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겨울 바람이 매섭게 불던 지난 2월18일 아침, 서대문구 아현시장 한쪽에선 드라마 ‘한강수타령’ 촬영이 한창이었다. 초로의 여인이 촬영장을 서성이는 것을 발견한 탤런트 고두심(54)이 촬영 중간 짬을 내 한걸음에 달려왔다.
“문 선생님.”
40여 년 만에 해후를 하는 고두심과 초로의 여인의 눈가엔 반가운 미소와 옛시절을 떠올리며 가슴을 적시는 물기가 함께했다. 초로의 여인은 최근 자전소설 ‘이젠 말할 수 있다’를 펴낸 문옥정씨(59). 남자에서 여자로, 촉망받는 한국무용가에서 양공주로, 기생으로, 스트립 댄서로, 야쿠자의 정부로, 정치자금 돈세탁 역할에 이르기까지 그의 지나온 삶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했다.
그건 그의 남다른 운명에서 비롯되었다. 남자의 성기와 여자의 성기를 함께 갖고 태어난 것. 남녀의 성기를 동시에 갖고 태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세조 때 숱한 양반가 아녀자들과 애정행각을 벌여 임금이 직접 문초를 할 정도로 당시 최대의 스캔들을 일으킨 ‘사방지’라는 인물이 가장 유명하다.
문승일, 문명희, 문숙희, 에레나, 스잔나…. 많은 이름만큼이나 굴곡진 삶을 살아온 그를 만났다. 험난했던 인생을 살았던 만큼 환갑에 다다른 나이는 속일 수 없었지만 호리호리한 몸매와 또렷한 이목구비는 젊었을 때 무척 미인이었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문승일. 그게 제 본명이에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사내아이였죠. 남자형제들을 형이라고, 여자형제들을 누나라고 불렀으니까요.”
그가 처음 자신의 몸이 남과 다르다는 것을 느낀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같이 발가벗고 수영을 하던 동찬이란 친구가 그에게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는 말을 하면서였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어망, 동찬이는 아무래도 내가 이상하댄마시’ 하자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듯 ‘무신 거가’ 하시더라고요. 제가 손가락으로 아랫도리를 가리키자 어머니가 한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한숨을 깊게 내쉬는 거예요. 그리곤 제 손을 꼭 잡고 ‘승일아, 너 그런 말 아무헌티도 하지 마라’며 다짐을 받으셨어요.”
어머니의 깊은 한숨에서 자신이 뭔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지만 더 이상 물어볼 수는 없었다. 아버지 없이 혼자서 가난한 살림에 6남매를 키우느라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쉬지 않고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새로운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후로 다른 사람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말을 못하고 혼자 자신의 몸에 대한 비밀을 지키며 까닭 모를 두려움에 떨었다. 그는 자연 말이 없어지고 소극적인 아이가 되었다.
“어머니는 제가 태어날 때부터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계셨어요. 하지만 가난한 살림에 어떻게 조치를 취할 엄두를 못낸 채 세월만 끌어오셨던 거예요. 그래도 고추가 달렸으니까 절 남자로 키우신 거죠.”
중학교 때 하루아침에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어
그는 중학교도 당연히 남자중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여자애보다도 더 예쁘다”는 말을 들었던 그는 중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문옥정씨는 고두심에게 무용을 가르친 인연이 있다.
“동네에선 귀여운 사내아이로 통했어요. 다른 애들은 사춘기가 되면서 수염이 나기 시작했지만 저는 수염은커녕 골격도 여자 같았거든요. 지나던 노스님까지 저를 보면 귀엽다며 뽀뽀를 했을 정도였죠.”
그를 귀여워하는 사람 중에 부산과 제주를 오가며 사업을 하는 안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 곧잘 영화도 보여주고 제과점에 데려가 빵도 사주곤 했던 안씨가 어느 날 낚시를 하러 가자고 했다. 그는 흔쾌히 따라나섰다. 그리곤 배를 타고 바다낚시를 하다 멀미 때문에 잠이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들리면서 흐릿하게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는데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강렬한 조명 때문에 눈도 뜰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고, 깨어났을 땐 아랫도리가 심하게 아파왔다.
“안씨가 자기 욕심을 채우려 절 일본으로 데려가 남자의 성기를 제거하는 수술을 시킨 거였어요. 사내로 자라던 제가 어느 날 갑자기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자가 되어버린 거죠.”
안씨는 그를 일본의 한 집에 머물게 하면서 몸이 회복되도록 극진히 간호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을 무렵 무참하게 그를 짓밟았다.
“저에게 평생 같이 살자며 애원도 하고 협박도 했어요. 하지만 전 그럴 생각이 없었어요.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죠. 몸이 회복된 후 감시하던 그의 눈을 피해 도망쳐 나와 겨우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제주도로 돌아왔지만 그는 더 이상 ‘남자’ 문승일일 수 없었다. 다시 남자중학교에 다니며 남자처럼 행동했지만 이미 몸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봉긋 가슴이 나오기 시작한 것. 평소엔 조심하면 남들이 알아챌 수 없었지만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체육시간은 난감했다. 그때마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곤 했지만 오래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학교라는 통제된 공간에서 비밀은 없는 법. 옆에 앉은 친구와 장난을 치다 그만 친구의 손이 그의 가슴에 닿는 일이 벌어졌다. 그 순간 친구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했지만 소문은 삽시간에 이웃 여학교까지 퍼졌다.
“가슴 달린 남자라고 아이들이 놀렸죠. 그때 절 지켜주던 친구가 있었어요. 그게 계기가 되어 그 친구와 친해졌는데, 서로 어렴풋한 이성의 감정을 느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친구는 제가 남자인 줄 알고 있었어요. 첫 키스를 하고 난 후 자기가 동성을 좋아한다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살을 하고 말았어요.”
