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별 가족’이 경주 안압지, 경북 주왕산, 경남 외도를 여행했을 때의 모습.(왼쪽 오른쪽 방향으로)
구동관씨(41)는 한 달에 한 번씩 아내 이정선씨(40), 아들 현석군(14), 딸 다솜양(11)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지난 90년 결혼한 뒤부터 큰일이 없는 한 계속해온 ‘월례행사’니 가족여행 경력은 벌써 15년이 넘는다. 큰아들 현석이는 생후 7개월 때부터, 작은 딸 다솜이는 돌을 지낸 후부터 같이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고.
“전 초등학교 3학년 때 대학생 누나가 가입한 산악회를 따라다녔을 만큼 여행을 좋아했어요. 마침 아내도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라 자연스레 ‘가족여행’이 시작됐죠. 아이들은 워낙 어릴 때부터 여행을 다녔기 때문에 어디든 떠나는 걸 생활처럼 여겼고요. 학교에 들어간 뒤에야 우리집이 좀 별나다는 걸 알았을 거예요(웃음). 아이들에게 고마운 건 지금도 여행가기 싫다는 말을 안 한다는 거죠. 다른 집 아이들은 사춘기가 되면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엄마 아빠랑 여행 다니는 걸 싫어한다고 하는데, 현석이는 중학교 2학년이 된 지금도 가족여행에 빠지지 않아요.”
그는 현석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계속 한 달에 한 번씩 가족여행을 가기로 아이들과 약속했다고 한다. 식구들끼리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 게 공부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행 횟수를 한 달에 한 번씩으로 정한 건 다녀보니 그 정도가 가장 적당했기 때문이에요. 계절 여행, 여름 휴가, 가족 기념일, 친구 가족들과 함께하는 여행 등으로 일정을 짜보면 얼추 한 달에 한 번꼴이 되더라고요.”
여행을 다녀온 뒤 그 기억을 정리하고 다음 여행을 준비하다보면 자연스레 한 달 주기가 들어맞는 점도 ‘한 달 한 번 여행’의 또 다른 이유가 됐다. 구씨는 지난 2000년부터 ‘초록별 가족의 여행(www.sinnanda.com)’이라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여행기록을 정리하고 자녀들이 쓴 체험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꼼꼼하고 실용적인 내용이 가득해 가족여행을 떠나려는 이들 사이에서 정보창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 덕분에 구씨 가족은 지난 2003년 한국정보문화진흥원이 선정하는 ‘올해의 정보가족’으로 뽑히기도 했다.
“홈페이지는 우리 부부가 아이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이에요. 사실 15년 넘게 가족여행을 다니느라 재산은 거의 모으지 못했거든요. 우리나라만 다니는 데도 1년에 6백만~7백만원씩 들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미리 말을 해뒀죠. 여행을 자주 다니느라 돈을 모으지 못해서 너희들에게 남겨줄 게 없으니, 대신 추억을 주겠다고요. 그런데 아이들이 여행 다닌 걸 잊어버리면 큰일이라 홈페이지에 증거 자료를 남겨두는 거죠(웃음).”
초록색과 별이 좋아 ‘초록별 가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구씨 가족의 홈페이지에는 그 이름만큼이나 따뜻하고 평화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체험여행 기록 곳곳에 붙어있는 사진 속에서 이들 가족은 언제나 활짝 웃음짓고 있고, 아이들의 여행기 속에는 엄마 아빠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겨 있다. 하루 방문객이 수백 명에 이르는 홈페이지의 방명록에는 “이렇게 화목한 가족이 있다니 정말 부럽다”와 같은 글이 많다. 하지만 구씨는 가족여행이 늘 그렇게 행복하고 재미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저녁에 무엇을 먹을까, 기념품을 살까 말까 같은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갈등과 다툼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중요한 것은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고 함께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끈끈한 가족애가 싹튼다는 점이라고 한다.
“여행지에 가면 신기하게도 서로에 대한 배려심이 커지더라고요. 대화도 많아지고요. 저는 공무원, 아내는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어서 평일엔 아이들에게 ‘잔소리’밖에 안 하는데, 여행지에 가면 평소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이 술술 나와요. 아이들도 그렇고요. 집에서는 잔소리로 들릴 이야기도 여행 중에 하면 재미있는 추억이 되죠.”
“부모가 많이 고민하고 준비해야 자녀에게 좋은 경험 남겨줄 수 있어요”
그는 가족 모두에게 좋은 추억을 남기는 여행을 하려면 부모들의 꼼꼼한 준비가 필수라고 강조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행 계획을 짜는 단계부터 자녀들을 참여시키는 것이라고.
