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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틱 인생

첫 시집 ‘봄날 불지르다’ 펴낸 시인 유영금 굴곡진 삶 고백

글·송화선 기자 / 사진·지호영 기자

2007. 03. 21

평탄한 결혼생활 중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하고 남편의 배신으로 고통스런 삶을 살아온 유영금씨. 그는 최근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담아 시집 ‘봄날 불지르다’를 펴냈다. 힘겨웠던 시절을 보내고 꿋꿋하게 다시 일어선 유씨를 만났다.

첫 시집 ‘봄날 불지르다’ 펴낸 시인 유영금 굴곡진 삶 고백

머리칼에/ 신나를 바르고/ 성냥을 그어댄다/ 지글지글 타는 두개골/ 냄새의 찌꺼기가/ 봄날을 쾅 닫는다// 누가/ 나를 맛있게 먹어다오 - ‘봄날 불지르다’ 전문

최근 첫 시집 ‘봄날 불지르다’를 펴낸 유영금씨(50)의 시는 뜨겁다. 스스로를 불질러 태워 없애고 싶어하는 날것의 분노가 끓어 넘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아프다. 그 안에 담긴 삶의 비루함, 깊은 자기 혐오와 저주의 통곡이 생생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아직 바람이 차던 지난 2월 중순, 서울 한 찻집에서 유씨와 마주 앉았다. 그는 시 속에 살아 있는 자신의 신산했던 삶과 그것을 이기고 시인으로 다시 태어나기까지의 인생에 대해,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하지만 이내 더 크게 웃으며 천천히 들려줬다.
유씨가 시를 쓴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자기 안에 쌓여 있는 분노와 아픔을 털어 세상에 던져버리기 위해, 그는 철이 들기 훨씬 전인 일곱 살 때부터 시를 썼다.
“제가 기억하는 최초의 감정은 외로움이에요.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텅 빈 흙집에 혼자 앉아 늘 누군가를 기다렸죠. 우물에 두레박을 내리고 출렁이는 물과 대화하면서 머릿속에 시를 썼다 지우곤 했어요.”
강원도 태백시 동점동. 인가가 몇 채 없는 광산마을 산골짜기에서 그는 어머니가 마흔일곱에 본 늦둥이로 태어났다고 한다. 9남매의 막내인 그가 태어났을 때 언니 오빠는 이미 다 자라 외지로 나간 뒤였고, 쉰이 넘은 아버지는 늦바람이 나 있었다. 날마다 아버지를 찾겠다며 도시를 헤집고 다니는 어머니를 대신해 다섯 살 터울 언니가 그를 키웠다.

첫 시집 ‘봄날 불지르다’ 펴낸 시인 유영금 굴곡진 삶 고백

“해가 지면 집 앞 나팔고개에 앉아 학교 간 언니를 기다렸어요. 까마득히 먼 곳에서 가방을 흔들며 돌아오는 언니를 보고 활짝 웃으며 달려나가던 일, 그게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오직 하나의 따뜻한 기억이죠. 그때부터 이미 저는 알았던 것 같아요. 내 인생에 행복은 없다는 걸요.”
시간이 흐르며 그의 삶은 더 신산해졌다. 유씨가 중학생이 되던 해 중풍을 맞은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머니는 그 꼴이 보기 싫다며 아예 집을 나가버렸고, 막내언니 역시 취직해 서울로 떠난 뒤였다. 유씨는 혼자 대소변을 받으며 아버지의 병 수발을 해야 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느껴지던 지독한 오물 냄새가 아직도 잊어지지 않아요. 아버지가 불쌍하고 측은하면서도 동시에 밉고 혐오스러웠죠. 바람을 피우던, 그걸 말리는 어머니를 때리던, 세상에서 가장 힘세고 당당한 사람인 척하던 한 사내가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내 앞에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아버지는 3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다시 혼자 남은 그는 태백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뒤 서울에 올라왔다고 한다. 그 사이 늘씬하고 똑똑한 여성으로 자라난 그는 서울 마포의 한 회사에 취직도 했다.
“그러다 한 남자를 만났어요. 스물세 살 때 같은 직장 언니가 고향 후배라며 남편을 소개해줬죠. 처음엔 그 사람의 순진하고 성실한 인상이 마음에 들었어요. 만나보니 착하기도 했고요. 그는 제 안에 쌓여 있던 남자에 대한 불신, 결혼에 대한 혐오감 같은 걸 조금씩 무너뜨리며 서서히 제게 다가왔죠.”
남편은 대기업에 다니는 한 살 연상의 청년이었다고 한다. 따뜻하고 정이 많은 가정에서 자란 게 자연스레 느껴지는 사람이었다고. 매일 저녁 회사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남편을 보며 유씨는 “이제는 나도 조금쯤 누군가에게 의지해도 좋은 걸까” 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따뜻한 행복에 대한 기대도 생겼다. 그렇게 1년쯤 연애하다, 그들은 81년 결혼식을 올렸다.

