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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딛고…

‘백치애인’ 작가 신달자 인생 고백

글·송화선 기자 / 사진·박해윤 기자

입력 2006.11.23 14:56:00

감수성 짙은 시와 따뜻한 에세이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온 문인 신달자. 그가 오랜 시간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지나온 삶의 얘기와 어머니와의 추억에 대해 들려줬다. 아직도 외로운 날이면 어머니를 떠올리며 힘을 얻는다는 신달자의 지나온 삶 이야기.
‘백치애인’ 작가 신달자 인생 고백

신달자 시인(64)을 만났을 때 처음 떠오른 형용사는 ‘곱다’였다. 이순(耳順)을 넘긴 나이지만, 푸른색 코트에 긴 목도리를 두른 그는 가을 풍경과 어우러져 한눈에도 멋스러워보였다. 프로필을 통해 드러나는 그의 삶도 이런 첫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64년 22세의 나이에 월간 ‘여상’ 신인여류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그는 수필집 ‘백치애인’,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등 여러 베스트셀러를 써낸 작가이면서, 동시에 숙명여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푸른빛 코트처럼 그의 삶은 화사하게 빛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제가 가장 빛날 때, 어머니가 제 모습을 보고 기뻐하실 수 있을 때 지나온 삶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지금의 제가 있는 건 다 어머니 덕분이니까요.”
그게 시작이었다. 최근 산문집 ‘너는 이 세 가지를 명심하라’를 내며 어머니와의 추억을 풀어놓은 신달자는 때로는 눈물짓고, 때로는 소녀처럼 웃으며, 오랜 시간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지난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남6녀의 다섯째 딸인 신달자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고향 경남 거창을 떠난 적 없는 시골 소녀였다고 한다. 그런데 “딸도 제대로 공부하려면 도회지로 보내야 한다”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고등학교 2학년 되던 해 5월 혼자 부산으로 유학을 떠나게 됐다고.
“그날 아침 막 집을 나서려는데 어머니가 절 불러 세웠어요. ‘달짜야, 니 내 말 잘 듣거래이. 내가 니를 도회지로 보내는 진짜 이유가 있능기라. 내가 글을 알믄 쓰겠지만 글을 모릉께 말로 하니 절대로 잊으믄 안 된대이. 첫째, 니는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해라. 니가 알아야 사람들이 니를 알아주는 기라. 둘째는, 내가 살아봉께 여자도 돈이 있어야 하더라. 니는 돈도 벌어라. 셋째는, 그래도 여자니께 행복한 가정을 가져야 된대이. 아무리 날고 뛰는 여자래도 가정이 불행하믄 너무 외롭고 남이 얕보능 기라. 이 세 가지 명심하거래이. 니는 꼭 할 수 있을 끼다’. 어머니가 왜 저를 부산까지 홀로 떠나보내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한꺼번에 다 말씀해주신 거였어요. 생각해보니 그 세 가지는 다 어머니가 평생 꿈꿨지만 결코 이루지 못한 소원이었죠. 어머니는 당신의 꿈을 대신 이뤄줄 딸로 저를 선택하셨던 거예요.”
신달자는 그해 가을, 학교 대표로 나간 경남 백일장에서 1등을 차지하며 어머니의 꿈에 날개를 달아드렸다고 한다. 숙명여대 국문과에 진학하고, 대학 졸업도 하기 전 등단까지 했을 때 어머니는 곧 자신의 꿈이 이뤄지기라도 할 듯 기뻐했다고. 그의 대학 졸업식 때 어머니가 건넨 선물은 한글로 삐뚤삐뚤 쓴 쪽지 한 장이었다고 한다. 신달자가 대학 공부를 하는 동안 어머니는 오직 그 선물을 위해 한글을 배운 것이다. ‘달자 보아라’로 시작되는 쪽지에는 ‘1.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해라/ 2. 돈도 벌어라/ 3. 행복한 여자가 되거라/ 니 에미가’라는 딱 네 줄이 쓰여 있었다.
“대학 졸업 뒤 취직을 하는 대신 국문과 조교로 들어갔어요. 공부를 계속하며 글 쓰는 사람으로 성공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꿈을 이뤄드리고 싶었거든요. 어머니는 제가 조교가 됐다는 말씀을 듣고는 ‘조교가 됐다는 건 석사도 박사도 될 수 있다는 것’이라며 기뻐하셨죠.”
그가 한 달 용돈으로 쓰기에도 부족한 조교 월급을 받고 투덜대자 어머니는 “하루에 두 끼만 묵어라. 그래도 모자라믄 하루에 한 끼만 묵어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열여섯 살 연상 유부남 교수와의 결혼, 고된 삶에도 딸에 대한 기대 버리지 않은 어머니
‘백치애인’ 작가 신달자 인생 고백

