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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김동희 기자의 비디오 줌~업

우리가 기대고 싶은 아버지의 초상 ‘인 굿 컴퍼니’

글·김동희 기자 / 사진제공·스폰지

2006. 05. 24

잡지사 광고영업부장으로 일하던 쉰한 살의 댄 포먼은 직장이 다른 회사에 넘어가자 자기 나이의 절반밖에 안되는 젊은 상관을 모시게 된다. 사람을 수단으로만 여기는 비정한 경쟁 사회를 우직하게 헤쳐나가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에 대한 연가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우리가 기대고 싶은 아버지의 초상 ‘인 굿 컴퍼니’

아직 캄캄한 새벽 4시 반, 한 남자가 자명종 소리에 깨어난다. 잠든 아내를 깨우지 않으려 조심스레 일어나 샤워를 하고 모닝커피를 마시다 자신이 일하는 잡지사가 문어발식 기업합병으로 악명 높은 거대기업에 넘어갔다는 뉴스를 듣게 된다. 불안한 마음을 애써 추스르고 커피 찌꺼기를 버리던 그는 쓰레기통에서 그것 못지않게 불길한 것을 발견한다. 임신테스트 시약의 포장지. 두 딸의 얼굴이 스쳐간다. 그의 이름은 댄 포먼, 쉰한 살의 스포츠잡지 광고영업부장. 만만치 않은 하루의 시작이다.
또 다른 남자가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휴대전화 아이디어를 낸 공로를 인정받아 새로 합병한 잡지사 광고영업부장으로 발탁된 남자. 새벽 3시, 고속 승진에 기분이 들떠 잠들지 못하고 아내를 향해 성공이 눈앞에 왔다고, 이제 큰 집도 살 수 있고 아이도 낳을 수 있다고 떠벌린다. 스물여섯 살의 야심가 카터 듀리아. 하지만 사실 그는 전혀 경험 없는 광고영업직으로 가는 게 겁이 난다.
영화는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두 남자를 번갈아 보여주며 시작된다. ‘아메리칸 파이’에서 젊은이들의 성적 호기심을 코믹하게 그려냈고, 휴 그랜트 주연의 ‘어바웃 어 보이’에서 미혼모의 아이를 돌보며 책임감에 대해 배우게 되는 남자의 성장 스토리를 담았던 폴 웨이츠 감독은 ‘인 굿 컴퍼니’에서 구조조정의 칼날이 번뜩이는 비정한 기업환경 속에 나이도 처지도 다른 두 주인공을 던져놓고 두 사람의 관계가 변화되는 과정을 따라가며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케 한다.

비정한 경쟁사회에서 악연으로 만난 두 남자의 이야기
댄은 임신한 건 십대 딸이 아니라 아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걱정거리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늦둥이가 성년이 될 때면 그는 이미 일흔을 넘긴 나이. 게다가 등록금이 비교적 저렴한 주립대를 다니던 맏딸 알렉스는 원하는 학과가 있는 사립대로 편입하려고 한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성인이 되면 다들 독립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게 현실이다. 성인이 되고도 부모에게 의식주를 의지하는 캥거루족은 점점 늘고 있으며 대학 등록금 부담은 우리나라 못지않게 부모의 등골을 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에게 어쩐지 익숙한 대사.
“아빠, 뉴욕대 등록금이 더 비싼 건 알지만 저한테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힘든 건 알지만 아빠, 해줄 수 있죠?’ 딸의 눈빛 공격을 독하게 뿌리칠 수 있는 아버지가 흔할까. 그러니 어쩌겠는가. 댄은 집을 저당 잡혀 딸의 등록금을 댄다. 직위는 강등되고 자기 나이의 절반밖에 안되는 상사를 모시게 됐지만 호기롭게 사표를 쓸 수는 없다.
자신이 홍보하는 잡지에 광고를 싣는 일이 광고주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 우직한 광고영업부장 댄 포먼 역은 ‘피닉스’ ‘투모로우’의 데니스 퀘이드가 맡았다. 한때 할리우드의 소문난 악동이었고 지금은 이혼했지만 멕 라이언의 남편으로 더 많이 알려진 이 쉰 두 살의 배우는 연륜이 쌓이며 점점 중후한 매력을 발산해 미더운 남편, 자상한 아버지 역할을 근사하게 소화해낸다. 대학 테니스 선수인 딸의 공을 쫓아다니다 힘에 부쳐 넘어지자 팔굽혀펴기로 머쓱함을 감추는 모습, 가족과 동료들이 깜짝 생일 파티를 준비한 걸 눈치 채고 오히려 그들을 놀라게 하는 장난기어린 모습, 자신의 딸과 연애를 시작한 카터에게 주먹을 날리고 딸에게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다고 했잖아. 다섯 살 때가 더 좋았지”라고 말하며 삐치는 장면 등에선 사뭇 귀엽기까지하다.