15년간의 행복했던 결혼생활, 어느날 끔찍한 교통사고가 모든 것을 앗아가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결혼한 해 바로 아들을 낳았고, 남편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가정적이었다고.
“주말이면 설거지와 다림질, 집 청소까지 다 맡아 할 만큼 다정하고 살뜰한 사람이었어요. 시어른들도 저를 ‘영금아’ 하고 부르며 딸처럼 대해줬죠. 드디어 내게도 가정이 생겼구나, 이게 바로 행복이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어린 시절부터 시인을 꿈꾸던 유씨는 94년 청구문학 시 대상을 받으며 등단도 했다. 그렇게 15년 동안, 그는 행복이 자신의 것이라고 믿으며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95년 10월15일 일어난 끔찍한 사고는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고 말았다.
“가을이 무르익은 날이었어요. 남편이 ‘이렇게 아름다운 날 시인이 집에 있으면 안 된다’며 함께 드라이브를 가자고 했죠. 경기도 포천에 가서 맛있는 밥도 먹고 오랜만에 단둘이 데이트도 했어요.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자꾸 기분이 이상하더군요. 뭔가 불안하고, 빨리 집에 가고 싶었어요.”
그때 교통사고가 났다. 신호 대기를 위해 서 있는 그의 차를 다른 차가 뒤에서 들이받은 것이다. 목이 앞으로 꺾이는 듯한 큰 충격을 느끼며 유씨는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고, 정신을 차려 보니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목 아래쪽으로는 어느 한 부분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운전을 하던 남편은 목 인대만 조금 늘어났을 뿐, 별다른 상처가 없었다고 한다.
“저는 목뼈 사이의 연골이 다 흘러나오고, 신경이 크게 다친 심각한 상태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엉덩이 위쪽에 있는 장골을 잘라 목뼈 사이에 넣고, 식도 쪽에서 못을 박아 고정하는 수술을 받으면 다시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래서 큰 병원으로 옮겨 이듬해 3월로 수술 날짜를 잡고, 7개월 동안 물리치료만 받으며 기다렸죠.”

첫 시집 ‘봄날 불지르다’ 펴낸 시인 유영금 굴곡진 삶 고백

더 큰 시련은 그때 찾아왔다. 그토록 사랑하던 남편이, 아내가 수술을 기다리며 누워 있는 동안 바람이 난 것이다. 가해자가 붙여준 간병인이 없으면 혼자 자리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는 아내를 두고 남편은 외박을 하기 시작했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면서도 유씨는 한동안 자신 앞에 닥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워낙 성실했던 사람이라 더 그랬던 거 같아요. 만약 한 번이라도 바람을 피운 적이 있었다면, 제게 상처를 덜 주면서 좀 더 세련되게 다른 사람을 만나는 방법을 알았겠죠. 하지만 그 사람은 그걸 못한 거예요. 물불 안 가리는, 그야말로 사랑에 눈이 먼 상태가 돼버린 거죠. 남편은 제가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들어가던 날조차도 저를 보러 오지 않았어요. 어느 날 갑자기 건강과 가족을 동시에 잃어버린 저는, 목을 다쳐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소리로 매일 혼자 울었죠.”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유씨는 “수술이 잘못돼 죽어도, 혹은 걸을 수 없게 되거나 다시는 말을 할 수 없게 될지라도 소송을 걸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류에 서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취 때문에 천천히 사라져가는 의식 속에서 “차라리 이대로 죽었으면” 하고 생각했다고. 하지만 그는 다시 깨어났고, 저주스럽게도 그의 무의식은 마취 때문에 뿌옇게 흔들리는 회복실 안에서 남편의 얼굴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없었어요. 아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대수술을 받으러 갔는데도 그는 그 자리에 오지 않은 거였죠. 전 그날 회복실 침대 위에서 결심했어요. 내가 만약 일어날 수 있게 된다면 널 죽이러 가겠노라고, 꼭 기관총을 쏘아 내 눈앞에서 너를 죽게 만들겠다고요.”
하지만 남편에 대한 분노는 오래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힘들게 한 건 남편의 배신보다, 바보같이 사랑을 믿었던, 그리고 자신이 행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스스로에 대한 혐오였다고 한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유씨는 2년 이상 재활치료를 받아야 걸을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여전히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고, 남편은 그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박살난 차는 깜깜한 벼랑 아래 내장이 터져 뒤집혔다 여우는 꼬리를 감추고 절벽을 차오르는 파도 소리만 으르렁거렸다 모래 기슭엔 부서진 배 한 척 살이 깎이며 묵언중이었다 사납게 달려드는 해일은 모래 기슭을 삽시간에 집어삼켰다 - ‘19961017, 원고인 진술서’ 일부

