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교포인 임지현양(16)은 한국어를 포함해 모두 8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언어의 달인’이다. 한국어를 비롯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라틴어로 된 책들을 막힘없이 읽을 수 있고 수필이나 시 같은 글들을 쓸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임양은 2004년 뉴질랜드 중국문화원이 주최한 중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입상하고 2005년 프랑스문화원이 주최한 프랑스어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외국어 달인’으로 유명해졌고 최근 한국에서 ‘외국어 8전 무패’라는 책을 펴냈다. 지난해 12월 중순 어머니 진양경씨(48)와 함께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귀국한 임지현양은 영락없는 10대 소녀였다.
“어제 사촌언니랑 동대문시장 구경을 갔는데 예쁜 옷들이 너무 많아서 뭘 사야 할지 한참 고민했어요. 이 베레모도 어제 산 거예요. 예쁘죠?(웃음)”
임지현양 가족은 아빠 임동빈씨(48)의 학업을 위해 임양이 네 살 되던 해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났다. 지금은 8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임양이지만, 처음부터 외국어를 잘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서투른 영어 때문에 뉴질랜드 친구들의 놀림을 받는 일이 많았고 이 때문에 우울증까지 생겨 엄마 진씨를 무척 힘들게 한 적도 있다고.
“지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의 일이었어요. 어느 날 밤 지현이 방에 들어갔는데, 지현이가 이불 위에 엎드려 눈물 콧물 범벅이 돼 울고 있더라고요. 영어를 못한다고 놀림받았나 싶어 달래주려고 했는데, 저를 노려보면서 막 울더라고요. 그 다음엔 갑자기 마구 웃고요. 그렇게 울다가 웃는 증세가 몇 시간 계속 됐어요.”
당시 남편은 학위 논문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한국에 잠시 들어가 있는 상황이라 진씨는 혼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한다. 딸을 소아정신과에 데려가려고 해도 영어 장벽 때문에 의사에게 딸의 증세를 설명할 수 없어 무척 막막했다. 이상한 행동을 보이던 임양이 간신히 입을 열고 내뱉은 말은 진씨를 더 큰 충격에 빠뜨렸다. 임양이 “나쁜 생각이 자꾸 떠올라. 엄마가 죽었으면 해. 그러면 안 되는데, 내가 어떻게 엄마를…. 엄마, 날 병원에 데리고 가서 수술시켜줘요”라고 한 것.
“공부하는 남편을 대신해 제가 교민회 사무실에 취직해 생계를 떠맡았거든요. 하루 종일 직장 일을 하느라 지현이를 돌볼 틈이 없었어요. 피부색도 다르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어요. 그 후 직장을 그만두고 지현이 돌보는 데만 전념했어요. 등하교도 같이 하고 하루 종일 함께 놀아주자 1년 뒤 우울증이 싹 사라지더라고요.”
담임선생님의 격려로 외국어 공부에 열정 갖게 돼
임지현양이 직접 그림과 글씨를 써 만든 일본어 교재.
“난 차이니즈가 아니라 코리안”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뉴질랜드 친구들은 초등학교 1학년인 임양을 ‘칭총 차이니즈’(아시아 사람들의 눈이 송충이처럼 길게 찢어졌다는 뜻을 지닌 비속어)라고 불렀다. 엄마 진씨는 아이들의 놀림과 따돌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양의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임양은 지금도 담임선생님이 내놓은 해결책을 잊지 못한다. 담임선생님이 “지현이는 뉴질랜드에 산 지 얼마 안돼 영어를 못해. 하지만 한국어는 아주 잘하잖아. 조금만 지나면 지현이는 두 나라 말을 모두 유창하게 하게 될걸?”이라고 아이들에게 말한 것.
영어도 못하고 생김새도 이상하다고 놀려대던 아이들은 이내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었고 이후 임지현양을 ‘2개 국어를 할 수 있는 친구’라며 떠받들었다. 자신감을 회복한 임양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영어공부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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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정치학과 법학을 공부한 뒤 UN에서 일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 임지현양.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철자 맞추기 대회에 나가 우승하면서 ‘스펠링 마스터(Spelling Master)’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영어단어 철자를 선생님에게 물으면 선생님은 “지현이에게 물어봐”라고 할 정도였다고. 임양은 점차 영어 말고도 다른 외국어에도 흥미를 가지게 됐고 옆집 살던 일본인 화가 아주머니에게 과자를 얻어먹는 재미로 일본어를 습득하기 시작했다.
“차고 안에서 아빠가 쓰던 일본어 교본 책을 발견했어요. 꼬불꼬불한 글씨가 재미있어 보여서 몇 개를 외웠어요. 다음 날 옆집 일본인 아주머니에게 ‘오하요 고자이마스’ 하고 인사했더니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면서 좋아하셨어요.”
이후 임양은 주말마다 옆집에 놀러가 일본과자를 얻어먹으며 자연스럽게 일본어를 익혔다. 임양은 혼자 익힌 일본어를 뒤죽박죽 이야기하며 ‘외국어는 이렇게 하는 건가 보다’ 하고 감을 잡았다고 한다. 중학교에 진학한 임양은 디에고라는 스페인 소년을 짝사랑하게 됐다. ‘스페인어로 가장 멋진 이메일 쓰기 대회’에서 1등을 하면 디에고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하루 서너 시간 이상씩 스페인어를 공부한 끝에 기어코 1등을 따내기도 했다. 그해 교내 스페인어 말하기 대회에 나가서도 1등을 거머쥐었다.
중국어는 매주 자원봉사를 하러 다니는 양로원의 중국인 할머니와 친해지기 위해 배웠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내고 있는 웬디 할머니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인사를 해도 묵묵부답이었는데, ‘니 하오’라고 인사했더니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고. 임지현양은 9학년과 10학년(고등학교 1, 2학년에 해당) 때 교내 중국어 말하기 대회에 나가 1위를 차지했다.
임지현양이 어렸을 때는 서투른 영어 때문에 우울해하는 딸을 보며 엄마 진양경씨 또한 심한 마음고생을 했다고 한다.
프랑스어는 프랑스 문학작품을 원어로 직접 읽어보고 싶어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프랑스의 멋진 패션과 맛있는 음식에 매료되면서 프랑스어 공부는 날개를 달았다. 2005년 여름에는 오클랜드에서 열린 프랑스어 말하기 대회에서 1등의 영예를 차지했다. 러시아어는 영화 ‘하트브레이커스’에서 나오는 ‘다(Da·‘네’라는 뜻)’라는 러시아 단어에 매력을 느껴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임지현양은 모국어와 마찬가지로 외국어를 사람과 사귀고 취미생활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면 쉽게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임양은 외국어 공부를 시작할 때마다 이미 할 줄 아는 외국어들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 분석하면서 문장의 구조부터 익히고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발음 연습을 하고 영화와 노래를 통해 다양한 표현을 익히는 식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8개 국어가 머릿속에 입력돼 있다 보니 꿈을 꿀 때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등 다양한 언어로 꾸기도 해요. 앞으로는 독일어나 이탈리아어에 도전해볼 생각이에요. 대학에서는 정치학과 법학을 공부한 다음 국제연합(UN)에서 일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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