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했다. 3남1녀, 자식 넷을 얻어 남자 혼자 키워온 지 25년이 넘었다. 누가 들어도 “그 팔자도 참…” 하며 혀를 찰 사연의 주인공. 그는 경력 40년의 베테랑 성우 박일(58·본명 조복형)이다.
그와 긴 세월 가까이 지내온 남자들은 그를 가리켜 “가족밖에 모르는 바른 생활 사나이”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여자 동료들은 “잡히지 않는 바람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바람’과 ‘바른생활맨’은 분명 잘 어울리지 않지만 싱글 대디로, 한국 성우계의 최고참 베테랑으로 성실히 자기 자리를 지켜온 그의 삶을 이처럼 적절하게 말해주는 표현도 없다.
스무 살 때의 첫 번째 결혼과 10여 년 후 30대 초반에 했던 두 번째 결혼에 대해 그는 “두 번 다 신중하지 못한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두 번의 결혼 모두 서로에 대해 잘 알고 했던 게 아니라 오래 가지 못했던 것 같아요.”
첫 결혼 당시 그는 동양방송(TBC)에 막 입사한 사회 초년생이었는데 예기치 못한 임신으로 입사 일주일 만에 청첩장을 돌리고 식을 올렸다고.
“신혼살림을 시작하고 며칠 지내보니 집에 들어가기 싫더라고요. 단칸방 살림이었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주려는 색시가 답답하기도 하고…. 결혼생활을 감당할 어른이 못 됐던 거죠. 그런 형편을 장인께 말씀드리고 잠시 떨어져 살고 싶다고 했더니 장인어른은 기가 막혀서 ‘허허’ 웃기만 하더니 ‘그러라’고 하시더군요. 별거 상태에서 첫째 아들을 낳았어요.”
아토피를 심하게 앓았던 막내 아들 성재군과 함께. 그의 지극정성으로 아들의 아토피 증세는 많이 호전됐다고 한다. 어릴적 쌍둥이 아들과 함께(오른쪽).
세 살 터울 남매 얻은 후 이혼, 스물세 살에 시작된 싱글 대디 생활
아들 성만씨(38)를 낳은 후 그들은 “다시 한 번 잘 살아볼 생각”에 살림을 합쳤고 그 사이 딸 경아씨(36)가 태어났다. 주위 사람들은 ‘이제 아이가 둘이니 저 철부지도 마음잡고 잘 살겠지’라고 기대했지만 오히려 딸을 낳은 후 이들 부부는 이혼을 하게 됐다고 한다. 구속받기 싫어하는 자신과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챙기려 하는 아내…. 아이가 둘이나 있었지만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은 도저히 극복이 안 되더라는 것. 두 살 터울 남매와 함께 싱글 대디의 삶이 시작된 것이 그의 나이 겨우 스물세 살 때였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라 한집에 살면서 아이들을 돌봐주셨지만 딸은 제가 심청이 아버지 심봉사처럼 젖동냥해서 키웠습니다.”
당시 서울 서대문구 영천에 살던 때라 독립문 근처에서 젖엄마를 구해 딸을 데리고 다니면서 모유 수유를 했다고 한다.
“아이들 엄마의 빈자리를 제가 다 채울 수는 없지만 상처를 최소한으로 줄여보고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인 70년대는 라디오 연속극과 TV 외화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정신없이 일하던 때였지만 주말에는 반드시 아이들을 데리고 들로 산으로 놀러 다녔다고.
“아이들 기 죽을까봐 수영장이다, 스키장이다 방학이면 열심히 끌고 다녔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보다는 아이들을 편하게 해주는 게 제일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웃음).”
미안한 마음에 ‘오버’를 하지 않아도 두 아이들은 이미 아빠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며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더라는 것이다.
