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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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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갑질은 한국 재벌 3세의 흔한 애티튜드가 됐을까

EDITOR 김명희 기자

2018. 05. 31

한국 기업의 가장 큰 위험 요소는 재벌 3세 성격 리스크란 말이 나온다. ‘갑질(Gapjil)’이라는 글로벌 신조어까지 탄생시킨 그들의 문제적 애티튜드.

갑질과 비도덕적 경영으로 물의를 빚은 대한항공 총수 일가. 조양호 회장과 딸 조현민 전 전무, 조현아 전 부사장.(왼쪽부터)

갑질과 비도덕적 경영으로 물의를 빚은 대한항공 총수 일가. 조양호 회장과 딸 조현민 전 전무, 조현아 전 부사장.(왼쪽부터)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셋째 아들 김동선 씨.(왼쪽) 정일선 현대비앤지스틸 사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셋째 아들 김동선 씨.(왼쪽) 정일선 현대비앤지스틸 사장.

젊은 재벌 상속자가 대화 도중 상대에게 물을 끼얹거나 나이 많은 임원들에게 막말을 하는 건 드라마에서 종종 봐왔던 일이다.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에 대한 소문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녹취 파일이 공개되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드라마틱하게 과장된 이야기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지도 모른다.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난 조현민 전 전무의 실체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간 재벌 3세들이 보인 비도덕적인 행태는 드라마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셋째 아들 김동선 전 한화건설 차장은 재벌 3세 갑질 논란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 폭행 등으로 여러 차례 물의를 빚은 그는 지난해 청담동 주점에서 종업원을 폭행한 혐의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80시간을 선고받기도 했다. 집행유예 기간에도 대형 로펌의 신입 변호사들과 술자리를 하던 중 변호사들에게 행패를 부린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았다. 해당 사건은 본인이 사과하고, 피해자들이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불구속 입건으로 일단락됐다. 

홍성추 한국재벌정책연구원 원장은 “재벌 3세들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성공 신화를 귀가 따갑도록 듣고 자라기 때문에 자신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선민의식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가 조현민 전 전무의 ‘갑질(Gapjil)’ 기사를 보도하며, 중세 봉건 귀족의 못난 행태에 비유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들의 특권 의식은 비서나 운전기사 등 자신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태도로 발현되기도 한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손자이자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동생인 이재환 CJ 파워캐스트 대표는 최근 수행 비서에게 요강을 닦게 하고, 폭언을 퍼부은 사실이 폭로돼 물의를 빚었다. CJ 측은 이재환 대표가 유전 질환인 샤르코마리투스 병을 앓고 있는 탓에 수행 비서가 간병인 역할까지 하면서 비롯된 일이라고 해명했지만 부적절한 처신이었다는 비난을 피해가진 못했다. 대림가 3세인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은 2016년 자신의 운전기사 2명에게 상습적인 폭언과 폭행을 일삼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벌금 1천5백만원을 선고받았다. 재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사건 이후 이해욱 부회장은 운전기사를 따로 두지 않고 본인이 직접 운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가 3세인 정일선 현대비앤지스틸 사장도 운전 수칙 등을 세세히 기록한 A4 용지 1백40장 분량의 매뉴얼을 만들어두고 운전기사가 이를 지키지 못할 경우 폭언과 폭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사장은 3년 동안 운전기사 61명을 주 56시간 이상 일하게 하고 이들 중 한 명을 폭행해 벌금 3백만원을 선고받았다.

‘창업공신’도, 경쟁도 없다

총수 일가의 퇴진을 요구하며 벤데타 가면을 쓰고 집회를 하고 있는 대한항공 직원들.

총수 일가의 퇴진을 요구하며 벤데타 가면을 쓰고 집회를 하고 있는 대한항공 직원들.

2년 전 재벌가의 운전기사 상대 갑질을 취재할 당시, 기업에 기사를 알선해주는 업체 관계자들은 “창업주에서 2세, 3세로 내려갈수록 갑질 수위가 높아진다”고 증언했다. 왜 맨손으로 기업을 일군 창업주 세대보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3세들 가운데 비뚤어진 인격과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 많을까.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는 “창업주들은 기업을 일구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사람의 중요성을 잘 알고 인재를 대접할 줄 안다. 2세들도 그런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인 마인드는 갖춰져 있다. 하지만 3세들은 어릴 때부터 수많은 보모와 비서들에 둘러싸여 ‘아가씨’ ‘도련님’으로 불리며 금지옥엽으로 키워진 탓에 소통과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재벌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창업공신’이 3세에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정선섭 대표는 경험이 부족하고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재벌 3세 리스크를 한국 기업의 가장 큰 위험 요소 중 하나로 꼽았다. 홍성추 원장도 재벌 3세들은 평생 대접만 받고 살기 때문에 싫은 소리나 반대 의견을 자신에 대한 모욕이나 비난이라고 생각해서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말한다. 외국으로 유학을 가더라도 비서가 따라붙거나 회사 현지 법인 관계자들로부터 케어를 받고 철저히 자신들만의 커뮤니티 안에서만 움직이기 때문에 국내에서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재벌 3세들은 보통 해외에서 대학이나 MBA 과정을 마치고 귀국, 부모 회사에 입사해 7~8년 후 임원이 되는 코스를 밟는다. 이렇게 후계자들이 경영 수업을 받는 동안 기업에서는 치밀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경영권 승계 작업을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차명 재산 상속, 일감 몰아주기 같은 불법과 편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아모레퍼시픽그룹이 서경배 회장의 장녀 민정 씨가 주요 주주로 있는 이니스프리에 일감 몰아주기를 했다는 의혹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재벌 그룹의 1세대인 창업자들은 무에서 유를 창출했고, 2세대는 도약에 성공해서 살아남았다. 이들에 대한 평가에는 명암이 공존하지만, 한국 경제의 주역으로 활동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문제는 3세들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만큼의 평가를 받기도 힘들고, 그들 스스로도 지금의 시스템에서 경쟁력을 평가받는 경영인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그렇다고 재벌 3세들을 기업 경영에서 배제하고 완전한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는 것이 최선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오너 경영인들은 전문경영인들이 단기적인 실적에 주력하느라 놓칠 수 있는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통 큰 투자 등을 추진력 있게 밀고 나가는 데 유리하다. 이 때문에 주주 자본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창업 정신을 지켜나가는 오너 경영자들이 존경받는 경우도 많다. 재계 관계자들은 재벌가의 독주를 막고 전횡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더욱 정교히 갖추고, 그러한 것들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감시 시스템을 정상화하는 것이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진 동아일보 사진DB파트 디자인 최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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