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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감동 사연

자폐 피아니스트 오유진 & 어머니 유계희

“대장암 말기 판정 받았지만 장애 있는 쌍둥이 아들 두고 눈감을 수 없어 항암치료 견뎌냈어요”

기획·김명희 기자 / 글·전원경‘주간동아 기자’ / 사진ㆍ조영철 기자, 동아일보 출판사진팀

2006. 06. 21

5월 말 개봉한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는 철없는 피아노 선생과 피아노에만 천재적 재능을 가진 자폐 소년이 진정한 스승과 제자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영화. 영화 속 소년과 꼭 닮은 오유진군은 ‘호로비츠를…’ 개봉 전 영화 제작발표회를 겸한 콘서트에서 자작곡을 연주해 화제를 모았다.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과 대장암을 딛고 자폐증과 함께 천재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서번트(savant)’ 쌍둥이 형제 운진·유진군을 반듯하게 키워낸 어머니 유계희씨를 만났다.

자폐 피아니스트 오유진 & 어머니 유계희

지난 4월 중순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 콘서트에 출연했던 기타리스트 이병우씨. 연주회가 열리기 전, 텅 빈 홀 객석에 앉아있는 그에게 건장한 한 남자가 느닷없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고 한다.
“‘어느 학교 나왔어요?’라고 묻기에 어안이 벙벙해서 잠깐 머뭇거리다가 ‘저 경신고등학교 나왔는데요’ 그랬더니 ‘그래요?’ 하면서 그냥 다른 쪽으로 가더라고요. 그 남자가 유진이였어요(웃음).”
이날 오유진군(23)은 이병우씨, 피아니스트 김정원씨 등 일급 연주자들과 함께 건국대학교 새천년기념관 무대에 올라 자작곡 ‘밀레니엄 소나타’를 연주했다. 유진군은 영화 속 소년이 피아노에만 관심을 가지는 후천적 자폐아라는 이야기를 듣고 선뜻 콘서트에 출연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충북 청주에 사는 오운진·유진 쌍둥이 형제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 3월 말 방영된 KBS ‘인간극장’ ‘운진이 동생 유진이’를 통해 세간에 알려졌다. 쌍둥이 모두가 발달장애 3급인 자폐증 환자라는 현실은 언뜻 듣기에도 참으로 가혹하다. 그러나 아이들의 어머니 유계희씨(52)는 이런 시련을 꿋꿋이 딛고 일어섰다. 형인 운진군은 충청대 산업정보학과를 졸업하고 청주 성신학교 차량보조원으로 일하고 있고, 동생 유진군은 올해 배재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유진군은 발달장애아 중에 정상적으로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최초의 케이스다. 둘 다 모두 수능시험까지 치고 일반전형으로 대학에 합격했다고 한다.
유씨의 집을 찾았을 때 운진군은 직장에 출근한 후였고 유진군은 엄마와 함께 있었다. 말은 약간 어눌했지만 유진군은 “지금 뭐하고 있어요?” 같은 질문에 “동영상 만들어” 하고 대답할 정도의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대학의 남자기숙사에서 사무보조원으로 일하고 있는 유진군은 예쁜 여자친구들이 많고 ‘알바’로 돈을 벌 수도 있어 학교 가는 게 무척 좋다고 한다. 피아노를 쳐달라고 부탁하자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비창’을 쳐 보인다. 기존 연주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편안한 연주였다.
기자와 엄마의 부탁으로 피아노를 쳤던 유진군은 이내 방 구석의 컴퓨터 앞으로 돌아갔다. 유진군은 컴퓨터로 무언가를 하느라 정신없는 사이 유씨가 담담하게 두 아이를 키운 남다른 사연을 들려주었다.
“아들 쌍둥이 낳아서 먹이고 씻기고 정신없이 키우느라 아이들이 이상한지도 잘 몰랐는데 두 돌이 넘도록 아이들 말문이 안 트였어요. 쌍둥이가 세 돌이 채 안되었을 때 병원을 찾았다가 둘 다 발달장애 판정을 받았어요.”
정신과에서는 두 아이 모두 선천적인 뇌기능 장애로 인한 발달장애, 즉 자폐라는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유씨는 ‘자폐’가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때는 ‘장애’라고 하면 팔다리 못 쓰는 신체장애만 알던 때였어요. 그냥 치료하면 낫는 병인 줄 알았기 때문에 슬퍼할 겨를도 없었죠.”
단칸방에 택시운전을 하는 남편과 두 아들,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사는 빠듯한 살림, 유씨는 그 와중에 갈릴리집, 청주 성신학교 등 특수학교를 다니며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정상으로 보이던 아이들이었지만 해가 갈수록 자폐 성향이 뚜렷해졌다고 한다. 다섯 살이 될 때까지 말은커녕 사회성도 전혀 없어 세상과 소통할 방법이 없었다고.
구원은 뜻밖의 방향에서 찾아왔다. 마침 단칸방에는 아이들 교육에 도움이 될까 해서 들여놓은 중고 피아노가 있었는데 두 아들 중 자폐증세가 좀 더 심한 동생 유진군이 네 살 때 조지 윈스턴의 ‘디셈버’를 한 번 듣고 반주까지 정확하게 쳐냈던 것.