하지만 조교 생활 2년 만에 신달자는 어머니의 가슴에 ‘총을 쏘았다’. 그의 가슴을 무너뜨린 것이다.
“불행한 연애에 빠졌거든요. 상대는 저보다 열여섯 살 많은 같은 대학 교수였죠. 이미 가정이 있는 남자였고요.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새벽에 혼자 한강을 가기도 하고, 연탄을 피워 방에 들여놓기도 하고…. 하지만 죽을 수가 없었어요. 절 당신 희망의 대리인으로 여기는 어머니에게 자살로 보답할 수는 없잖아요. 자살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 그 생각을 했죠.”
죽을 수도, 그 남자를 포기할 수도 없던 신달자는 결국 어머니를 찾아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혹독하게 춥던 겨울날, 어머니는 “엄마, 나 결혼할래”라고 말하는 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고.
“그러고는 저를 질질 끌듯 데리고 우물가로 나가셨어요. 눈을 감은 채 하나하나 옷을 벗더니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올려 머리 위부터 부어내리시데요. 전 꼼짝 못하고 어머니를 쳐다보고만 있었죠. 온몸이 얼어붙는 추위 속에서 얼어 터져버릴 것 같은 손을 치켜들고 자신의 몸을 때리시는데, 금세 어머니의 몸에 핏물이 흘러내렸어요. 전 그 모습을 다 지켜보고도 그 남자에게 갔죠.”
참혹한 배신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그러케 좋나.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할라꼬 카는데, 이제 뭐가 좀 될라 카는데, 뭐! 결혼?”이라고 울부짖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걸어간 길은 곧게 뻗은 비단길이 아니었다고 한다. 사랑의 환상은 이내 무너졌고, 고단한 현실만 눈앞에 놓여 있었다고.
신달자는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남편은 권위적인 사람”이라고 고백하며 갓 결혼했을 때의 일화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이들 부부는 새로 집을 지어 살림을 차렸는데, 그 무렵엔 현관부터 대문까지 회양목을 심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신달자도 새 집에 멋을 내고 싶어 인부를 불러 회양목을 심게 했다고. 그런데 거의 다 심어갈 때쯤 퇴근한 남편은 나무를 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모두 뽑아버리고 혼자 집으로 들어가버렸다는 것이다. 신달자는 “차라리 ‘왜 이런 쓸 데 없는 짓을 하고 있어’라든가 ‘나와 상의도 없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거야’라고 했다면 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얼마나 아내를 무시했으면 말 한마디 없이 그럴 수 있었을까. 인부들은 한심한 듯 나를 쳐다보더니 가버렸고,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일은 내 가슴에 한으로 남아있다”고 말했었다.
그 사건 이후 신달자는 남편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바보같이’ 살았다고 한다. 남편과의 ‘스캔들’로 학교도 그만두고, 촉망받던 문재(文才)도 묻어둬야만 했던 그에게 하루하루의 삶은 신산하기만 했다고.
“자존심 때문이었을까요? 제 인생 모두를 걸었던 선택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뒤에도 물릴 수가 없었어요. 그 사이에 큰아이가 태어났고, 바로 다음 해 둘째를 또 갖게 됐죠. 제 불행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인데 이 아이를 낳아도 될까 확신할 수 없었어요. 죄가 되는 일인 줄 알면서도 작은아이를 지우기 위해 혼자 산부인과를 찾아나섰죠. 그런데 병원에 도착하기 전 종로 거리에서 우연히 박목월 선생님을 만났어요.”
대학 시절 신달자의 문학적 재능을 아끼던 시인 박목월은 그를 보더니 “이 근처에 약속이 있어 왔는데 30분쯤 시간이 남는다. 같이 차라도 한 잔 하자”며 근처 찻집으로 이끌었다고 한다.
“제 초라한 행색이 부끄러웠죠. 누구든 저를 보면 불행하다는 걸 눈치챌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선생님은 아무 말씀 없이 ‘신군, 요즘에도 시를 쓰나’ 하고만 물으시더군요.”
박목월은 그에게 매주 일요일 자신의 집으로 찾아와 다시 시 공부를 시작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벼랑 끝에 있던 신달자에게 그 제안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의 집을 찾아간 첫날 박목월은 공들여 써간 원고를 눈앞에서 내던지며 모욕을 줬다고. 다음 번에도, 또 다음 번에도, 박목월은 “이런 글 가져올 바에는 차라리 오지 말라”고 모진 말을 했다고 한다.

