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굴의 집념

술·대마초에서 벗어나 미국 고시 3관왕 된 신경섭 변호사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난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패자의 항변일 뿐이죠”

글·이남희 기자 / 사진ㆍ박해윤 기자

2006. 07. 24

공인회계사, 변호사, 특허변호사…. 하나도 따기 힘든 자격증을 3개나 취득하며 미국 주류사회 리더로 거듭난 한국인이 있다. 그의 성공이 더욱 값진 이유는 밑바닥에서 출발해 숱한방황을 거치며 힘겹게 일궈낸 성과이기 때문. “미국생활은 장밋빛 풍요와 행복이 가득 찬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과정이었다”고 고백하는 신경섭 변호사의 역경을 극복한 인생 스토리.

술·대마초에서  벗어나 미국 고시 3관왕 된 신경섭 변호사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을 읽노라면 거부감이 느껴지곤 한다. 본인의 잘난 점만 나열하는 데 급급한 글은 ‘역시 나와는 한참 거리가 먼 사람이야’ 하는 허탈감만 줄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경섭씨의 성공 스토리에는 ‘인간 냄새’가 난다. 폭력사건에 휘말리고 술·대마초에 의지해 살기도 했던 젊은 시절을 가감없이 털어놓는 그의 솔직함과 겸손함에 금세 매료되고 만다.
미국 시카고에서 법무·회계법인 발해를 운영하고 있는 신경섭 변호사(43). 그는 미국의 공인회계사, 변호사, 특허변호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 남들은 하나도 따기 힘든 자격증을 3개나 취득한 미국 고시 3관왕이다. 하지만 화려한 성과 뒤에 가려진 그의 노력은 더 빛난다. 처음부터 부모의 도움으로 성공한 재미교포도 많지만, 그는 미국 사회 밑바닥에서 출발해 지금의 자리에 이른 것. 그가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건너간 것은 고려대에 입학한 지 얼마 안된 1982년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정말 숨쉬기 힘들었어요. 고3 때 반장이 돼 환경미화를 담당한 저는 교실 뒤편 게시판에 광주사태를 보도한 타임지 기사를 붙였다가 선생님께 ‘너도 광주 폭도지?’ 하며 심하게 구타당했죠. 저는 그렇게 권위적인 체제하에서 교육받는 것이 싫었어요. 미국에서 공부하며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일하자고 막연하게 생각했죠.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 토플 공부를 하며 미국 대학에 진학할 준비를 시작했어요.”

“몸 팔고 마약 파는 것 외에는 안 해본 일이 없어요”
그는 미국 시카고 일리노이주립대에 입학했지만 부친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겨우 학비만 받을 수 있었다. 생활비와 책값을 벌기 위해 그는 온갖 아르바이트에 매달렸다. 주유소, 모텔, 옷가게, 세탁소 직원으로 전전한 것은 기본. 주로 흑인들이 사는 동네에서 험한 일을 하다보니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장면도 보고, 술만 파는 리커 스토어 점원으로 일할 땐 강도와 서로 총구를 겨누고 너덧 시간을 버티기도 했다. “몸 팔고 마약 파는 것 외에는 다 해봤다”고 우스개처럼 말할 정도다.
지금은 누구나 동경하는 미국 주류사회의 리더가 됐지만, 그가 젊은 시절 바르고 성실하게만 산 것은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 온갖 잡일을 다 해야 하는 현실을 한탄하며 마약에 빠져들었고, 친구들과 어울리다 폭력사건에 휘말린 것도 부지기수였다. 미국 영주권을 얻기 위해, 한국에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21세에 다른 여성과 결혼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원망하며 죽도록 술을 마시기도 했다.
“몸서리쳐질 만큼 고통스러운 현실이 싫어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저 자신이 싫어서 술과 대마초에 의지했어요. 20대 초반에는 ‘나 자신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했죠. 제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렇게 주먹을 휘두를 필요까진 없었는데, 억눌린 분노가 폭력으로 표출되곤 했어요. 그러다 대마초를 피운 후 친구와 자동차 경주를 벌이다 친구가 사고를 내는 모습을 보며 정신을 차렸죠. 목숨마저 위태롭게 만들 뻔한 제 만용이 순간 섬뜩하게 느껴졌어요. 그 사고가 있고 나서 며칠 후 저는 한국에 들르게 됐고, 그때 술과 대마초에 찌든 몸을 추스렸습니다.”
신 변호사는 특히 대마초의 부작용에 대해 따끔하게 충고한다. 그가 수개월 동안 대마초에 빠져있을 땐 성적표가 F로 도배돼 있었다는 것. 대마초 흡연은 뇌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술·대마초에서  벗어나 미국 고시 3관왕 된 신경섭 변호사