자폐 피아니스트 오유진 & 어머니 유계희

피아노에 천재적 재능을 지닌 오유진군은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 가운데 최초로 정상적으로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케이스라고 한다. 가운데는 대학 졸업 사진.


“너무 놀라워서 가까이 살던 시누이에게 전화를 해서 수화기로 유진이가 치는 피아노를 한번 들어보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시누이가 ‘지금 카세트 틀어놨어?’라고 되묻더라고요.”
유진군은 자폐장애아들 중에서 특정 분야에 천재적 재능을 보이는 ‘서번트(savant)’였던 것이다. 유진군뿐만 아니었다. 운진군은 최근 몇 년간의 달력을 날짜에 요일까지 다 외우는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그때부터 유씨는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피아노뿐 아니라 화성학, 작곡 공부도 하고 트럼본, 트럼펫 같은 관악기까지 가르쳤다. 각종 장애인 음악경연대회도 열심히 출전했다. 쉽지 않은 싸움이었지만 단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은 끝에 유씨 부부는 중학교까지 특수학교인 성신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을 일반 학교인 청주농고에 진학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쌍둥이 형제에게 일반 학교는 참으로 모진 시련이었다. 친구들의 놀림과 폭행은 기본이었고, 교사들의 시선마저 싸늘했다. 설상가상으로 유씨는 이 무렵 덜컥 대장암 말기 선고를 받았다.
“병원에서는 3개월밖에 못 살 거라고 했지만, 도저히 죽을 수가 없었어요. 내가 죽으면 아이들 아빠한테 이 무거운 짐을 지우고 가는 거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유씨는 암 수술과 방사선 치료 등 각종 항암 치료를 견뎌냈다. 3개월 시한부 인생은 6개월, 1년으로 조금씩 늘어났다. 그리고 발병한 지 7년째인 올해, 마침내 완치 판정을 받았다. 유씨 정도의 말기 대장암 환자가 완치된 사례는 국내에서 단 두 건뿐이라고 한다.
온갖 시련을 딛고 쌍둥이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수능을 봐 운진군은 2년제 대학에, 유진군은 트럼펫으로 실기시험까지 치르고 배재대 작곡과에 합격했다.
“사실 운진이는 장애아 특별전형으로 국립대에 지원해보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장애아 특별전형도 신체장애만 받아주지 발달장애는 받아주지 않더군요. 체르니 40번까지 능숙하게 치는 아이에게 “계 이름도 모를 텐데” 하는 식이었죠. 그래서 그냥 일반전형으로 2년제 대학에 진학해야 했어요.”
대학은 악몽같던 고교시절과는 전혀 달랐다. 유진군의 지도교수인 채경화 교수는 “유진이 머리에는 많은 음악이 들어있다”며 한 사람의 작곡가로 인정해주었고 친구들 역시 스스럼없이 대했다. 수업은 물론이고 MT와 봉사활동까지 빠지지 않으며 즐겁게 대학을 다닌 유진군은 지난 2월 졸업식 무대에 올라 친구들의 환호 속에 자작곡 ‘밀레니엄 소나타’를 연주했다.
“주변의 도움이 컸어요. 앞으로 유진이가 영화음악이나 광고음악 등을 작곡하는 작곡가가 됐으면 좋겠어요.”
이제 유씨의 바람은 아이들이 사회에서 작게라도 자기의 자리를 잡는 것이라고 한다.
“운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취직할 데가 없었어요. 결국 자기가 다닌 학교에 취직을 할 수밖에 없었죠. 국가가 장애를 가진 성인들에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줬으면 해요. 장애아들을 돕는 프로그램은 많지만 성인이 된 후의 재활 프로그램은 거의 없거든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집을 나서는 기자 일행을 유씨 모자가 배웅했다. 엄마가 DVD를 사준다고 하자 이내 표정이 환해지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유진군. 유진군이 “엄마 사랑해요” 하고 엄마를 꼭 끌어안자 유씨도 활짝 웃는다. 모성의 힘이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실감케 해주는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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