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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가슴 아픈 이별

백혈병으로 세상 뜬 아들의 작가 꿈 이뤄준‘정표 엄마’ 김순규

기획·구가인 기자 / 글·안소희‘자유기고가’ / 사진·박해윤 기자, 홍태식‘프리랜서’

2007. 04. 23

지난 1월 작가의 꿈을 꾸던 열세 살 소년 이정표군이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년 9개월의 투병 기간 동안 병상에서 쓴 아들의 일기를 묶어 책으로 펴낸 어머니 김순규씨를 만나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던아들의 투병과 그리움에 대해 들었다.

백혈병으로 세상 뜬 아들의 작가 꿈 이뤄준‘정표 엄마’ 김순규

“제이름은 이정표입니다. 책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백혈병을 이겨낸 아이입니다. 제가 절망하지 않고 병과 싸울 수 있도록 도와주신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라고 했겠지요. 정표가 이 자리에 있다면요.”
작가가 되고 싶던 아이, 이정표군의 21개월간 투병기를 담은 책 ‘정표 이야기’ 출간 기념 기자 간담회 자리에서 정표의 어머니 김순규씨(42)는 정표의 마음을 대신 전하며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정표가 백혈병 판정을 받은 것은 지난 2005년 3월. 5학년에 올라가 새 학기를 바쁘게 보내던 중 새벽녘에 쏟아진 코피가 멎질 않아 병원 응급실을 찾은 후의 일이었다. 곧바로 항암치료에 들어갔고 지난한 투병생활이 시작됐다.
“입원을 하고 며칠간은 우리가 처한 현실이 믿겨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잠을 깨고 일어나면 문 앞에 ‘소아 혈액종양 병동’이란 안내판이 현실을 일깨워주었지요. 창문도 없는 무균실에 있으면 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고립감을 느낍니다. 왜 내가 이런 감옥에서 살아야 하냐고, 이건 감옥보다 더 무섭고 싫다고 울던 정표를 안고 울다 지쳐 잠이 들곤 했지요.”
병원에 입원해 항암치료를 시작한 지 보름이 넘어갈 무렵 정표는 문득 일기를 쓰고 싶다고 했다. 작가가 꿈인 정표는 나중에 어른이 돼 일기장을 보면 큰 힘이 될 거라며 병상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중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겠다는 이야기도 했다.
“정표는 정말 특별한 아이였지요. 소아암병동에 입원해 있는 아이들은 지루함을 잊기 위해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TV를 보며 시간을 때우기 일쑤인데 정표는 그림을 그리거나 일기를 쓰는 걸 더 좋아했어요. 어른도 몸이 아프면 만사가 귀찮은 법인데 어린 녀석이 정말 의지가 대단하더라고요. 너무 아파서 글을 쓸 수 없을 땐 일기를 불러주어 적게 했어요. 아프면 아플수록 글쓰기에 집착했는데 아마도 일기가 정표에게 그만큼 큰 힘이 되었던가봐요.”

어렵게 골수이식했지만 갖가지 합병증과 부작용에 시달려
백혈병으로 세상 뜬 아들의 작가 꿈 이뤄준‘정표 엄마’ 김순규

초등학교 5학년이던 열한 살에 백혈병 판정을 받은 정표군은 1년9개월의 투병생활 끝에 지난 1월 세상을 떠났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항암치료를 계속하던 정표에게 유일한 희망은 골수이식이었다. 그러나 가족 중에 정표와 유전자가 일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국내에 5명의 후보가 있었지만 모두 공여를 거부한다는 싸늘한 통보만을 보내왔다. 다시 공여자를 찾아 나선 가족들은 주변으로부터 유전자가 100% 일치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로또 당첨보다 더 어렵다는 말만 들어야 했다. 그러던 중 기적같이 일본에서 공여자를 찾았다.
“기적이었죠. 유럽, 미국, 대만을 거쳐도 없었지만 일본에 단 한 분의 유전자가 100% 일치한다고 했어요. 게다가 골수이식까지 동의해주시니… 얼굴도 모르는 아이에게 희망의 빛을 주신 분이죠.”
고된 항암치료 후 정표는 2005년 10월, 골수이식수술을 받았다. 큰 산 하나를 넘은 것이다. 그러나 정작 시련은 수술 이후에 찾아왔다. 피오줌을 누며 통증이 계속되는 출혈성 방광염,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 폐렴, 골다공증 같은 합병증과 부작용에 시달려야 했다. 정표는 그때의 고통을 손에 잡힐 듯 오롯이 일기장에 담고 있다.
초음파 검사 결과 출혈성 방광염이라 주치의 선생님이 소변 줄 꽂았는데 너무 아팠음. 그래서 정신없이 울고, 꽂고 난 후에도 거의 경기 일으킴. 골수 검사하는 것보다 훨씬 아파 정신없이 소리 지르고 진정이 안 되었음. -2005년 12월 정표의 일기 중

이날의 일기는 모든 문장을 명사형으로 끝맺었다. 너무 고통스러워 글자수를 줄여쓴 것이다.

백혈병으로 세상 뜬 아들의 작가 꿈 이뤄준‘정표 엄마’ 김순규

정표군(가운데)이 건강하던 시절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맨 위). 아들의 유품인 일기를 보고 있는 어머니 김순규씨(가운데).


