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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라노 조수미

“세계무대 데뷔 20년, 여전히 타오르는 열정과 꿈”

글·이남희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크레디아 제공

입력 2006.10.19 09:21:00

소프라노 조수미가 국제무대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최근 전국 10개 도시에서 기념 공연을 가진 그가 들려준 감회, 올봄 세상을 뜬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10년 뒤의 꿈….
소프라노 조수미

‘신이 내린 목소리’ ‘1백 년에 한두 명 나올까 말까 한 성악가’…. 세계 무대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소프라노 조수미(44)에게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작은 체구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그는 화려한 음색과 고난도의 기교로 세계의 청중을 사로잡았다.
한국의 ‘문화 대사’로 활약 중인 조수미가 어느덧 국제무대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86년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극장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여주인공 ‘질다’ 역을 맡아 공연한 지 꼭 20년이 되는 해인 것. 그는 “세계 무대에 발을 들여놓은 지 20년이 흘렀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음악에 대한 열정만은 변하지 않았다”고 감회를 털어놓았다.
“지난 20년간 잊히지 않는 일이 정말 많아서 일일이 꼽을 수도 없어요. 세계적인 지휘자 카라얀과 만난 것도 그렇고, 플라시도 도밍고처럼 뛰어난 성악가와 한무대에서 듀엣을 한 것도 기억에 남아요. 몇 년 전 북한에 방문해 북한 가수들과 한무대에서 눈물 흘리며 함께 노래 부른 것도,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목이 터져라 응원하면서 ‘챔피언스’라는 노래를 불렀던 것도 생각납니다.”
그는 이번 방문에서 비단 아름다운 노래를 선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술교육가로서의 면모를 발휘했다. 국제무대 데뷔 2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지난 8월 말 중·고교 음악교사 5백여 명을 초청해 그들의 노고에 감사하고 음악을 아름답게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카데미 콘서트’를 마련한 것.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에 관심이 남다른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이에게 오페라나 음악회를 접할 기회를 많이 줌으로써 사회의 문화적 수준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해외 청소년에 비해 입시 스트레스가 큰 한국 청소년들에게 위안과 휴식을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고 즐기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바로 어머니잖아요. 한국의 현명한 여성들이 어린 자녀를 자주 음악공연장에 데려가고, 좋은 음악을 골라 들려줬으면 해요.”
2006년은 그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데뷔 20주년의 기쁨을 누렸지만, 동시에 인생의 가장 큰 버팀목이었던 아버지를 떠나보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초 부친의 장례식날, 그는 프랑스 파리 샤틀레 극장 무대에 섰다. “절대로 팬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공연을 강행한 것. 그는 이날 공연을 생애에서 가장 힘든 순간으로 기억했다.

소프라노 조수미

이탈리아 자택에서 애견을 안고 있는 소프라노 조수미. 그의 동물 사랑은 남다르다.


“웃으며 화려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제 모습을 보고 1천5백 명의 관객들은 제 슬픔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거예요. 네 번째 앙코르를 받고 저는 ‘지금 서울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 앞에서 노래하는 것이 옳은지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도 제 노래를 잘 듣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라고 말한 뒤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를 불렀어요. 노래가 끝나자 관객들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기립박수를 보내주었죠. 이날 공연 실황을 담은 DVD가 9월 말 나오는데 타이틀 제목이 ‘To My Father’입니다. 자식으로서는 불효자이지만, 음악가로서는 아버지께 드릴 선물이 있어 그나마 위안을 삼습니다.”
위대한 예술가 뒤에는 훌륭한 부모가 있는 법. 그는 딸의 재능을 맘껏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한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도 드러냈다.
“아버지는 특별한 분이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제게 영어와 불어를 가르쳤고, 비행기 값조차 구하기 힘든 여건에서도 제가 유학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니까요. ‘만인의 사랑을 받는 음악가’라는 이유로 저는 부모님의 생신 한 번 못 챙기고 동생의 결혼식조차 가보지 못했습니다. 지금껏 희생을 감수한 가족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10년 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아티스트로 선정됐다는 축하인사 듣고 싶어
자신감 넘치는 그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솔직함이다. 그는 “20여 년 전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난 직접적인 이유는 다니던 서울대 음대에서 꼴찌인 54등을 했기 때문”이라고 진솔하게 고백했다. 유학을 떠날 때만 해도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면 평범하게 살겠다’고 생각했던 그는 한 일본인 유학생 때문에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제가 세상에서 노래를 가장 잘한다고 생각했고, 이탈리아 유학시절에도 선생님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발음과 액팅이 뛰어나고, 고음도 잘나온다’는 찬사만 들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한 일본인 여학생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 질투와 시기라는 게 뭔지 깨닫게 됐어요. 이후 더욱 연습에 매진했고, 일본인 친구와는 ‘아시아인으로서 세계적인 성악가로 이름을 떨치자’고 약속했죠. 그때의 약속을 지키게 돼 기뻐요.”
9월 한 달간 전국 10개 도시에서 공연을 가진 그는 지역의 특색에 맞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고집하기보다는 관중들의 취향을 파악해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기 때문. 오페라 아리아부터 팝음악, 가요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그가 실제로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는 무엇일까.
“저는 남들이 쉽게 따라할 수 없는 것에 도전해 음악적 기량을 시험해보는 것을 즐겨요. 소프라노로서 가장 고난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아리아 ‘밤의 여왕’(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 중)은 제게 가장 큰 도전이었죠. 나태해질 때 ‘밤의 여왕’을 떠올리면, 자다가도 소름이 끼쳐 벌떡 일어나 자신을 다잡아요. ‘내일 당장 목소리가 안 나와서 그 노래를 못 부르면 어쩌나’ 하고 고민이 되거든요. 그냥 흥얼거리는 노래는 드라마 ‘명성황후’ 삽입곡 ‘나 가거든’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노래라고 생각해요.”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그도 한사코 자신을 “여리고 평범한 여자”라고 표현한다. 다만 특별한 점이 있다면, ‘하느님이 주신 아름다운 목소리’와 ‘따뜻한 마음’을 지녔을 뿐이라는 것. “평범한 여성으로서 결혼을 꿈꾸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 나이에도 결혼을 하지 않고 집시처럼 세계를 떠도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운명이 아니겠느냐”고 답했다.
20년 넘게 외국 생활을 해왔지만 그의 국적은 여전히 한국인이다.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활활 타오르고 있다”고 말한다.
“데뷔 초기, 유럽에서 한국은 생소한 나라였습니다. 당시 공항 입국심사대에서 걸릴 때마다 저는 ‘내가 강해지면 조국도 강해진다’며 힘껏 노래하리라 마음먹었어요. 많은 아티스트들이 국적을 바꾸고 편하게 세계 투어에 임했지만, 저는 항상 자랑스럽게 대한민국 여권을 내밀었죠. 한국의 국력이 커지고 많은 한국 아티스트들이 해외에서 성공을 거둘 때마다 얼마나 뿌듯했는지 몰라요. 지금도 조국의 부름이 있으면, 개인적인 스케줄은 모두 미루고 한국으로 달려옵니다.”
전 세계에 한국 예술의 성가를 드높인 소프라노 조수미는 지금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더 성장해야 하고 더 원숙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며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있다. 그는 10년 뒤 데뷔 30주년의 소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티스트로 선정된 것을 축하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그런 예술가에게 주는 상이 생겼으면 좋겠고, 만약 생긴다면 그 상을 받고 감사인사를 할 수 있는 데뷔 30주년이 됐으면 합니다.”

여성동아 2006년 10월 5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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