우리가 기대고 싶은 아버지의 초상 ‘인 굿 컴퍼니’

쉰한 살의 댄은 스물여섯 살짜리 상관을 맞게 된다(왼쪽). 아내가 떠난 집에 혼자 있기 싫은 카터는 댄 가족의 저녁 만찬에 무턱대고 끼어든다(오른쪽).


젊은 나이에 고속 승진으로 승승장구하는 듯한 카터에게도 고민은 있다. 큰맘먹고 고급 승용차를 뽑은 날, 제대로 몰아보기도 전에 사고를 당해 풀죽어 들어온 그에게 아내는 이혼을 선언한다. 아무리 영업 실적을 올려도 계속되는 감원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내가 떠난 빈집이 견디기 어려워 자동차나 사무실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고, 금붕어에게 말을 걸며 댄의 화목한 과정을 부러워하던 그는 댄의 매력적인 딸 알렉스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 또한 순탄하지 않다.
국내 케이블 TV에서 방영 중인 시트콤 ‘70년대 쇼(That 70’ show)’에서 어리숙한 1970년대 청년 에릭 역으로 얼굴을 알린 토퍼 그레이스가 얄밉도록 계산적인 여피 스타일의 외모에 불안감이 담긴 눈빛으로 미워할 수 없는 성공지상주의자 카터를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공룡을 우습게 보면 안 돼요. 수백만 년이나 지구를 지배했다고요”
공룡이란 보통 부정적인 비유로 쓰이지만 이 영화 속에선 약삭빠르게 진화하는 현대사회에서 건실하게 삶을 꾸려온 사람들에 대한 찬사로 표현된다.
영화 초반, 광고를 권유하는 댄에게 광고주는 ‘사위의 등쌀로 예산을 다른 분야에 쏟아부어 잡지 광고를 할 여력이 없다’고 말한다.
“사위가 나더러 (멸종될) 공룡이래.” 광고주가 씁쓸하게 말하자 댄은 대꾸한다.
“공룡을 우습게 보면 안 되죠. 제대로 된 녀석들이었으니까 지구를 수백만 년이나 지배할 수 있었겠죠.”
공룡 이야기는 영화 말미에 다시 한 번 등장해 회장의 연설을 방해한 괘씸죄로 해고 통보를 받은 댄과 그를 감싸다 같은 처지에 놓인 카터를 극적으로 기사회생시켜준다. 두 사람을 구하는 건 짐작할 수 있듯 카터의 젊음이 아닌 댄의 연륜에서 우러난 지혜와 진실성이다.
“특히 기분 좋은 건 우리가 (광고주에게) 도움이 됐단 거지.”
“정말 (광고의 효과를) 믿고 있는 거군요.”
“아니면 왜 이 일을 하겠어?”
다른 사람이 했다면 위선적으로 느낄 수 있을 법한 말. 하지만 우직한 남자 댄의 말이기에 카터의 마음을 흔들고 인생 계획을 다시 돌아볼 계기를 만들어준다.
영화는 선량한 사람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마무리를 보여주지만 이 행복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늦둥이는 태어나고 댄은 언제든 다시 구조조정의 칼날 아래 놓일 수 있다. 그래도 늘 집안에서 러닝머신을 타던 카터는 이제 직접 바깥 공기를 쐬며 노을 지는 바닷가를 달린다. 어떤 말보다 감동적인 순간이다.

우리가 기대고 싶은 아버지의 초상 ‘인 굿 컴퍼니’
감독 폴 웨이츠(40)는 동생 크리스 웨이츠(36)가 제작한 화제작 ‘아메리칸 파이’ (1999) 감독을 맡아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영국 작가 닉 혼비의 소설을 영화화한 ‘어바웃 어 보이’(2002)는 동생 크리스와 공동으로 각색과 감독을 맡았으며 ‘인 굿 컴퍼니’ (2004)는 폴이 각본과 감독을 맡고, 크리스가 제작을 담당했다. 철없는 젊은 남자들의 성장담, 통념에서 벗어난 부자관계 등을 유머러스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려온 폴 웨이츠는 더글러스 서크 감독의 고전 ‘슬픔은 그대 품안에’(1959)에서 흑인 엄마를 둔 백인 딸 역으로 한국 관객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배우 수잔 코너의 아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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