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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유인경의 Happy Talk

‘오빠와 애인 사이’ - 새로운 관계의 꽃밭

입력 2007.02.16 14:09:00

최근 난 나의 편견을 허물어뜨리는 자리를 경험했다. 50대 독신 예술가의 저녁 초대 자리, 그는 아름다운 30대 여성 둘을 자신의 친구 겸 애인이라고 소개했다. 서로 질투는커녕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는 두 여성의 반응 또한 다소 충격적이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들은 ‘말로 설명되거나 호칭으로 규정되는 관계’가 아닌 사랑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자신들의 관계를 자랑스러워했다 …
지난해 수첩과 명함을 정리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다시 새 명함이 수북해졌다. 그만큼 내 인간관계가 복잡해진다는 증거다. 아는 사람들이 모두 내게 매달 1만원씩만 보내줘도 생계 걱정 하지 않고 살겠지만 아는 사람들에게 그만큼 신경을 쓰고 밥이나 선물도 사줘야 하는 나이가 되다 보니 사람을 많이 아는 것이 재산이 아니라 빚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친척이나 학교 동창, 회사 동료처럼 확실하게 구분된 인간관계 외에도 제대로 규정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관계는 또 얼마나 많이 늘어나는가. 내 친구의 친구, 사돈의 팔촌, 어느 모임에서 만나 소개받은 사람, 남편 친구의 부인의 언니, 사촌의 친구인데 나와 더 가깝게 된 경우 등…. 그뿐인가. 남편이라고 해도 아버지처럼 믿음직한 남편, 아들같이 철없는 남편 등 확고하게 규정된 관계에서조차 그 종류가 다양하다.
막연히 ‘아는 사람’이라는 말도 그렇다. 난 내 남편과 20년 이상을 한집에서 살고 있지만 그 남자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가 없다. 식성이나 잠잘 때 엄청나게 코 고는 것 등은 알아도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런데 몇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일 경우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알고 그런 표현을 하는 걸까.
‘나와 친하다’는 관계도 그렇다. 몇 번 만나 식사하거나 학교, 직장, 동네를 안다고 친하다고 할 수 있을까. 초등학교부터 여고까지 12년간 똑같은 학교를 다닌 친구가 있지만 난 그 친구와 제대로 말을 나눈 적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나와 아주 친한 사이예요”라고 친분을 강조한다. 또 나는 진심으로 그와 친하다고 믿고 있지만 과연 상대방은 나와 친하다고 생각할까?
평소에 예리하고 냉철한 분석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면서도 인간관계에서만큼은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분명하게 ‘동창’ ‘선배’ ‘오촌당숙’ ‘조금 아는 사이’ ‘약간 친한 정도’ 등으로 규정했던 난 최근 그런 나의 편견을 허물어뜨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중요한 것은 ‘관계’가 아니라 관계를 이어가는 노력과 정성
얼마 전 한 예술가의 초대로 저녁식사 모임에 갔다. 50대의 독신남인 그는 아름다운 30대 초반의 여성들과 함께 있으면서 마냥 흐뭇하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이렇게 소개했다.
“이 여성들은 내 여자친구 겸 애인이에요. 나이는 어리지만 여기 A양이 나와 먼저 만났으니 선배인 셈인가? 우리가 5년 전에 처음 만났지? 그리고 3년 전에 만난 B양. 지금 미국에서 활동하는데 우리나라에도 자주 들러요. 그리고 여기는 내 친구 유인경씨!”
나를 친구라고 말하는 것도 당혹스러웠지만 ‘모두 나의 여자친구 겸 애인’이라고 소개하는데도 질투는커녕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는 두 여성의 반응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미국에서 산다는 B라는 여성은 내 표정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원래 선생님을 사모하고 있었는데 직접 만나고 나서 더욱 좋아졌어요. 굉장히 매력적이잖아요. 그런데 남녀 간의 섹시한 매력이 아니라 함께 있으면 대화가 통하고 관심사가 같아서 즐겁고 재미있는 관계예요. 서로 아끼고 위해주는 게 사랑이라면 저는 분명히 선생님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생님만이 아니라 선생님의 주변 사람들, 그게 애인이거나 섹스 파트너라고 해도 다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보다 먼저 선생님을 만난 A양에게도 질투를 느끼지 않아요. 굳이 선생님과의 관계를 규정해야 한다면 오빠와 애인의 중간이라고나 할까요. 오빠처럼 편안하고 푸근하지만 그렇다고 성적 긴장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애인처럼 열정에 들떠 있는 사이도 아니니까요.”

