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희씨(55)는 2002년 봄 유방암 2기 진단을 받았다. 불과 8개월 전 섬유성 낭종으로 판명됐던 가슴 속 종양이 그새 암으로 발전한 것. 혼자 병원 밖으로 걸어나오는 동안 박씨의 머릿속에는 수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의사가 암이라면서 당장 수술해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어요. 모유수유를 하면 유방암이 안 걸린다기에 멍울이 만져져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암은 TV 드라마나 소설 속 주인공들만 걸리는 건 줄 알았는데…. 군대 가 있는 아들, 직접 운영 중인 미용실, 그리고 내 삶까지, 모든 것이 다 걱정되면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하지만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최대한 빨리 병을 이겨내야 한다는 결심이 선 것이다. 박씨는 그 길로 미용실에 가 20년간 운영하던 가게를 직원에게 넘기고는 본격적인 투병생활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박씨가 빠르게 결정을 내린 것은 암과의 싸움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서른다섯 살 때부터 미용실을 운영하며 가정살림을 꾸린 박씨는 그동안 갖가지 질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스트레스와 과로가 겹쳐 심각한 위궤양과 만성방광염, 통풍성 관절염에 시달렸고, 몸이 약해질 때마다 대상포진까지 나타났다고. 변비와 치질도 심해서 화장실 가는 것이 무서울 정도였다고 한다.
“건강이 너무 안 좋으니까 걱정이 돼서 암 보험에 가입하려 했는데 ‘병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거부당했어요. 그때부터 제 몸이 비정상적으로 좋지 않다는 걸 알았죠.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들과 함께 살아가려면 돈을 벌어야 했고, 퇴근 후에는 집안 살림도 해야 했으니까요. 너무 고통스러운 밤이면 ‘이대로 죽는 게 아닐까’ 생각하며 잠들곤 했어요. 하지만 아침이면 다시 눈이 떠졌고, 그렇게 매일매일이 반복됐죠. 그러다 암 선고를 받은 거예요. 어쩌면 이번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삶의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투병생활은 쉽지 않았다. 오른쪽 가슴을 모두 들어내는 수술을 받은 뒤 6개월에 걸쳐 12회의 항암치료를 받는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박씨는 인천 집에서 서울 노원구 공릉동 원자력병원까지 직접 운전해 오가며 치료를 받았는데, 가끔은 차 안에서 ‘차라리 죽는 게 덜 아프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고.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고, 온몸의 마디마디가 아팠어요. 그전까지 제게 있던 통증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괴로웠죠. 하지만 계속 아들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래, 난 죽을 수 없다. 이왕 암과 싸워 이겨야 한다면, 최대한 빨리 이기자’라고 마음을 다잡았죠.”
기름진 고기 멀리 하고 매일 산에 올라
그때부터 박씨는 생활습관을 완전히 바꿨다. 밤늦게 끝나는 미용실 업무의 특성 때문에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데 익숙했던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 7시 이전에 일어났고, 저녁이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평소 즐겨 먹던 삼겹살 등 기름진 고기와 커피도 완전히 끊었다. 한국암환우지원센터(www.cpsc. or.kr) 등 각종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스스로 모은 건강생활을 위한 정보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다른 암 환자들의 투병기를 참고해 식이요법도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셔요. 쑥차, 홍삼차, 칡차, 영지차 등 그날 아침에 생각나는 걸 돌아가며 끓이죠. 어떤 음식이든 한 종류만 오래 먹는 건 좋지 않거든요. 암은 몸을 따뜻하게 해야 낫는 병이기 때문에 차가운 걸 멀리하는 게 좋아요.”
따뜻한 차로 남아있는 잠을 몰아낸 다음에는 과일즙을 만든다. 과일 역시 하나를 정하지 않고 여러 가지 제철 과일을 사서 플레인 요구르트와 함께 갈아 마신다고 한다.
