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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책을 펴는 즐거움

순수한 사랑을 세밀화처럼 그려낸 고전 ‘독일인의 사랑’

기획·김동희 기자 / 글·민지일‘문화에세이스트’ / 그림·성혜영(책 만드는 집 제공)

2006. 07. 28

병약한 소녀와 젊은 청년의 사랑을 세밀화처럼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낸 작품. 철학과 문학, 종교를 논하면서 가슴으로 키워가는 사랑 이야기가 다소 현학적으로 느껴지지만 현대의 소란에 마음이 아프고 무언가에 기대어 위로받고 싶을 때 아무 데나 펼쳐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순수한 사랑을 세밀화처럼 그려낸 고전 ‘독일인의 사랑’

세상의 어느 누구도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 사랑을 완벽하게 정의해주지 못한다. 세상에 태어난 인간의 숫자만큼, 아니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수의 사랑이 존재하지만 그 모양과 성격은 단 두 개도 똑같은 것이 없다.

괴테는 “사랑이 없는 삶, 사랑하는 생활이 없는 삶은 환등기가 비쳐주는 쇼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셰익스피어는 “사랑은 영원히 고정된 이정표로서 세월의 어리석은 장난감이 아니다”고 했다. 이들처럼 수천, 수만의 작가와 시인, 학자가 내린 사랑의 정의는 하나도 틀린 말이 없다. 그럼에도 사랑에 대한 정의와 묘사는 어제 그랬듯 오늘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또 나온다. 사랑은 ‘모든 것’이며 우주처럼 팽창하는 것이기 때문일까?

막스 뮐러가 소설 ‘독일인의 사랑’에서 보여주는 게 그런 사랑이다.
‘우리는 일어서기, 걷기, 말하기, 읽기 등을 배우지만 사랑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랑이란 우리의 생명과 같이 탄생하면서부터 생겨나온 것이다. 사랑은 우리 존재의 깊은 바탕’이라고까지 말한다.
‘우주의 천체가 서로 당기고 기울고 영원한 인력의 법칙에 의해 서로 결합하는 것과 같이 천성인 인간의 마음도 서로 끌고 좋아하고 영원한 사랑의 법칙에 의해 결합돼 있다. 햇빛 없이 꽃은 필 수 없으며 사랑 없이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 사랑은 어떤 측량 추를 사용한다 해도 밑바닥을 측정할 수 없는 깊은 우물이며,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이다. 사랑에는 척도라는 것이 없고 크고 작음도 비교할 수 없다. 오직 온 몸과 마음을 다하고 온 정성과 힘을 모두 기울여야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철학과 종교를 넘나들며 사랑의 실체를 탐구
마치 철학서의 한 부분을 읽는 것처럼 어렵다. 딱딱하다. 병약한 소녀와 젊은 청년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작품 제목에 굳이 ‘독일인’을 강조한 것도 이처럼 관념, 철학을 동원해 사랑의 실체를 파헤치려 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실제 소설 속 주인공이 사랑을 쌓아가는 과정이나 생각하는 것들은 매우 현학적이다. 소설이 ‘나’의 회상 형식으로 전개되는 것도 당장 눈앞의 현상 묘사보다 깊은 생각의 골을 따라가 실체를 파악하겠다는 작가의 뜻일 것이다.

소설 스토리는 사실 간단하다. 항상 병상에 누워 지내는 후작의 공녀 마리아와 ‘나’는 소꿉동무나 마찬가지다. 마리아가 견진성사(가톨릭교에서 세례성사 다음에 받는 의식)를 받은 날 기념반지를 동생들에게 하나씩 나눠주며 ‘나’에게도 주었지만 ‘나’는 “네 것은 모두 내 것”이라는 말과 함께 돌려주었다. 고향을 떠나 대학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마리아가 여전히 병약하지만 지식의 폭이 무한히 넓어진 것을 알게 된다. 함께 철학과 문학, 종교를 논하면서 말없이 가슴으로만 사랑을 키워가지만 세상은 두 사람의 그런 사랑을 이상한 눈으로 본다.