“아이들 학교에도 부지런히 찾아가곤 했어요. 딸이 중학교에 올라가더니 ‘이제 학교 그만 오라’고 하더군요. 친구들이 ‘너희 아빠는 잘 생겼는데 왜 너는 닮지 않았느냐고 놀린다’면서요. 하하하”
엄마 없이 어린 남매를 키우는 건 쉽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딸의 울음 끝이 길어 애를 많이 먹었다고.
“한번은 휴가철이 됐는데 장맛비가 계속 와서 약속한 대로 수영장에 갈 날씨가 아니었어요. 그래도 안 가면 딸아이가 울 것 같아 쏟아지는 비를 뚫고 장흥에 있는 수영장에 데리고 갔죠. 그런데 제가 텐트를 치고 있는 사이 딸아이가 쇠막대기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지 뭡니까. 우는 아이를 달래며 장흥에서 신촌까지 택시 타고 달려가 머리를 꿰매고 다시 수영장으로 데리고 갔어요. 안 그러면 더 울어댈 참이니까.”
그렇게 애를 먹이던 딸은 훌쩍 커 자식들 밥상을 봐주는 아버지를 안쓰러워하며 살림을 곧잘 맡아 했다고 한다. 그는 “자식들이 해달라는 것은 다 해주는 아버지라는 걸 잘 알면서도 딸은 신발을 밑창이 닳도록 신고 다녔고 내 헌 옷을 아무렇지 않게 물려받아 입고 다녔다”며 딸 자랑을 했다.
아토피로 등이 갈라져 피가 흐르던 막내아들 봤을 때 가장 가슴 아파
남매가 어느 정도 자랐을 무렵, 그는 두 번째 결혼을 했다. 그는 성우 활동을 하면서 한동안 드라마에도 출연한 적이 있는데 드라마를 촬영하면서 알게 된 탤런트와 사랑을 싹틔운 것.
“드라마를 같이 하면서 불꽃이 일었는데 그게 소문이 나 주변 사람들이 다 알게 됐죠.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됐어요.”
그렇게 해서 식을 올린 두 번째 결혼 역시 몇 달 못가 끝이 났다. 그는 “헤어질 때는 몰랐는데 얼마 후 아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고 말했다. 쌍둥이 아들 형제였다.
“쌍둥이는 중학생 때까지는 아이들 엄마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제가 키웠어요. 떨어져 살 때도 아이들이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지 않도록 주말마다 만나고 자주 통화를 하며 부자의 정을 쌓았죠. 그랬더니 어느 날 아이들이 먼저 ‘아빠와 살고 싶다’고 하더군요.”
쌍둥이 아들 중 큰아들은 군 제대 후 외국 유학 중이고 막내 성재군(25)은 제대를 하고 그와 함께 살고 있다.
“우리 막내가 지금은 건강한데 한동안 아토피로 고생을 많이 했어요. 여름에 차에 태우면 앉았던 자리에 진물이 흥건하게 고일 정도였으니까요.”
그는 내심 막내아들이 군대에 가지 않기를 바랐지만 아들은 “군복 입은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입대했다고 한다. 신체검사에서 떨어지자 병원에 다니며 치료받은 후 재검을 받아 기어이 간 군대였지만 얼마 안 가 상태가 악화돼 병원으로 이송됐다는 연락이 왔다.
“결과적으로 군복 입은 모습은 한 번도 못 보고 환자복 입은 것만 본 셈이죠. 결국 6개월 만에 의가사 제대했어요.”
국군병원에 입원한 아들을 면회하러 가보면 팔다리와 온몸이 논바닥 갈라진 것처럼 갈라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돌아오는 날이면 흐르는 눈물 때문에 운전을 할 수 없어 주차장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오곤 했다.
