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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Art & Culture

불우 어린이 돕기 도예전 연 70년대 코미디 스타 권귀옥

글·송화선 기자 / 사진·지호영 기자

2006. 12. 19

7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코미디언 권귀옥이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코미디 쇼가 아니라 도예전을 통해서다. 불우 어린이 돕기 기금 마련을 위해 그동안 애써 제작한 작품들을 내놓은 권귀옥을 만났다.

불우 어린이 돕기 도예전 연 70년대 코미디 스타 권귀옥

불우 어린이 돕기 도예전 연 70년대 코미디 스타 권귀옥

‘인생은 가시밭길’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도판 ‘가시밭길’. (왼쪽) 삼백토로 만든 도예 작품 ‘노숙자 L씨’.(오른쪽)


70년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늘씬한 미스 권과 땅딸이 이기동’이라는 만담 코미디로 큰 인기를 모았던 코미디언 권귀옥(57)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그는 화려한 미모와 발랄한 말솜씨를 무기로 스타덤에 올랐다. 그러나 지난 81년 결혼과 동시에 미국으로 떠나며 방송활동을 중단, 한동안 브라운관에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2002년 이후 종종 아침 드라마를 통해 얼굴을 비쳐온 그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곳은 서울 정동 경향갤러리. 10월26일부터 31일까지 이어진 ‘권귀옥의 흙장난’ 전시회장이었다. 7년 전부터 도예작업을 해온 권귀옥이 직접 만든 도자기 작품을 선보이고, 수익금을 모아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연 전시회다.
“‘작품 전시회’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그냥 제가 해온 ‘흙장난’을 여러분 앞에 보여드리는 자리라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이름도 ‘권귀옥의 흙장난’이라고 붙였죠. 누구한테 제대로 배운 적도 없이 혼자 만지작만지작 만들어낸 것이거든요. 그런데 보신 분들이 ‘그냥 두기는 아깝지 않냐’며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좋은 일에 쓰자’고 이 자리를 만들어주셨어요.”
명쾌하고 씩씩한 말솜씨는 ‘왈가닥 루씨’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왕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곤드레만드레씨와 그 부인’ ‘노숙자 L씨’ 등 해학 넘치는 인물상과 ‘가시밭길’ ‘청계천’ 등의 도판, 다양한 지점토 공예품 등 전시작품 50여 점 속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철없고 거침없는 아가씨가 아니었다. 물레를 사용하지 않고 일일이 손으로 빚어낸 그의 작품에서는 투박하지만 진솔한 삶의 향기가 물씬 풍겼기 때문이다.
“‘잘나가던’ 시절엔 MBC 최우수 연기상을 4년 연속으로 받을 만큼 인기가 높았어요. 일주일에 열 시간 이상 제 모습이 TV에 나왔죠.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 달리 속으로는 이런저런 갈등이 많았습니다. 제가 실은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거든요. 생각도 많고요. 늘 사람들 앞에서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우울증을 앓았죠. 지금도 그때 저를 본 분들은 ‘대기실에서는 조용히 혼자 앉아 수를 놓다가 녹화만 들어가면 깔깔대며 웃던 사람’으로 기억해요. ‘흙장난’을 시작한 것도 그런 제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방법이었죠.”

불우 어린이 돕기 도예전 연 70년대 코미디 스타 권귀옥

불우 어린이 돕기 도예전을 연 권귀옥과 그의 작품 ‘나무에 올라’ ‘부부는 닮아가고’‘목욕탕의 아줌마들’.(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우울증 이기기 위해 시작한 ‘흙장난’으로 어려운 이 도울 수 있어 행복해요”
어릴 때부터 남달리 손재주가 좋아서 연필 조각이나 만화 그리기 등으로 친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는 권귀옥은 방송을 떠나 있는 동안 꽃꽂이, 붓글씨, 제과제빵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다고 한다. 흙과 인연을 맺게 된 건 80년대 초 종이흙공예(지점토)를 배우면서부터였다고. 종이흙의 매력에 흠뻑 빠져 일본을 오가며 배운 끝에 전문 강사 자격증을 땄고, 종이흙공예 입문 서적도 펴냈다고 한다.
“그러다 자연스레 관심이 도자기로 이어졌어요. 사실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 도예작업을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15kg짜리 흙을 사오는 것부터 불에 굽는 것까지 모든 일을 직접 하다보니, 흙을 번쩍 들어 올리고, 반죽하고, 제작해나가는 모든 과정이 가시밭길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죠. 하지만 힘들기 때문에 또 그만큼 보람이 커요. 처음엔 하찮은 흙이던 것이 조금씩 변화되다 결국 제 머릿속에서 꿈꾸던 모양으로 완성되는 걸 보면 참 뿌듯해요.”
그렇게 스스로를 닦고 우울증을 다스리기 위해 시작한 도예작업을 대중 앞에 내보이게 된 건 그가 90년대 후반부터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수양부모협회 위탁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서라고 한다. 수양부모협회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부모가 키우지 못해 위탁을 의뢰한 아이들을 돌봐주는 기관. IMF 경제위기가 닥친 97년, 당시 영국대사관 공보관으로 있던 박영숙 현 유엔미래포럼 한국대표가 만든 단체다.
박 대표와 친분이 있던 권귀옥은 자연스레 이 모임에 참여하게 됐고 그때부터 매주 토요일 아이들이 잠시 머무는 쉼터에 나가 빨래, 배식 등을 하며 이들을 돌보고 있다고 한다. 그는 수양부모협회 홍보대사이며, 동료 연예인을 모아 직접 만든 연예인자원봉사자클럽 회장이기도 하다.
“결혼 뒤 미국에서 사는 동안 그 나라의 사회복지제도를 보며 큰 감동을 받았어요. 우리나라에 돌아오고 보니 참 많은 사람이 꼭 필요한 도움을 받지 못한 채 고통받고 있더라고요. 저라도 나서서 이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에 시작한 일이죠.”
부잣집 막내딸로 태어나 부러울 것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젊은 나이에 화려한 스타가 됐기 때문에 미처 알지 못하던 세상의 어두운 면을 나이가 든 뒤에야 알게 됐다고 말하는 그는 “서로 조금씩만 돕는다면 세상이 훨씬 더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월 그는 한 일간지에 ‘아름다운 거름’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한 적이 있다. 그는 그 글에서 스스로를 ‘낙엽’이라고 부르며 “낙엽이 곰삭아야 좋은 퇴비가 되고 퇴비를 든든히 줘야 새봄에 또 아름다운 나무와 꽃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아름다운 퇴비가 되고 싶다”고 말했었다.
곧 드라마 등을 통해 다시 연예활동을 시작할 계획이라는 권귀옥은 “바빠진다 해도 봉사활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권귀옥의 따뜻한 웃음을 브라운관을 통해서도 어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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