‘백치애인’ 작가 신달자 인생 고백

“일곱 번째 찾아간 날 비로소 제 글을 찬찬히 읽어주시더니, ‘자네 그동안 욕봤네’ 하셨어요. 제가 정말 시를 쓸 생각이 있나 시험해보신 거였다고요. 그때부터 정식으로 시를 배웠죠.”
그러나 문학을 다시 시작했다고 해서 그의 삶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여전했고, 가정의 불행도 그의 발목을 잡았다. 신달자가 어머니를 다시 만난 건 초라하고 작은 병원에서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때라고. 그가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병원으로 찾아온 것이다.
“어머니는 저를 보자마자 미역국은 먹었는지, 몸은 괜찮은지 묻지도 않고 ‘니 그 세 가지는 잊지 않았제’ 하고 말을 거셨어요. 세 가지는커녕 한 가지도 이루지 못할 모습인 걸 뻔히 보시고도 그 꿈을 버리지 못하는 어머니가 원망스러워 ‘나가! 빨리 나가!’ 하고 패악을 부렸죠. 어머니의 존재가 끔찍했어요.”
그러나 어머니의 집념은 꺾이지 않았다고 한다. 신달자가 72년 박목월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재등단한 뒤 이듬해 첫 시집을 펴내자 출판기념회에 찾아온 것이다.
“인생의 잇지 못할 날일세. 엄마에 깁뿜이다.”
방명록에 삐뚤삐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은 어머니는 그날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신달자에게 전화를 걸어 “일은 잘되어가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언니들에게 “달자가 박사만 되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하며, 그가 대학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려주기만 손꼽아 기다렸다고.

