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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김세레나 파란만장 인생 첫 고백

“두번에 걸친 결혼과 이혼, 전직 대통령들과의 특별한 인연…”

기획·김명희 기자 / 글·김순희‘자유기고가’ / 사진·박해윤 기자

2006. 12. 22

올해로 데뷔 40주년을 맞는 가수 김세레나.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겪은 그가 그간의 파란만장했던 삶과 재벌 2세의 청혼을 거절했던 일화, 박정희, 전두환 등 전직 대통령들과의 각별한 인연을 털어놓았다.

가수 김세레나 파란만장 인생 첫 고백

김세레나(58)의 대표곡 ‘갑돌이와 갑순이’는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정겨움을 선사하고 ‘새타령’ ‘성주풀이’ 등은 세월이 흐를수록 곰삭은 맛이 난다. 65년 동아방송 가요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하면서 가요계 스타로 발돋움한 그는 올해로 데뷔 40주년을 맞는다.
열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혜성처럼 나타나 단숨에 가요계를 평정하며 톱스타 자리에 오른 그의 화려한 연예계 생활 이면에 녹아있는 삶은 그리 녹록지만은 않다. 두 번에 걸친 결혼과 이혼. 하지만 그의 ‘삶’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부모 반대 무릅쓰고 감행한 첫 번째 결혼, 상대는 열세 살 연상의 이혼남
“결혼을 안 한 줄 아는 사람이 많다고요? 일부러 감추진 않았어요. 몰래 결혼식을 하지도 않았고요. 다만 그땐 연예인이 결혼해도 언론에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요즘처럼 결혼한다고 기자회견하면서 끌어안고 뽀뽀하는 게 없었거든요.”
그는 스물한 살 때 첫 결혼을 했다. 그는 자신보다 열세 살 연상인 남자를 사랑하게 됐다고 한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남자였지만 사랑하는 데 있어 조건을 따지거나 계산을 하지 않았다는 것.
“제가 노래할 때 연주를 했던 밴드마스터였어요. 그때 그 사람 건강이 몹시 안 좋았어요. 당뇨를 앓았거든요. 당시에는 지방공연이다 뭐다 해서 저와 그 사람이 늘 붙어 다녔어요. 몸이 아파서 안쓰럽게 여겨졌고 그래서 동정을 했는데 그게 애정으로 변하더라고요. 전 어린 나이에 인기도 얻고 돈도 많이 벌고 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상태였지만 그 남자를 보호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결혼을 하기로 결심했어요.”
부모는 그의 결혼을 결사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그 사람에게 기울었고, 부모의 반대가 심할수록 오히려 그 남자에게 더 많은 애정을 쏟았다고 한다.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하니까 더 하고 싶은 거 있죠(웃음). 어른들이 아무리 말려도 제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어요.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강행했는데 살다보니 부모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어른들이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자신을 “적극적이고 정열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소개하는 김세레나는 “내가 선택한 사랑에 대해 최선을 다하면서 살고 싶었다”며 “끝까지 그 사랑을 지키지 못한 게 아들에게 못내 미안하다”고 고백한다.
“그 사람에게 건강을 되찾게 해주고 싶었어요. 음악을 하는 사람이니까 유명해지도록 뒷바라지해야겠다는 욕심도 있었고요. 나름대로 뒷바라지를 한다고 했는데 결국은 헛수고더라고요. 제가 나중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요. 술과 도박, 여자문제까지 끊이지 않았거든요.”
그는 결혼 5년여 만에 더 이상 남편 때문에 고통받고 살 수 없다고 판단해 이혼을 했다. 아들(35)은 그가 맡아 키우기로 했다.
“혼인신고를 하면서 그의 호적을 보니까 이혼한 경력이 있었어요. 저와 결혼 직전에 전처와 이혼을 했더군요. 전 그런 사실도 모르고 결혼을 했죠. 하지만 그 문제 때문에 다투거나 남편을 힘들게 하지는 않았어요. 단지 살면서 성격이 맞지 않은데다 제가 벌어온 돈을 탕진하고 일할 생각을 하지 않아서 많이 힘들었죠.”

