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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연애소동 통해 권태기를 극복하는 여배우의 이야기 ‘빙 줄리아’

글·김동희 기자 / 사진제공·아이비전엔터테인먼트, 무비스트

입력 2006.10.18 15:32:00

193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서머싯 몸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 연극계의 디바 줄리아가 연애소동을 통해 권태기를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되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줄리아 역 아네트 베닝의 연기가 압권이다.
한바탕 연애소동 통해 권태기를 극복하는 여배우의 이야기 ‘빙 줄리아’

묘한 동반관계를 유지하는 줄리아와 남편 마이클.(가운데)


1930년대 영국, 연극계의 디바로 군림하며 절정의 인기를 누리는 여배우가 있다. 그의 이름은 줄리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력으로 관중의 갈채를 이끌어낸 다음 날 줄리아는 제작자인 남편 앞에서 발을 구르며 더 이상 못하겠다고, 지쳤다고 쏘아붙인다. 남편 마이클은 지금 연극을 중단하면 큰돈을 날리게 될 거라고 그를 달랜다. 줄리아도 쇼를 계속해야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스타들이 누구나 그렇듯 줄리아도 처음부터 디바는 아니었다. 줄리아의 재능을 알아보고 지금의 그를 만들어낸 연극 스승은 지미 랭턴. 랭턴은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가르침은 줄리아에게 남아, 삶의 순간순간에 끼어들어 충고를 해주고 갈채를 보내기도 한다.
랭턴이 줄리아를 처음 본 순간 한 말은 그녀의 운명에 대한 예언이자 삶의 지침서가 된다.
“넌 겨우 스무 살짜리 신인이지만 천재야. 아직 자신의 매력을 활용할 줄 모를 뿐. 목에 힘을 주고 외쳐 봐. ‘이것들아, 나한테 집중해’라고. 무대에 오를 땐 극장만이 유일한 현실이라는 것을 잊지 마. 극장 밖에 있는 모든 것, 소위 현실 세계란 것은 허상에 불과해.”
줄리아는 그 충고를 무대에 한정시키지 않는다. 그에겐 삶 전체가 무대가 된다. 그는 남편에게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다가도 고양이처럼 가릉거리는 애교를 잊지 않는다. 플라토닉한 애정을 나누는 사이인 백작이 주위의 이목을 핑계로 헤어지자는 말을 꺼낼 때마다 “당신을 잃을 수 없어요.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데…”라는 진부한 대사를 아름답게 연기하며 눈물 두 방울로 입을 막는다.


중년 여배우의 코믹한 연애담 속에 담긴 삶에 대한 성찰
아름답고 매혹적인 디바로 군림해온 그지만 인생의 권태기에는 장사가 없다. 뭔가 자극이 되는 일이 생기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에 답하듯 말끔한 용모의 소유자인 젊은 남자 톰이 그녀의 인생으로 들어온다. 아들 로저 또래인 톰과의 연애를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얻은 듯한 줄리아. 톰은 차츰 속물적인 계산속을 드러낸다. 줄리아의 돈을 쓰고, 다른 젊은 여배우에게 한눈을 판다. 줄리아는 투정부리고, 화내고, 애원하며 자신의 연기력을 총동원하지만 상황을 되돌릴 수 없다. 톰은 뻔뻔하게 내연의 여배우를 줄리아의 새 연극에 넣어달라고 부탁하고, 아들은 남편과 자식에게까지 연기하는 엄마의 가식이 싫다고 말한다. 설상가상, 톰과 사귀는 여배우가 줄리아의 남편과도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영화는 삼류 치정극으로 흐를 것처럼 보인다. 부와 젊음을 맞교환하는 대등한 관계에서 애정의 추가 기울고 나이든 쪽이 눈물을 흘리며 패자가 되는. 하지만 줄리아가 누군가. 디바의 지위는 거저 얻어지지 않는 것. 몸매 유지를 위해 그 좋아하는 맥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자신을 관리해온 독하고 당찬 그의 통쾌한 반격이 시작된다.
영화 ’피아니스트’로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한 극본가 로널드 하워드는 서머싯 몸의 소설 ’극장(Theater)’을 시나리오로 옮기며 여주인공 줄리아에게 생명력과 깊이를 더했다. 중년의 권태를 짜릿한 연애로 돌파하려는 줄리아의 행각이 익살스럽게 그려지지만 그가 비웃음의 대상은 아니다. 겉보기와 달리 냉철한 시선을 잃지 않고 삶의 매순간에 충실하게 살아온 그에 대한 찬사가 담겨있다.