친구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는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 제주를 떠났다. 하지만 남자도 여자도 아닌 자기가 갈 곳이 어디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 끝에 속세를 떠나 머리를 깎고 스님의 길을 걸으려 했지만 그곳에서도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비구니로서의 삶을 살던 어느 날이었다. 큰 비가 내리던 새벽에 그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별 생각 없이 문을 열었어요. 곡차(술)에 취한 스님 한 분이 제 방문 앞에 서 있었는데, 당시 시인으로 꽤 이름을 날리던 분이었어요. 반쯤 풀어진 눈으로 저를 쳐다보던 스님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와락 끌어안더군요. 스님의 흔들리는 눈빛에서 남자의 욕정을 느끼고 아차 싶었지만 그때는 이미 성인 남자, 그것도 욕정으로 불타오르는 성인 남자의 완력을 빠져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고두심과 문옥정씨가 ‘한강수타령’ 촬영장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때마침 수소문 끝에 그가 있는 절까지 찾아온 어머니 손에 이끌려 문씨는 세상으로 돌아왔다. 제주에 돌아온 그는 탁구선수로 활동하는 동생의 유학길에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국립국악원 산하 국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승무의 이매방, 살풀이의 한영숙 등 쟁쟁한 무용가들로부터 한국무용을 배웠고 그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대학에 들어가 무용을 더 배우고 싶었어요. 하지만 당시 집안 형편이 나빠져 제가 돈을 벌어야 했어요. 그래서 국악고를 졸업하자마자 제주도로 내려와 무용학원을 열었어요.”
그때 그가 가르쳤던 아이들 중 한 명이 현재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로 인정받고 있는 탤런트 고두심이었다고 한다. 당시 고두심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기 때문에 몇 달 배우다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 그만두었지만 함께 합숙훈련을 하며 정이 많이 들었다고.
“당시 학생들하고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양반놀이’를 출품하기로 하고 연습을 했어요.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마당극이라 할 수 있는 가면놀이였죠. 그때 다른 애들은 주인공인 양반 역할을 잘 소화하지 못했는데, 갓 들어온 두심이가 마치 자기 역할이라는 듯 소화를 잘했어요. 특히 양반춤을 너무 잘 추었죠. 두심이 때문에 그때 대회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을 수 있었어요.”
그에게 “고두심이 춤에도 끼가 많았냐”고 묻자 “한국무용은 그다지 소질이 있지는 않았다”고 한다. 한국무용은 정적인 데 반해 고두심은 동적인 면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양반놀이에서 빛을 발했던 것처럼 두심이는 동적인 춤에 재능이 있었어요. 그때 두심이가 저에게 더 춤을 배웠더라면 양주산대놀이나 별산굿 같은 탈춤을 익히게 했을 거예요. 만약 그랬다면 두심이는 그 방면의 대가가 되었을 거라고 확신해요. 그만큼 끼가 많은 아이였어요.”
그는 고두심이 무용 제자일 뿐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같은 동네에 살아 더욱 정이 간다고 했다.
“두심이는 학교 교사를 했던 제 친오빠의 제자이기도 해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우리 집에 자주 놀러왔죠. 또래 아이들 중 가장 얼굴이 예쁘고 성격 또한 명랑해서 웃음소리가 밝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때도 예의가 참 바른 아이였죠.”
그때 집으로 자주 찾아오던 친오빠의 제자들 중 고두심 말고도 윤영희라는 아이가 있었다고 한다. 한때 신상옥 감독과 결혼했다 마흔두 살에 요절한 비운의 영화배우 오수미의 본명이 바로 윤영희다.
그는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3년 만에 끝이 났다. 몸은 여자가 됐지만 법적으로는 남자였기에 신검통지서가 날아왔던 것. 결국 그는 군의관들 앞에서 아랫도리를 내려야 하는 치욕을 겪은 후 제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그 후 그의 삶은 거침없이 흘러갔다. 우연히 자기처럼 남자인데 여자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태원을 찾아갔고 거기서 미군을 상대로 양공주 생활을 하게 됐다. 한때 대학교수와 만나 가정을 꾸리기도 했지만 남자가 도박에 빠지는 바람에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다시 먹고살기 위해 들어간 곳이 국일관. 거기서 호스티스 생활과 스트립댄서를 하던 그는 착실하게 돈을 모아 작은 요정을 직접 경영하기도 했다.
“국일관에서 일할 때가 70년대 초반이었어요. 당시 그곳은 정치인과 경제인 등 우리나라 실권자들과 젊은 여자 연예인들의 질펀한 밤 문화가 펼쳐지던 곳이었죠.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당시 인기 여자 연예인들이 그곳에서 많이 활동했어요. 지금은 밝힐 수 없지만 나중에 당시 밤 문화를 적나라하게 증언하고 싶어요.”
그는 우연히 만난 일본 야쿠자 두목의 내연녀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야쿠자의 돈을 이용해 국내 검은 정치자금을 세탁해 주는 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을 계기로 그늘진 생활을 청산하고 지금은 사회봉사 활동을 하며 보람 있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한다. 또한 국가대표 탁구선수였던 동생을 보살피며 알게 된 이에리사, 정현숙, 박미라 등 탁구인들과 탁구동우회를 만들어 탁구를 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고.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책을 통해 털어놓고 난 후 한동안 몸이 많이 아팠어요. 하지만 이젠 건강해졌어요. 부끄럽게만 생각했던 과거가 돌이켜 생각하니 부끄러울 게 없더라고요. 이젠 말하고 싶어요. 주어진 운명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그의 말에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고두심이 “문 선생님은 가슴으로 세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살아가는 천상 제주여자”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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