다음 순서는 녹즙. 암에는 십자화과(배추과 또는 겨자과라고도 함) 채소가 좋다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 양배추, 브로콜리, 배추, 콜리플라워, 브리셀 스프라이트, 케일 등에 사과, 민들레, 돌나물, 비트, 돌미나리, 셀러리 등을 기호에 따라 섞어 넣는다. 보통 이 가운데 네댓 가지 채소를 섞어 한 번에 200~300ml씩 하루에 네번 마신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배를 든든하게 하기 위해 생식을 먹으면 아침 식사가 끝난다. 매일 아침 이 많은 음료를 마시는 것이 번거롭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정작 박씨는 ‘별로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 일’이라고 말한다. 채소나 과일은 전날 미리 손질해두기 때문에 일반 가정에서 아침상을 차리는 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간단하다고. 대신 점심과 저녁에는 현미에 현미찹쌀, 율무, 수수, 기장, 차조, 팥, 강낭콩 등을 섞어 지은 밥과 채소 육수를 이용해 끓이는 다양한 국, 나물 반찬으로 식사를 해 영양 균형을 맞춘다.
생식까지 먹고 난 뒤 박씨가 하는 일은 집 근처 유기농 상점에서 다음 날 먹을 채소와 과일을 구입하는 것. 박씨는 늘 신선하고 다양한 채소, 과일을 먹기 위해 날마다 유기농 매장을 찾는다고 한다. 유기농 식품을 구입한 뒤에도 흐르는 물에 씻고 식초에 담가 헹군 뒤 정수된 물로 한 번 더 헹궈낼 만큼 농약을 철저히 제거하는 데 신경을 쓴다.
시장까지 들르고 나면 시간은 보통 오전 9시. 이제는 집 근처인 인천시 연수구 청량산에 오를 시간이다. 암 선고를 받기 전까지는 바쁜 일상 때문에 한 번도 등산을 해보지 못했다는 박씨는 건강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산의 매력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매일 아침 생수 한 병을 들고 산에 오른다. 언덕처럼 느껴질 만큼 야트막한 산이라 오르는 데 크게 어렵지 않은데도 이곳에 다니면서부터 체력이 부쩍 좋아진 게 느껴진다고. 그는 최근 설악산 천왕봉과 한라산 웃새오름까지 오를 만큼 건강해졌다.
“청량산에 오르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와요. 바다를 바라보며 숨을 깊이 들이쉬면 마음이 편안해지죠. 사실 처음엔 모두 다 일하는 한낮에 산에 와 있는 것이 편하지 않았어요. 평생 일을 하던 사람이라 쉬는 것이 오히려 불편했거든요. 모아둔 돈은 나날이 줄어들어가고, 아들은 아직 학생이라는 걸 생각하면 당장 내려가 일을 시작해야 할 것만 같았죠. 하지만 제가 걱정하고 스트레스를 받을수록 건강이 나빠지잖아요. 그래서 ‘이건 내가 스스로에게 주는 안식년이다. 지금 푹 잘 쉬고 나중에 더 열심히 일하면 된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 다음부터 마음이 편안해지데요.”
마음의 평화를 되찾아서일까. 지금 박씨는 암 환자라고는 보기 어려울 만큼 건강해 보인다. 실제로도 암에 걸리기 전보다 오히려 더 건강해졌다고 한다. 암과 싸워나가며 그를 괴롭히던 다른 질병들도 모두 이겨냈기 때문이다.
“요즘이 살아오면서 제가 가장 건강한 때인 것 같아요. 항암치료를 받느라 평생 달고 살던 약들을 모두 끊었는데도 20년 넘게 시달리던 변비, 통풍, 위궤양이 다 없어졌거든요. 40대 때의 저를 기억하는 분들은 요즘 저를 만나면 ‘어떻게 그렇게 몸이 좋아졌느냐’고 물어요. 그러면 저는 ‘다 암 덕분입니다’라고 말하죠(웃음).”
박씨는 아직도 자신은 암과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암을 증오하지 않는다. 암 ‘덕분에’ 오히려 잃었다고 생각한 건강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박씨는 “암 선고는 바로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암을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순간 새로운 삶이 시작되기 때문”이라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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