한바탕 연애소동 통해 권태기를 극복하는 여배우의 이야기 ‘빙 줄리아’

1 권태감에 시달리던 줄리아는 아들뻘인 남자와의 연애를 통해 활력을 되찾는다.2 1930년대 영국 연극계의 디바로 군림하는 줄리아.3 줄리아의 애인 톰은 다른 젊은 여배우에게 눈을 돌린다.


각본도 훌륭하지만 줄리아라는 여주인공의 매력을 완성시킨 건 배우 아네트 베닝. 나이를 먹고 주름살이 늘수록 더 빛을 발하는 드문 연기자다. 할리우드의 소문난 바람둥이 워렌 비티와 결혼하며 스타 경쟁에서 한발 물러나는 듯했지만 네 자녀를 기르며 넉넉해진 감성과 연륜으로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보여준다. ’빙 줄리아’의 연기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지난해 골든글로브 뮤지컬·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과 미국 전미비평가협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사후에도 줄리아에게 영향을 미치는 ‘연극의 신’ 지미 랭턴은 영국 연극계의 거목 마이클 갬본이 맡았다. 그는 ’해리 포터’ 시리즈 3편과 4편에선 해리 포터가 다니는 마술학교의 교장 덤블도어 역을 맡아 국내 관객에게도 익숙한 인물이다.
자기 입으로 ‘이 잘생긴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 운동을 한다고 말할 정도로 귀여운 허영심을 보여주는 남편 마이클을 연기한 건 ’행운의 반전’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연기파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 계단을 헉헉거리며 뛰어내려와 승강기를 앞질렀다고 기뻐하는 장면 등에서 은근한 웃음을 자아낸다.


주름살이 부끄럽지 않은 아네트 베닝의 빛나는 연기
헝가리 출신의 세계적인 감독 이스트반 자보는 적극적으로 화면에 개입하는 대신 “영화의 힘은 주연배우의 연기력에서 나온다”며 배우들이 마음껏 격정적인 연기를 펼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감독의 역량이 드러나는 순간은 연극적인 실내 장면을 벗어났을 때. 잇단 배신을 겪고 고향으로 돌아간 줄리아를 멀리서 비추는 카메라는 화려한 잔재주 없이도 그녀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순간을 인상적으로 잡아낸다.
1930년대 런던 거리를 재현한 장면은 감독의 모국인 헝가리에서 주로 촬영됐다. 라조스 콜타이 촬영감독은 이스트반 자보 감독과 ’파랑새’ ’메피스토’ 등을 함께 찍으며 호흡을 맞춰온 베테랑으로 부다페스트의 고풍스러운 저택, 아름다운 전원 풍광을 아름답게 담아낸다.
영화의 마지막, 경쟁자인 젊은 여배우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애인과 남편을 조롱거리로 삼으며 멋진 복수극을 성공시킨 줄리아는 비로소 맥주를 주문한다. ‘사랑의 불꽃이 꺼지면 연기가 눈에 들어간다고, 그래서 눈물이 날 뿐이라고, 웃으며 말한다’는 가사가 인상적인 재즈 명곡 ’Smoke Gets In Your Eyes’가 흐르는 가운데 그는 맥주를 맛있게 들이킨다.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에게 찬사를 보내듯, 새롭게 시작되는 삶을 축복하듯. 목을 타고 시원하게 넘어가는 건 다름 아닌 인생의 깊은 맛일 것이다.
이스트반 자보(68) 감독
한바탕 연애소동 통해 권태기를 극복하는 여배우의 이야기 ‘빙 줄리아’
헝가리 출신으로 부다페스트 연극영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백일몽’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으며 시대에 희생된 인물들의 삶을 다룬 작품을 많이 발표했다. 나치 선전원으로 전락한 연극인의 삶을 그린 ’메피스토’는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으며, ’레들 대령’으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엠마와 부베의 사랑’으로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여성동아 2006년 10월 5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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