아빠에 대한 배신감을 이기지 못해 방황하다 자살까지 기도한 아들…
그의 가정은 ‘박살난 차’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산산조각 부서지고 말았다. 유씨는 사고 뒤 1년 만인 96년 10월17일, 남편과 이혼했다. 간병인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걸음을 옮겨 법원으로 향하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 유씨의 머릿속에는 생생히 남아 있는 듯했다.
사실 유씨는 힘겹게 지나쳐온 모든 날의 상처를 가슴속에 사무치게 간직하고 있었다. 정확한 날짜와 요일을 기억했고, 심지어 그날의 날씨까지 마치 직접 느끼는 듯 묘사하곤 했다. 그가 가장 잊을 수 없는 날은 그해 11월2일, 모든 정리를 끝낸 남편이 짐을 들고 집을 나가던 날이라고 한다.
“그날은 마침 토요일이었어요. 저는 아이가 학교에서 오기 전에 짐을 정리해 나가달라고 부탁했죠. 그런데 그가 시간을 끄는 바람에 돌아오는 아이와 맞닥뜨린 거예요. 아빠가 짐을 싸들고 집을 나가는 모습을 본 아이는 그대로 집을 뛰쳐나가버렸죠.”
당시 중학교 3학년생이던 아들은 그날 이후 완전히 변해버렸다고 한다. 유씨를 닮아 감수성이 예민하고 내성적이던 아들은 자신의 삶을 망쳐놓은 세상에 대해 복수를 퍼붓기 시작했다고. 자살을 기도하다 병원에 실려 갔고, 다시 집에 돌아오면 방문을 걸어잠근 채 며칠 동안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한 달 만에 스스로 자퇴를 했다. 병석에 누운 채 “제발 학교에 가라”고 사정하는 유씨에게 “칠판을 쳐다볼 때마다 아빠 얼굴이 보이는데 나더러 어쩌라는 말이냐”고 소리치는 아들을 보며 그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을 느꼈다고 한다.

“자기를 버린 아빠도, 병든 엄마도 다 싫다고 하더군요. 방황하는 아들에게 안타깝고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픈 몸으로 배신의 상처를 곱씹고 있는 엄마에게 어떻게 저럴 수 있나 하는 원망도 들었어요. 내가 일어날 수만 있다면, 제대로 이야기만 나눌 수 있다면 달라질 수 있을 텐데 생각하니 정말 미칠 것만 같았죠.”

나는 나를 만나러 가오/ 불행의 어미 시로부터 달아나오// 미안하지만 시계소리 잠깐만 꺼주오/ 시간의 틈을 빠지는 사이 안구를 꺼내/ 세상이 그리워 눈뜨지 못하는 이에게 옮겨주오/ 가능한 다른 장기도 꺼내 사용하시오/ 시신기증 번호는 699라오// 구경하지 않아도 좋았을 곳,/ 갯벌 해조울음이 나를 깨워도 오지 않겠소 - ‘유서’ 전문

그는 그 무렵 전신이 부서질 것만 같은 교통사고 후유증과도 싸우고 있었다. 재활치료는 더뎠고, 여전히 간병인이 없으면 혼자 화장실조차 가지 못하는 상태였다. 보다 못한 친정 식구들이 그에게 아들을 외국에 보내라고 권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를 떠나면 아빠에 대한 기억을 잊고 조금이라도 마음을 잡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조언이었다.
“그래서 아이를 뉴질랜드로 떠나 보냈어요. 공항으로 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죠. 저 아이가 그곳에서 죽어버리면 어쩌나, 이것이 내가 보는 마지막 모습이 아닐까 두려웠어요.”
아들은 그곳에서도 마음을 잡지 못했다고 한다. 한밤중에 국제전화를 걸어와 “여기가 30층 빌딩 옥상인데, 지금 뛰어내리려 한다”고 말하다가 어느 날엔 아예 연락을 끊어버리는 등 유씨의 속을 태웠다. 그 무렵 그렇게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유씨의 마음을 위로해준 유일한 존재가 바로 시였다고 한다. 유씨는 혈관 속에서 터져나오려고 하는 울음과 분노를 한 자 한 자 받아적으면 그것이 그대로 시가 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렇게 유씨가 50여 편의 ‘유서’ 시 연작을 완성할 무렵, 뉴질랜드에서도 자살을 기도하고 방황하던 아들이 현지 어학원에서 강제로 쫓겨나 서울로 돌아왔다.