가수 김세레나 파란만장 인생 첫 고백

74년 그와 이혼한 남편은 지난 91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한 차례 아픔을 겪은 그는 절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고.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살아요. 한국에선 살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처음 이혼을 한 후 절대로 결혼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인연이란 게 참 우습더라고요. 생각지도 않은 자리에서 두 번째 남편을 만나 사랑을 한거죠. 83년 재혼을 한 겁니다. 그 남자와 연애를 할 때 임신을 했는데 결혼식 다음 날 출산했다는 거 아닙니까(웃음).”
그는 두 번째 결혼을 하면서 “다시는 이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아들에게 상처를 안겨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두 번째 결혼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남편 역시 가진 게 없었어요. 살다보니 첫 번째 결혼과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더군요. 1년은 참고 살았는데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 그 다음 1년 동안 별거를 하다가 제가 이혼을 요구했어요.”
“다른 여성에 비해 모성본능이 강한 것 같다”는 그는 “미혼 시절에 재벌 2세로부터 프러포즈를 받았지만 돈 많은 남자는 관심 밖이었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당시 재계 10위 안에 드는 대기업의 장남이었어요. 성격은 다정다감했고 재벌가 아들답지 않게 순수한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사업도 의욕적으로 잘 펼쳤고 인물도 그만하면 잘생긴 편에 속했는데 단지 그 남자가 돈 많은 재벌가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마음을 주지 않았어요.”
그는 “돈 많은 남자를 싫어하는 이유를 콕 집어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높이 샀던 것 같다”고 말했다.

돈 많은 남자 매력 없어 재벌 2세의 청혼 거절
“당시 저는 재벌은 아니었지만 8년 연속 연예인 중 가장 많은 세금을 납부했으니까 돈에는 구애받지 않고 살았어요. 그래서 돈 있는 남자가 매력적으로 보이거나 좋은 조건의 남자라는 생각이 안 들었나봐요. 그 사람이 저를 만나기 위해 일본까지 쫓아와 사랑을 고백했는데 눈도 깜짝하지 않았어요. 보통 여자들이라면 눈이 확 돌아갈 정도의 조건을 갖춘 남자였는데 그에게는 마음이 가지 않더라고요.”
김세레나는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분’과는 허물없는 친구 사이로 지낸다고 한다.
“그분을 만나면 제가 농담을 하곤 해요. 그때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면 지금 이렇게 마주 앉아서 맘 편히 웃을 수 있겠냐고요. 지금은 아주 편한 친구가 됐어요. 그의 프러포즈는 거절했지만 그 회사에서 주최하는 각종 파티에는 참석했어요. 그 당시에는 외국에서 오는 바이어들을 접대하기 위한 파티가 회사마다 종종 열렸거든요.”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그는 정·재계에 팬이 많았는데 그의 열렬한 팬 중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도 있었다고 한다.
“데뷔한 지 2년째 되던 해였는데 무대에 서기 직전에 어떤 남자가 중요한 파티에 참석해야 하니까 그리 알고 준비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자리) 주차장에 도착했더니 검정색 승용차에 저를 태우더라고요. 장관들이 참석하는 파티라고 했어요. 잠시 후에 파티장에 도착해 보니까 테이블 양쪽으로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쭉 앉아 있더라고요. 테이블 정중앙에 저를 데리고 갔는데 그곳에 박정희 대통령이 앉아 있더라고요. 그 옆이 제 자리였어요.”

가수 김세레나 파란만장 인생 첫 고백

데뷔 40주년을 맞은 김세레나는 그동안 발매한 앨범재킷 사진과 기념촬영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아래 왼쪽 사진은 두 아들과 함께한 모습.


순간 긴장한 그는 박 대통령 앞에서 멈칫하며 “어머나”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그런 그를 보고 박 대통령이 빙그레 웃더라는 것.
“TV에서 볼 때와는 달리 인상이 차갑지 않았고 미소가 참 따뜻하게 느껴졌어요. 옆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가슴이 쿵쿵 뛰고 손에서는 땀이 나고…. 몹시 긴장을 했죠. 제가 노래를 몇 곡 부른 후 참석자들이 적당히 술에 취하자 각하가 직접 ‘갑돌이와 갑순이’를 불렀어요. 그 노래의 가사가 헷갈리기 쉬운데 1절부터 3절까지 가사 한줄 틀리지 않고 애잔하게 부르시더라고요. 그 순간이 지금도 잊히지가 않아요. 지금도 그때의 일이 마치 엊그제 있었던 일처럼 생각이 나곤 해요.”
박 전 대통령은 그에게 “우리나라 민요의 대중화에 앞장서줘서 고맙다”며 ‘국보’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그는 그 이후 청와대에서 열리는 국빈급 만찬에 자주 참석했고 박 대통령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것.
“대통령이 저의 열렬한 팬이라는 이유로 피해를 입은 적도 있어요. 어느 날 방송국에 갔더니 한 간부가 저를 불러 ‘미안하지만 상부의 지시 때문에 오늘부터 방송출연이 금지됐다’고 통보하더라고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격이었죠. 제가 대통령과 가깝게 지낸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조치가 내려졌나봐요.”