“아이들 키우면서 그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어머니도 돌아가신 후라 하소연할 때도 없었고. 차라리 제가 아팠으면 하고 바랐죠. 군에서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아토피로 고생하며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니며 안 해본 치료가 없어요. 공기 좋다는 곳도 많이 찾아다녔고 음식도 자연식 위주로 제가 직접 해먹였습니다. 그렇게 피나게 뛰어다니는 한편 지인의 소개로 한방 추출물로 만든 아토피 치료약을 복용하게 했는데 4개월이 지나면서 차츰 아토피가 잦아들더니 요즘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요즘도 아들이 약을 거르지 않을까 걱정돼 매일 확인하죠.”
“제 아이들은 이혼의 아픔 겪지 않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요”
딸 경아씨는 지난해 결혼했다. 그는 “늘 곁에 있어주었던 친구 같은 딸이 결혼하면 서운할 것 같았는데 이제는 사위까지 친구가 한 명 더 늘었다”고 말했다.
“딸이 어느 날 인사시킨다며 남자친구를 데리고 왔어요. 둘이 같이 나가는 뒷모습을 보는데 섭섭한 마음은 하나도 없고 참 기쁘고 든든하더라고요. 사위는 마흔살입니다. 사위라기보단 친구처럼 대하죠.”
딸이 초경을 맞았을 때 케이크를 사서 함께 박수치며 축하해주었고 홀아비 아빠로서 엄마 대신 성교육도 시키며 키운 딸이었다. 이혼을 했지만 아이들이 엄마와 만나는 걸 말릴 생각도, 말려본 적도 없었는데 큰 아이들의 엄마는 불의의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엄마 사랑을 못 받고 자란 딸이 오래오래 남편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사는 모습을 보는 게 그의 간절한 소망이라고 한다.
곧 마흔이 되는 큰아들이 아직 결혼을 안 한 것이 걱정이지만 자녀들만은 자신처럼 이혼의 아픔을 겪지 말길 바라는 마음이라 결혼을 재촉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두 번이나 이혼을 하고 아이들을 엄마 없이 키웠다는 사실은 제 인생의 큰 콤플렉스였지요. 항상 뭔지 모를 죄인 같은 심정으로 기를 못 펴고 산 것 같아요.”
두 번째 결혼이 실패로 돌아간 후 그는 다시는 여자와 인연을 맺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고 한다. 타고난 기질이 혼자 자유롭게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결혼을 두 번씩 해서 든든한 자식 넷을 얻은 건 좋지만, 실수는 두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고.
“빈말로라도 좋은 사람 소개시켜달라느니, 그런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이젠 주위에서도 다들 혼자 사는 게 당연하고, 편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헬스클럽에 가도 여자들 모인 근처에는 가까이 가지도 않는다는 그는 요즘 자신이 경영하는 성우 아카데미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에서 큰 즐거움과 보람을 찾고 있다고 한다.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참 좋고 젊은이들과의 관계가 제게 큰 힘이 되네요. 이제 우리 아이들은 다 커서 저와 안 놀아주는데 학생들이 저와 잘 놀아주니 얼마나 좋습니까!”
매일 저녁 두 시간, 주말이면 다섯 시간씩 강의을 하다 보니 외로울 틈도 심심할 틈도 없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서로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알 정도로 가까운 친구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는 순간이 그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 헬스클럽 다니며 운동을 열심히 하고 담배도 끊고 6개월마다 건강검진 받으며 건강에 유의하는 게 다 그 즐거움을 오래 누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기분 좋게 술 마시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면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아들, 딸, 사위에게 먼저 안부 문자를 날린다고 한다.
“사랑하는 나의 딸, 나의 희망 우리 아들, 이러면서 문자를 보내니까 처음에는 아이들이 머쓱해하더니 이젠 덩달아 장단을 맞춰줍니다. 애들이 항상 나에게 마음을 열길 바라는 심정으로 제가 먼저 주책을 떨어요. 그렇게 푼수가 돼서 사는 거죠, 뭐.”
자녀들이 언제든 마음을 터놓고 찾을 수 있는 아버지가 돼주고 싶었다는 박일. 그는 “이제 어느 정도 그 바람을 이룬 것 같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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