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하늘이 어둑어둑하더니 급기야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진다. 오늘은 전화상담 봉사를 하는 날이기에 오랜만에 내린 비가 그다지 반갑지 않다. 날씨가 궂은 날이면 전화상담을 원하는 사람이 더욱 많고 고민 내용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살이가 답답하고 막막한 사람들에게는 싱그러운 봄비마저 우울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올해 초부터 한 달에 두 번 ‘생명의 전화’에서 전화상담 봉사를 하고 있다. ‘생명의 전화’는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평소 평생 한 가지 사회봉사 정도는 하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해 우연히 생명의 전화를 알게 됐고, 이곳에서 10년 넘게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전화상담 봉사를 시작하게 됐다.
오전 11시. 사무실에 들어서자 상근 선생님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나는 커다란 찻잔에 녹차를 가득 담아 상담 부스로 향한다. 상담을 시작하기 전 잠시 수화기를 내려놓고 ‘지금 걸려온 전화가 상대방에게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대화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떠올리며 ‘오늘도 많은 얘기를 듣자’고 마음먹는다. 사실 전화상담은 어떤 해결책을 주는 것이 아니다. 세상 어디에도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전화를 하기 때문에 그저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줄 수 있다.
수화기를 올려놓자 금세 전화벨이 울린다. “네, 생명의 전화입니다.” “여보세요, 저… 너무 힘들어서 정말 죽고 싶어요….” 절박하고 안타까운 사연들이 이어진다. 이곳으로 전화를 걸어 털어놓는 고민은 카드 빚, 고부 갈등, 배우자의 외도 등 무척 다양하다. 요즘엔 우울증에 시달리는 주부들의 전화가 부쩍 늘었다. 얼마 전에는 이혼을 결심한 주부의 전화를 받았는데, 그는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다. 시집식구와 마찰이 있는 것은 물론 남편과도 대화가 되지 않아 이혼 법정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이곳에 전화를 했다고 한다. 얘기를 들으며 한참을 같이 울고 나니 상담자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서 살아봐야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상담봉사를 하며 나는 빚쟁이가 된 기분이다. 주는 것보다 얻는 것이 훨씬 많고, 절망의 끝에 선 사람들에게 한 가닥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무한한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남들은 불혹의 나이에 인생의 허무를 느낀다지만 나는 그럴 시간이 없다. 내가 사람들에게 ‘기운 내라, 다시 일어서라, 할 수 있다’고 했던 말들이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와 활력을 준다. 고부 갈등을 겪는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전화를 동시에 받다 보면 둘의 입장을 모두 이해하게 되면서 세상을 보는 눈도 넓어진다.
정신없이 통화를 하다 보니 벌써 오후 3시가 지났다. 마지막 통화를 마치고 크게 기지개를 켜고 상담부스를 나선다. 귀가 얼얼하고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힘들지만 마음만은 날아갈 듯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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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눔의 사랑을 실천하는 주부들의 훈훈한 사연을 찾습니다. 자원봉사를 하시는 주부 본인이나 주위 분들의 간단한 사연을 적어 연락처와 함께 이메일(real1life@hanmail. net)로 보내주세요. 문의 02-361-0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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