“갑작스레 방송출연이 금지됐을 때 자살 기도를 하기도 했죠”
그는 방송출연 금지조치가 내려지자 “가수 인생은 이것으로 끝났구나” 하고 몹시 낙담했다고 한다. 집에 돌아온 그는 순간 죽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혀 집 근처 약국을 돌아다니면서 수면제를 샀다고 한다.
“그 당시 방송출연 정지는 가수생활을 접으라는 것과 같은 거였어요. 미칠 것만 같았죠. 그래서 저도 모르게 몇 몇 약국에서 수면제를 사 모았고 죽어버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맨정신으로 먹을 수 없어 소주 한 병을 마시면서 수면제를 입안에 털어넣었어요. 제 기억은 거기서 끝인데 나중에 눈을 떠보니 병원이더군요. 위세척을 해서 겨우 살아났어요.”
수면제 사건 이틀 후. 그는 또 다른 고위관계자 K씨가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평소 안면이 있는 K씨에게 방송출연 정지 사실을 알렸고 그는 그 이튿날 아침부터 자유롭게 TV에 얼굴을 내밀 수 있게 됐다고 한다.
“K씨를 보자마자 막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분이 ‘왜 우느냐’고 묻기에 ‘이제 노래를 못하게 됐다’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그분이 걱정하지 말라면서 바로 비서를 부르더라고요. 그 후 곧바로 (방송출연) 정지가 풀렸어요.”
그에게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은 남다르다. 한번은 추운 겨울에 청와대 만찬에 참석했는데 날씨가 무척 추워 “아, 오늘은 날씨가 참 춥네요”라고 말을 했더니 박 대통령이 자신의 윗옷을 벗어서 건네줬다고 한다.
“괜찮다고 하는데도 ‘옷을 얇게 입어 추울 텐데 어여 입으라’고 하시더라고요.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이 많은 분이었어요. 언젠가는 박 대통령 앞에서 ‘김삿갓’ 노래를 부르면서 마지막 소절에 ‘떠나가는 김삿갓’ 대신 ‘떠나가는 박서방’이라고 가사를 바꿔서 불렀다가 곤욕을 치렀어요. 아랫사람들이 ‘어떻게 각하께 그럴 수 있느냐’고 난리가 난 거죠. 정작 각하는 즐거워서 웃으셨는데 말이죠.”
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베트남 전쟁 위문공연 때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분과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친분이 있었는데 젊은 시절 제 팬이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20대 초반에 부산에서 공연할 때 보고 반했다고(웃음)…. 대통령이 되기 직전 그분에게 제가 ‘하는 일이 잘되시기를 바란다’며 한반도 모양으로 된 목걸이를 선물한 적이 있어요. 그분이 ‘안 하던 목걸이를 하니까 세수할 때 걸리적거리고 잠잘 때 귀찮다’면서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는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면서 소녀처럼 웃었다. “대통령을 팬으로 둬서 어깨가 으쓱해진 적이 있다”고.
“노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기 전에 가족과 친지를 위한 파티에 저를 초대했어요. 그날 노 대통령의 딸인 소영양이 저를 보자마자 아버지께서 ‘내가 좋아하는 가수 김세레나가 온다’면서 아침부터 싱글벙글 웃고 계신다고 일러주더라고요.”
톱스타였기에 행복했지만 그 대신 굴곡진 인생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 그는 요즘도 TV뿐 아니라 각종 디너쇼를 통해 팬들과 ‘교감’을 나눈다.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23)과 서울 방배동의 빌라에서 단둘이 사는 그는 “나이가 들수록 지난날을 편히 뒤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 좋지만 마음은 아직도 열아홉 살 같다”면서 밝은 웃음을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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