슬픔을 빨아 맑은 하늘에 널면/ 구름 사이로 펄럭이는 슬픔 자락들/ 햇살보다 눈부시다// 해질 무렵/ 보송보송한 슬픔을 걷어/ 서랍 깊이 넣어둔다// 우기의 나날에도/ 곰팡이가 피지 않게/ 나프탈린 몇 알과, - ‘살아내기’ 전문

“아들은 다시 저를 만난 뒤에야 비로소 깨달은 것 같았어요. 그렇게 아파하던 엄마가 아직도 살아 있는 걸 보면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제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요. 자기 생도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는 거라면, 남은 시간들은 좀 더 제대로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비로소 한 것 같았죠.”
그리고 아들은 이번엔 자신이 먼저 “외국에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큰 상처를 남긴 이 나라를 떠나 새롭게 출발해보고 싶다고 말한 것이다. 이혼 당시 아들의 교육비만큼은 책임지겠노라고 했던 남편이 보내온 돈과, 위자료로 받은 집을 팔아 작은 집으로 옮긴 뒤 남은 돈을 모아 유씨는 다시 한 번 아들을 뉴질랜드로 보냈다. 그리고 아들은 그곳에서 새롭게 태어났다고 한다.

아들에게 더 이상 아픔을 주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
“처음엔 불안한 마음에 하루에 한 번씩 전화를 걸었죠. 그때마다 아이는 영어공부 열심히 하며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고,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더군요. 그러고는 이듬해 한국에 들어와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했어요. 아들은 자기 또래들이 수능시험을 보던 해인 2000년 대학에도 붙었죠. 외국에 1년밖에 안 있었는데 그곳에서 성실하게 영어를 공부한 덕에 토플 점수를 잘 받아 영어 특기자로 간 거예요.”
아이가 그렇게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동안 성실하게 재활치료를 받은 유씨도 그 무렵부터 조금씩 혼자 걸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마침내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던 날,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는 처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배신의 아픔도, 아들이 후벼팠던 가슴의 생채기도, 그리고 여전히 24시간 몸을 옥죄는 교통사고 후유증의 고통도 다 잊었다고 한다. 엄마 아빠 때문에 상처받은 아들, 그 어려움을 혼자 이겨내느라 젊고 빛나는 시절을 힘들게 보낸 아들에게 더 이상 아픔을 주면 안 되겠다는 각오가 섰기 때문이다.
대학에 다니다 휴학하고 군대를 다녀온 아들은 지난해 몇 달간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돈으로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호주로 떠났다고 한다. 복학할 때까지 그곳 농장에서 세상 경험을 해보겠다며,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고 여행을 다니는 등 건강하고 씩씩하게 지내고 있다고.
그리고 서울에서 유씨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사고를 당한 뒤인 97년 진주신문 가을문예 시 부문에 당선된 그는, 2003년 문예지 ‘현대시’를 통해 다시 등단했고, 그 이력을 바탕으로 ‘별 줍는 아이 글쓰기 교실’을 열었다. 지금도 여전히 잔인한 통증이 그를 괴롭히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순간만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초롱초롱한 눈망울, 거침없는 상상력과 글 솜씨를 보고 있으면 “내가 살아 있구나”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라고.
“이번에 시집을 낸 건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서예요. 내 안에 있던 상처와 분노를 세상 한복판에 던져버리고 이제는 다시 태어나고 싶어서죠. 아직도 식도에 박혀 있는 네 개의 쇠못, 그리고 제 심장에 더 아프게 박혀 있는 가슴의 못들이 느껴지지만, 그때마다 전 이렇게 생각해요. 이것이 내 몸에 박히던 순간과 비교하면 지금은 얼마나 행복한가 하고요.”
호주에서 엄마의 시집 출간 소식을 들은 아들은 통화를 할 때마다 “이곳으로도 한 권만 보내달라”고 얘기한다고 한다. 하지만 유씨는 마음 여린 아들이 엄마의 상처를 보고 다시 눈물 흘리게 될까 두려워 아직 책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고. 이제 그의 바람은 아들이 읽고 행복해할 수 있는 시를 쓰는 것, 따뜻하고 아름답게 새로운 삶을 노래하는 것이다.
“이 책을 내면서 저는 과거의 저를 놓아버렸어요. 지금까지는 제 상처를 헤집으며 소리 질렀지만 앞으로는 따뜻하게 세상을 끌어안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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