“아이들이 여행에 흥미를 갖게 하려면 먼저 어디를 가고 싶은지 꼭 물어봐야 해요. 지명을 정해서 말하라고 할 필요는 없고, 산 강 바다 계곡 같은 큰 범주에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면 되죠. 아이들의 뜻을 확인하면 그 범위 안에서 여행일정 같은 조건에 맞춰 부모가 장소를 정하면 돼요. 그럼 아이들은 스스로 가고 싶은 곳을 간다는 생각에 여행 전부터 즐거워하거든요. 부모가 마음속에 정해놓은 여행지가 있다면 최소한 보름 전부터 그곳을 예고하는 게 좋아요. 어디가 좋은지 왜 좋은지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다보면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새 그곳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거든요(웃음).”
구씨는 여행지를 결정한 뒤에도 그곳에 가면 무엇을 할 것인지 등 여행 계획에 대해 자녀와 충분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말했다.
두 번째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여행이 가족 사이의 유대를 더욱 견고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믿음 없이 출발하는 가족여행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지만, 구씨는 여행 전 한 번 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정리하는 것과 그러지 않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강조한다.
“사실 여행 중에는 갈등 상황이 수없이 많거든요. ‘가족 사랑을 위해 떠나온 여행’이라는 생각이 없으면 울컥 화를 내게 될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서 아이들이 이유 없이 보채고 투정을 부릴 때 같은 경우죠. ‘나는 쉬는 날 너희를 즐겁게 해주려고 이 고생을 하는데 왜 좋아하지 않고 투정을 부려’라고 생각하면 여행이 즐거워질 수 있겠어요?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우리 모두 한층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웃으며 달래줄 수 있죠.”
그래서 구씨는 어린 자녀와 함께 여행을 떠날 때는 부모가 미리 아이들과 함께 즐길 게임 등을 준비하는 게 좋다고 충고했다.
“자녀들이 어리면 장거리 여행을 가는 게 무척 힘들어요. 1시간만 지나도 몸을 비틀며 짜증을 내기 시작하거든요. 그럴 때 자녀들과 게임을 하면서 가면 좋죠. 시간도 빨리 가고, 교육적인 효과를 볼 수도 있고요.”
그의 가족은 차 안에서 끝말잇기, 종류별 이름 대기, 내 이름 찾기 등과 같은 간단한 게임을 즐긴다고 한다.
“끝말잇기는 다 아실 테고요, ‘종류별 이름 대기’는 과자, 아이스크림, 껌, 동물이나 식물 등의 이름을 누가 더 많이 대느냐 겨루는 게임이에요. ‘내 이름 찾기’는 간판에서 자기 이름, 혹은 미리 정해놓은 이름을 먼저 찾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죠. 간판이 많지 않은 시골길을 갈 때는 보이는 것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찾도록 해도 좋아요. 예를 들어 ‘아버지’를 찾기로 했다면, 아스팔트에서 ‘아’, 버스에서 ‘버’, 지팡이에서 ‘지’를 찾은 사람이 이기는 거죠.”
그는 자녀들이 자라면서부터 여행에 교육적 효과를 더한 ‘체험여행’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행 도중 교과서에 나온 것들을 보면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그 다음부터는 여행지에서 교육에 도움이 될 만한 곳이 있으면 꼭 들러 체험을 하도록 했다.
“자녀가 원하는 것 해볼 수 있게 해주는 게 최고의 체험여행”
“꼭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는 곳만 가야 하는 건 아니에요. 마음만 먹으면 모든 곳이 체험 학습장이죠. 여행하다 농민들이 모내기하는 모습이 보이면 따로 부탁해 모를 한 번 심어볼 수 있게 해주고, 딸기밭에 가서는 딸기도 직접 따보게 했죠. 염전이 있으면 바닷물에서 물을 빼내는 수차도 돌려보게 하고요.”
구씨는 전문 체험장이 아닌 경우 부모가 아이의 안전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하고 “너희가 재미삼아 하는 일이 농민이나 어민들에게는 생업”이라고 일러주며 아이들에게 체험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등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아이들은 일회성 체험에서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구씨가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은 교육적 효과를 거두는 것에만 몰두해 가족여행의 의미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여행의 전부를 체험학습에만 할애하면 자녀는 여행을 또 하나의 ‘공부’로 생각해 꺼리게 될 수 있다고. 가족여행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게 ‘초록별 가족’의 지론이다.
지난 15년 동안 좋은 곳은 2~3번씩 들르는 등 우리나라 곳곳을 충분히 여행한 것 같다는 구씨는 내년이나 내후년쯤 열흘 정도 유럽으로 가족여행을 떠날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경비를 마련하려면 자동차를 사기 위해 몇 년 동안 모아온 적금을 깨야 될 것 같지만, 가족들이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많은 것을 배울 수만 있다면 차 없는 생활을 계속해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힘들 때면 가족 모두 함께 강원도 인제군의 진동계곡에 누워 물소리를 들으며 은하수를 바라보던 추억을 떠올린다고 말하는 그가 왠지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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