주변에선 마리아의 병이 도진다며 둘의 만남을 방해하지만 어느 날 열정에 사로잡힌 ‘나’는 사랑을 고백한다. 사랑하지만 병자인 탓에 표현할 수 없었던 그녀도 마음을 열고 두 사람은 처음으로 키스를 나눈다. 물론 누워있는 그녀에게 몸을 굽혀 가볍게 입술만을 덮는 키스였다. 그날 밤 마리아는 숨을 거두고 ‘나’에겐 그녀가 남긴 작은 편지가 전달된다. 편지 속엔 어린 시절 자신이 돌려준 반지와 함께 “당신의 것은 모두 내 것입니다 - 마리아로부터”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순수한 사랑을 세밀화처럼 그려낸 고전 ‘독일인의 사랑’

이런 작은 사랑 얘기를 하면서 작가는 ‘독일 신학’과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얘기하고 워즈워드의 시를 읽어주며 괴테와 바이런을 논한다. 화자의 생각을 따라가는 형식이지만 종교와 자연, 신비주의와 과학까지 강론해 지식 끈이 짧은 독자를 당황케 하기도 한다. 웬만한 독일인이라면 종교와 철학, 문학, 과학적 소양 위에서 큰다는 것을 일부러 내세우고 자랑하려는 건 아닌지 의심마저 들 정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정의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과 모습을 세밀화처럼 그려낸 작가의 문장은 섬세하고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내
‘ 나의 손에 쥐어져 있는 그녀의 손은 내 심장의 따뜻한 압력에 화답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거센 파도가 일고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내 앞에 펼쳐진 푸른 하늘은 바람이 검은 구름을 몰아낸 듯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나 같은 것을 사랑하지?”
그녀는 이 결정적 순간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묻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이냐고? 마리아! 어린아이에게 무엇 때문에 태어났느냐고 물어봐. 태양에게 무엇 때문에 비추느냐고 물어보란 말이야.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야.”’

연인들의 대화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지, 그 이유를 한마디로 정리하는 이런 현명한(?) 답변은 요즘 젊은이들도 즐겨 애용한다. ‘독일인의 사랑’이 현학적이라서 다소 어려우면서도 세대를 초월해 꾸준히 읽히고 사랑받는 것은 이처럼 책 어디를 펼쳐도 당장 써보고 싶은 문장들이 가득하다는 점에도 있다. 가령 마음속으로만 가꾸던 사랑을 고백하기에 앞서 몸으로도 사랑을 느끼고 싶다는 걸 작가는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가능하다면 그녀의 이마와 눈과 볼을 손으로 만져보아 실제로 그녀가 내 곁에 있는가를 확인하고 싶었다. 밤낮으로 나의 마음속에 떠오르던 그녀의 환영이 아니라 참된 존재-나의 것은 아니지만 나의 것이어야 하고 나의 것이 되고자 하는 존재, 내가 내 몸과 한몸이라고 믿는 존재, 그것이 없으면 내 생명은 이미 생명이 아니며, 나의 죽음은 이미 죽음이 될 수 없으며, 나는 입김처럼 허공 속에 사라져버리게 될 그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다.

플라토닉 러브니 정신적 사랑이라는 표현 자체가 실종돼버린 요즘엔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사랑이 무슨 철학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소란에 마음이 아프고 무언가에 기대어 위로받고 싶을 때나 관능과 물질에서 한 발짝 물러서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독일인의 사랑’을 펼쳐 아무데나 한 문장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소녀 취향의 얘기를 풀어내면서도 사유, 관념이 가득한 책을 만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책 만드는 집 펴냄. 서유리 옮김

아! 진실한 사랑마저 마음을 열어속마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걸까?연인들마저 진정한 마음을서로에게 보이지 못하는 걸까?나는 알고 있다.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솔직히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가남들에게 거부당하거나 비난을 받을까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을.나는 또한 알고 있다.사람들은 모두 거짓 속에 살아가면서남들에게나 자신에게나 이방인으로 머물러 있다는 것을.그러나 그들의 가슴속에는 똑같은 심장이 고동친다는 것을.

글쓴이 막스 뮐러는

1823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비교언어학을 전공하고 영국에 귀화, 옥스퍼드대 언어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1900년 사망했다. 슈베르트의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겨울 나그네’의 노랫말을 쓴 시인이자 학자인 아버지 빌헬름 뮐러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어학에 소질을 보인 그는 ‘고대 산스크리트 문학가’ ‘신비주의학’ ‘종교의 기원과 생성’ ‘동양 고대성전 전집’ 등의 저서를 남겼다. ‘독일인의 사랑’은 그가 일생 동안 유일하게 쓴 소설이다.

그린이 성혜영은

영남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디자인표현’에 소속돼 일러스트와 북디자인을 하고 있다. ‘위대한 개츠비’ ‘톨스토이 단편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알퐁스 도데의 별’ ‘80일간의 세계일주’ 등의 일러스트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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