시간이 걸리는구나! 다시 슬퍼졌다.
나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 싫었다. 내 식으로 기르고 싶었다. 그래서 아주 어릴 때부터 학교는 나쁜 곳이고 집에서 혼자 공부해야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유치원 갈 나이가 되니까 옆집아이가 유치원 간다고 자랑해댔다. 그러니 우리 아이도 가겠다고 졸랐다. 할 수 없이 유치원엘 보냈다. 똑같은 일이 초등학교 갈 무렵 다시 벌어졌다. 중·고등학교도 대학도 다 가고야 말았다. 내 뜻대로 된 일이 없다. 나는 혼자 생각하고 참고서적을 도서관에서 읽는 독자적인 인생을 살기 원했는데.
아이는 그림을 잘 그리고 만들기도 잘한다. 화가나 조각가가 되기를 원하기도 하고 연극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아이가 말했다.
“나는 엄마같이 친구들도 안 만나고 늘 혼자서 그림 그리면서 사는 인생이 싫어! 난 그렇게 살 수 없어! 나는 늘 동료들하고 우글우글 살고 싶어, 직장 상사를 존경하면서 충성을 바치면서 인간관계 속에서 살고 싶어.”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아무것도 강요할 수가 없었다.
아들이 자라났다.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화가였다. 그는 평생을 내 그림을 보면서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내 그림을 길에 뒹구는 돌 보듯이 한다.
내가 오십견이 와서 그림을 못 그리게 되었다. 그 시절, 죽음에 이르는 듯한 고통을 겪었다. 남편이 죽고 난 직후에 오십견이 온 것이다. 슬픔과 우울이 합쳐져 그런 일이 생겼다. 살아날 방책으로, 몸과 마음을 어떤 일에 집중시킬 방법으로 컴퓨터를 떠올렸다. 매일 미친 듯이 컴퓨터를 파고들었다. 곧 컴맹에서 탈출했다. 우연히 디지털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내가 디지털 그림을 그리자 아들은 놀라면서 나를 화가로 인정했다. 아들은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다. 아들에게 가장 익숙한 도구인 컴퓨터를 내가 사용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맨 처음에 내 디지털 그림을 보고 아들이 말했다. “우와, 굉장하다! 놀랍다! 내 주변에는 맨 컴퓨터 전문가들이고 그들이 그리는 그림을 수없이 봐왔는데 엄마는 정말 다르다. 아하! 화가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우리 엄마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아들은 이렇게 감탄하면서 내게 필요한 도구들을 설치해주었다. 광 마우스로 그리던 그림을 마우스 펜으로 그리게 됐고, 나는 아들 덕에 컴퓨터를 겁 없이 쓴다. 아무데나 클릭해 열어보고, 하나하나 시도해보고, 그렇게 아무렇게나 쓰다가 고장이 나면, 아들에게 메신저로 물어보거나 그것도 고장이 나서 안 되면 전화를 손에 들고 지시대로 고쳐가면서 썼다. 처음 컴퓨터를 대할 때부터 컴퓨터를 부수어먹을 각오로 덤벼들었다. 지금은 내 생애 네 번째로 새로 산 컴퓨터를 사용 중이다. 너무 심하게 고장이 나면 아들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주말이 되고, 아들이 오면 내가 저질러놓은 모든 잘못을 다 고쳐놓는다. 그런 아들 덕에 나는 환갑이 다 돼가는 나이에 한없이 용감하고 진취적인 디지털리스트로 부활했다.
※ 이 기사는 (주)샘터가 출간한 에세이집 ‘첫아이’ 중 일부를 발췌, 소개한 것입니다. ‘첫아이’에는 화가 김점선 외에도 작가 김별아, 만화가 장차현실, 한의사 이유명호, 언론인 서명숙 등 스물 한명의 엄마가 쓴 아이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여성동아 2007년 5월 5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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