아우! 나는 아무리 조심해도 사고를 면하지 못하는 인생인가보다. 너무너무 답답해서 2주 만에 휠체어를 타고 나가려다 허리 아래쪽 5번 뼈가 아팠다. 아파서 뒤로 바로 눕고 너무 속상해서 영혼 이탈이라도 해서 저 푸르른 밖으로 나가고 싶다. -2006년 5월 정표의 일기 중

그러나 열세 살 소년은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극한의 고통을 희망의 씨앗으로 삼았다. “조금 있으면 아파서 정신없을 건데 지금 덜 아플 때 빨리 일기장과 연필을 꺼내주세요”라고 말할 만큼 통증이 심할수록 일기장을 부여잡았다고. 정표의 이런 모습은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작가가 되고픈 정표의 꿈은 현실이 되었다. 난치병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한국 메이크어위시 재단에서 정표에게 책을 만들어 선물하기로 한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정표는 정말 좋아했어요. 믿기지 않는다며 몇 번이나 진짜냐고 되물었지요. 자신의 책에 어떤 사인을 할까 고민하며 행복해했습니다.”
하지만 항암치료와 골수이식의 합병증과 부작용은 더욱 심해졌다. 골다공증이 심해 혼자서는 서거나 앉지 못했고 입 안은 모두 헐어 피투성이가 되었다. 음식은커녕 침조차 삼킬 수 없었다. 그 무렵 정표는 지칠 대로 지쳐 힘겨워했다.



난 이제 한계다. 누가 좀 살려줬으면 좋겠다. 하루하루가 너무 심해지고 있고 입이 아파서 죽을 것 같다. 허리가 벌써 1년째 이러는데 낫지도 않고… 난 희망이 없는 것 같다. 그만 힘들었음 좋겠다. 이제는 그만 쉬었으면 좋겠다. -2007년 1월 정표의 일기 중

“그때 정표가 저한테 물었어요. 자신이 나을 수 있는 거냐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기 때문에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학교에도 가고 싶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끝없이 한참 동안 ‘싶고, 싶고, 싶고…’를 의식이 가물가물할 때까지 연속해 말하더군요. 그때 바깥에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어요. 한참을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던 정표가 ‘엄마~ 사랑해요!’ 천천히 말하는데 운명의 시간이 점점 다가온다는 걸 느꼈지요.”

“고맙다”는 말 남기고 끝내 세상을 떠나
정표의 일기는 1월11일로 끝난다. 의식이 남아 있는 정표가 가족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고마워’였다. 정표는 제 책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2007년 1월14일 아침 하늘나라로 떠났다. 정표가 앓기 전 가족이 함께 여름휴가를 보냈던 화진포 해수욕장에 정표의 유골을 뿌리고 돌아온 날. 정표의 빈방과 식탁의 빈자리는 남은 가족들에게 유난히 크게 다가왔다. 정표의 빈방을 둘러보다 주인 없는 침대 머리맡에 붙어 있는 메모지 한 장에 부모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정표가 행복한 이유들: 1.골수 이식받음. 2.살아 있음 3.따뜻한 주변분들. 4.내 보물1호 가족. -정표가 남긴 메모

“그 메모를 보며 항상 행복한 이유를 스스로 찾아 나섰던 정표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이렇게 넋 놓고 있을 수가 없었지요. 정표의 일기가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분들께 작은 희망의 울림이 되길 바라며 책을 만들기로 했지요.”
가족들은 정표의 일기와 편지, 어머니 김순규씨의 글을 더해 정식으로 책을 출간했다. 정표의 살점과 같은 하루하루의 기록들을 읽으며 아버지 이씨는 새록새록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듣는다고 한다. 부부는 오는 5월 일본의 골수이식 은행을 방문할 계획이다. 비록 정표는 없지만 정표의 일기와 함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정표가 버틸 수 있었던 건 가족과 일기의 힘만이 아니에요. 정표에게 골수를 이식해준 이름모를 일본인, 정표에게 혈소판 헌혈을 해준 스물두 명의 이웃과 동료들, 투병을 응원해준 정표 친구들과 선생님, 정표를 위해 애쓰신 수많은 분들이 있었기에 정표는 짧은 생이나마 많이 사랑받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제 그 사랑을 저희 가족도 나누고 싶습니다.”
어머니 김씨는 책을 통해 소아암을 앓는 소년과 그 가족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알리고 싶었다고 한다. 아픈 아이들에 대한 작은 관심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세상에 알려서 그들이 더 많이 사랑받고 더 많이 행복했으면 한다고.
“정표는 사는 것이 기쁨이라는 말을 자주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남은 가족을 위해 남긴 메시지였던 것 같아요. 정표를 떠나보낸 아픔을 품고 살아갈 가족에게 온몸으로 희망의 메시지를 남긴 거죠. 그래서 저희들은 행복하고, 행복합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큰 깨달음을 얻었어.
파란 하늘, 맑은 공기
이런 걸 느끼기만 해도 큰 행복이란걸.
당연히 생각하고 밟고 다니던 학교 운동장의 흙
이제 그 한 줌 흙을 떠서
혹시라도 거기에서 지렁이가 나오면
‘오, 아가!’ 하며 살아 꿈틀대는 모습에 감격할 것 같아 -2005년 11월 정표의 일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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