극한의 고통에서 나를 살린 어머니의 목소리
하지만 일은 잘돼가지 않았다. 결혼생활 9년째인 77년, 그의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진 것이다. 남편은 의식을 잃은 채 23일간 중환자실에 머물렀고, 어머니는 “뭔가 되리라 믿었던 딸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해보이는 모습으로 중환자실 초라한 사람들 속에 끼어있는 모습”을 보고는 그 딸에게 걸었던 기대를 모두 접어버렸다고 한다. “이제는 틀렸다”며 집으로 돌아간 어머니는 그날로부터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어머니의 죽음을 맞았을 때 전 곧 따라 죽을 것처럼 괴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저 하나만 믿고 사는 어머니께 더 이상 고통과 실망을 안겨드리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생각 때문이었는지, 그때부터 제 삶은 더 지독하게 힘들어졌죠.”
중환자실에서 깨어난 남편은 그때부터 24년간 투병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 불편한 몸 못지않게 그를 괴롭힌 건 마음의 병이었다고. 자신의 몸이 불편해진 것을 견디지 못한 남편이 정신병원에 가야 할 만큼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피폐해져갔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시어머니까지 앓아누웠다고 한다. 집안에서 실수로 넘어진 것이 고관절 골절로 이어져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여든한 살에 넘어진 시어머니는 그 상태로 9년을 사셨어요. 무척 깔끔한 분이셔서 누운 채로도 어떻게든 며느리를 덜 힘들게 하려고 애쓰셨지만,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죠. 어머니에게도, 제게도 정말 힘든 시간이었어요.”
집안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환자를 둘이나 두고서 그는 생계를 위해 거리로 나가야 했다고 한다. 모직천을 파는 보따리 장사가 돼 아는 얼굴들을 찾아다니며 하나만 팔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루하루 병원비를 메우고 아이들 등록금을 대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그만 쓰러져 의식을 잃었어요. 의식이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은 느낌 속에서 막연히 ‘내가 죽어가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죠. 희미하게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어디선가 어머니의 소리가 들려오는 거예요. ‘얘야, 일어나라, 달짜야. 일어나라, 일어나야 한다’. 분명히 어머니 목소리였죠. ‘우리 엄마 참 못 말린다. 죽어서도 나한테 온 거야’ 하는 순간, 의식이 돌아왔고, 전 다시 일어났어요. 제가 어머니의 목소리를 느낀 게 아니라, 그건 분명히 어머니였어요.”
신달자는 다음 날 바로 동대문 헌책방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헌 책을 사들여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서른여덟 살의 나이로, 두 명의 환자와 세 명의 아이를 먹여 살리며 대학원에 입학한 것이다. 그는 마흔에 석사가 됐고, 쉰에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인생의 고비를 넘을 때마다 묘를 찾아가 어머니께 얘기했죠. ‘엄마, 나 대학원 들어갔어’ ‘엄마, 나 대학강사 됐다’ ‘엄마, 내가 교수야, 교수’. ‘백치애인’이 80만 부, ‘물 위를 걷는 여자’가 1백20만 부 팔려나가며 돈을 번 뒤엔 10만원권 수표 석 장을 어머니 무덤에 묻어드렸어요. 단 한 번도 어머니께 제가 번 돈을 쥐어드리지 못한 게 한으로 남았거든요.”
그는 이제 어머니가 당부했던 세 가지 부탁을 다 이룬 걸까. 그는 ‘그렇다’고 말했다. “어떤 구차한 현실이라도 버리지 않고 껴안으면 행복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딸 때문에 죽어도 죽지 못했을 어머니가 이제는 편히 눈을 감으셨을 것 같다”고 말하는 그는, 하지만 정작 자신은 어머니를 떠나보내지 못하겠다고 고백했다. 힘들고 외로울 때면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엄마’를 부르며 눈물 흘린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제가 이런저런 고민들로 잠을 이루지 못한 날이면 꼭 다음날 이른 아침 어머니께 전화가 왔어요. ‘좀 잤니?’ 하고 안타깝게 물으셨죠. 그럼 저는 어머니께 ‘이제 막 잠들려는데 왜 전화야?’ 하고 소리 지르며 전화를 끊어버렸고요. 그런데도 늘 저를 걱정하시던 어머니는 저만 보면 잠 좀 자라고 애원하셨죠. 꿈도 꾸지 말고 자라고, 푹 자라고. 지금도 괴로운 날엔 그 목소리가 그리워요. 혼자 자동차 핸들에 얼굴을 묻고 ‘엄마, 힘들어’ 고백하며 눈물을 흘리죠.”
그는 지금도 이처럼 든든한 힘이 돼주는 어머니께 할 수 있는 최선의 효도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신달자가 저렇게 사는 것을 보면 어머니가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나 보다”라고 생각하도록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된 삶을 겪어왔으면서도 그가 지금처럼 온화하고 따뜻한 모습을 지켜갈 수 있었던 건, 늘 이런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인터뷰 도중 간간이 눈시울을 붉히던 그는 어머니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묻자 환한 웃음을 지었다.
“거기서도 이웃 사귀셨으면, 잔치 한 번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우리 딸이 ‘신달자’라고, 그 아이가 박사도 되고 교수도 되고 책도 많이 썼다고 그렇게 자랑하시라고요. 어머니가 그곳에서 덩실덩실 웃으며 춤을 추면, 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것 같아요.”

여성동아 2006년 11월 5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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