미국 사회 밑바닥에서 출발해 지금의 자리까지 오른 신경섭 변호사는 “죽을 힘을 다하면 못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대마초를 한 대 피우면 폭탄주를 5잔 마신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져요. 그러니 대마초가 얼마나 심하게 뇌를 망가뜨리겠어요? 아는 사람 중 하나는 시카고대에 들어갔다가 대마초에 중독돼 1년 반 만에 학교에서 잘리고 말았죠. 미국 사회는 대마초 피우는 것을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곳인 만큼, 유학생들은 대마초의 유혹에 크게 노출돼 있어요.”
그가 이토록 자신의 치부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미국에 대한 장밋빛 환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다. 시카고 지역에만 한 해 2백여 명의 한국학생이 유학 오는데 그중 10%만이 ‘무사히’ 졸업한다고 한다. 의지와 목표가 없는 학생이라면 유흥에 젖어 샛길로 빠지기 마련이란 것. 그는 자신의 방황하던 젊은 날이 유학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타산지석이 되길 희망한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친구와 설악산에 오른 뒤 의욕을 되찾은 그는 그때부터 공부에만 매달렸다. 컴퓨터 사이언스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 1년 만에 다시 회계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공인회계사가 되면 미국 사회에서 좀 더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가 회계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무렵 첫째 딸이 태어났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딸을 생각하며 그는 “죽어도 사무실에서 죽는다”는 일념으로 회계법인을 개업했다. 양복을 입고 위험한 흑인상가를 일일이 돌아다니며 명함을 뿌린 회계사는 당시 그가 유일했다. 개업 후 1년이 지나자 그의 사무실은 갑자기 불어난 고객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문전성시를 이뤘다.
회계사로서 성공을 거뒀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한국에 돌아가 직장을 잡고 부모를 모시며 살아야 한다는 마음의 숙제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미국 회계와 법률을 아는 전문인이 필요하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그는 로스쿨에 진학하기로 결심한다. 낮에는 회계법인을 운영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는 고단한 생활을 하며 그는 변호사의 꿈을 키웠다. 고객과의 술자리에서 빠져나와 다른 방에서 법전을 파고들 만큼 공부에 몰두했다. 무릎을 40바늘이나 꿰매는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그는 사고 다음 날에도 붕대를 두른 채 강의를 들으러 갔다. 멍투성이가 된 얼굴에 목발을 짚고 절룩거리며 나타난 그는 ‘잔 마샬 로스쿨의 괴물’로 소문이 났다.

무릎을 40바늘 꿰매는 교통사고 당한 다음 날도 로스쿨 강의 들어
“로스쿨에 다닐 때가 제 인생에서 정말 힘든 시절이었죠. 그때 정신이 육체를 이긴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전 자신에게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때 ‘나는 문제없어’라는 노래를 자주 부르며 저 자신을 다잡았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모든 걸 성취할 만큼 그는 천재성을 타고난 걸까? 그는 “아니요”라고 답한다. 어린 시절 뇌막염을 앓았던 신 변호사는 그 후유증으로 하루라도 약을 먹지 않으면 심한 두통에 시달리기 때문. 육체적 한계마저 의지력으로 극복한 그는 “죽을 힘을 다하면 못할 일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혼신의 노력을 다하지 않고 ‘난 안된다’며 운명론을 말하는 것은 그저 패자의 항변일 뿐이라고.
그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묵묵히 지원해준 부인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비록 “딴 여자를 마음에 품고 결혼식을 올렸다”고 말했지만, 그에게 아내는 이제 ‘평생을 믿고 의지할 최고의 동반자’다. 이들 부부에게 잠시 이혼의 위기도 닥쳤지만, 두 사람은 갈등을 슬기롭게 풀어나갔다.
“든든한 내조와 격려로 저를 뒷받침해준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제가 로스쿨에 다니던 시절 아내가 이혼 소장을 법원에 제출한 적이 있었죠. 학업과 일을 병행하느라 불안정하고 예민해진 제 정신상태를 아내가 받아들이기 힘겨워한 거죠. 그때 저는 ‘잘 살아보겠다고 열심히 산 것뿐인데 내게 무슨 죄가 있느냐, 우리가 이혼하면 두 딸은 시집을 가서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된다’며 아내를 설득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이 잠시 떨어져 살다보니 서로를 절절히 그리워하게 됐어요.”

술·대마초에서  벗어나 미국 고시 3관왕 된 신경섭 변호사

곧 서울에 법무·회계법인 발해의 지점을 설립할 예정인 신 변호사는 한국 중소기업의 지적재산권을 보호해주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변호사가 된 이후 이혼 소송은 거의 맡지 않았다. 이혼을 하겠다는 부부들이 찾아오면, 그는 일단 두 사람에게 이혼해야 할 이유와 이혼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모두 쓰게 한다. “이혼해야 할 이유가 이혼하지 말아야 할 이유보다 많은 부부만 이혼하라”고 말하기 위해서다. 정작 이혼해야 할 이유를 더 많이 쓰는 부부는 거의 없다고 한다. 이혼을 뜯어말리는 신 변호사를 보며, 비서들은 “돈 안되는 일만 골라서 한다”며 핀잔을 주기 일쑤다. 다만 남편이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는 이혼을 돕는다는 것이 그의 원칙이다.
남의 고통을 기회로 삼아 돈을 버는 대신 그는 ‘특허 전문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컴퓨터 사이언스를 공부한 그가 특허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특허변호사가 돼 미국 내에서 한국 중소기업의 지적재산권을 보호해주는 일을 하면 조국에 대한 마음의 빚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곧 서울에 법무·회계법인 발해의 지점을 열 생각입니다. 우리 중소기업들이 미국에 이미 등록돼 있는 특허나 지적재산권에 대한 대비 없이 물건을 내다팔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거든요. 특허 문제에 둔감한 국내 중소기업을 적극 돕는 게 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신 변호사는 최근 ‘곰 같은 사나이 미국 고시 3관왕 되다’라는 자서전을 펴냈다. 이 책에는 그가 미국에 정착해 지금까지 겪은 격랑의 인생 스토리가 담겨있다. 방황과 좌절에 대한 뼈저린 성찰, 불굴의 의지가 담긴 그의 글은 화려하게 포장하지 않은 생생한 날 것이기에 더 큰 감동을 준다.
“미국에서 성공한 분들의 책을 읽으면 고운 잔디가 깔린 뒤뜰에서 바비큐 파티하는 모습이 연상되곤 했어요. 하지만 저는 미국생활이 그런 장밋빛 풍요와 행복으로 가득 찬 것은 아님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