곁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독신남이 부연설명을 했다.
“인간관계에도 절제가 필요한 것 같아요. 내가 만약에 A나 B에게 마음을 과장되게 표현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했으면 지금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운 관계는 유지할 수 없었을 거예요. 손잡고 싶어도 조금 참고, 사랑한다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무심히 입을 다물고…. 그리고 애인과 여동생은 확실히 달라요. B양이 애인과 여동생의 중간이라고 한다면 A양은 확실한 애인이지요. A양을 만난 순간엔 갑자기 주변에 광채가 나고 우중충했던 서울 거리가 반짝반짝 빛나더라니까요. 너무 아찔한 반응에 저도 충격을 받았는데 그만큼 괴로운 순간도 많았죠. 이젠 뭐 애정도 우정으로 승화되었지만.”
평소에 친오빠들로부터 혹독한 스파르타 훈련과 체벌을 받아 ‘오빠’란 말에 애틋한 반응은커녕 치가 부들부들 떨리는 나는 피가 섞이지 않은 남자에게 한 번도 오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선만 70여 번 보고 중매로 결혼해 절절한 연애 스토리도 없는지라 ‘오빠와 애인 중간’이라는 관계가 어떤 상태인지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세련되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누굴 사랑하게 된다면, 나 혼자만 그를 알고 싶고 나 혼자만 사랑받기를 원하며 집착하게 되는 게 인지상정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말로 설명되거나 호칭으로 규정되는 관계’가 아닌 아름다운 사랑과 이해가 흐르는 자신들의 관계를 자랑스러워했다.
중요한 것은 ‘관계’가 아니라 그 관계를 이어가는 노력과 정성이 아닐까. 아무리 피를 나눈 부모자식 간이어도 제대로 애정을 갖고 키우지 못하면 패륜아가 나오기도 하고, 죽도록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도 죽도록 싫어서 헤어지고, 영원한 우정을 약속하던 친구도 뒤에서 비수를 들이대기도 하니 말이다.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을 베풀기
‘관계’는 운명적으로 혹은 우연히 만들어지거나 규정되지만 그걸 이어가려면 꽃과 나무를 가꿀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랑과 관심, 그리고 배려가 필요한 것 같다. 친하다는 이유로 더 무심하게 대하고, 막역한 사이라서 함부로 굴고, 서로에게 대접받기만 바라고 기대만 키우면서 아름다운 꽃밭을 처절하고 엉망진창인 전쟁터로 만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바쁜 엄마를 이해해주겠지’ 하며 방치했던 내 딸, ‘한가한 사람이 전화 좀 걸지’라며 먼저 연락하기만 기다렸던 친구, ‘다음에 만나면 잘해드려야지’ 하고 챙기지 않은 친지들의 각종 경조사까지 난 그동안 내 인간관계를 너무 삭막하게 만들었다.
‘친한가?’ ‘얼마만큼 아나?’ 등 잔머리를 굴리기 전에 내가 먼저 친근하게 굴고 내가 먼저 알려고 노력하고 내 진심과 사랑을 알려줘야겠다. 근데 나이 들어서 왕따 당하지 않고 풍요롭고 즐거운 노후를 즐기려면 관리하기 힘든 애인보다는 유쾌한 친구들을 많이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유인경씨는…
‘오빠와 애인 사이’ - 새로운 관계의 꽃밭
경향신문에서 발행하는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 편집위원. MBC 모닝쇼 ‘생방송 오늘 아침’에 출연하고 있다. 그의 홈페이지(www.soodasooda. com)에 가면 그의 다른 칼럼들을 읽어볼 수 있으며 진솔한 대화도 나눌 수 있다.


여성동아 2007년 2월 5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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