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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유인경의 Happy Talk

나이 들수록 아줌마처럼 변해가는 남편

2005. 01. 31

나이 들수록 아줌마처럼 변해가는 남편

나이 들수록 남편에게서 ‘아줌마 근성’이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멜로드라마의 마니아가 되어가는가 싶더니, 쇼핑의 ‘쇼’자도 싫어하던 그가 먼저 장바구니를 든다. 과묵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이제는 자신에게 신경 써주지 않는다며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이렇듯 남성성을 잃어버리고 여성성을 더해가는 남편이 귀찮고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으니 서글픈 현실이다. ‘그러게 젊어서 잘 하지’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여자처럼 변한 남편이 안쓰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부터라도 남은 생을 남편과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아봐야겠다.
요 몇 년사이 남편이 많이 달라졌다. 아니 이상해졌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는 뉴스, 다큐멘터리, 운동 경기, 그리고 ‘야인시대’ 같은 남성적인 드라마만 보던 사람이 멜로드라마를 즐겨 본다는 것이다. 내가 드라마를 넋을 잃고 보다 눈물 흘리기라도 하면 “야, 한심하다 한심해”란 말을 연발하던 사람이 말이다.
남편이 멜로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것은 4년 전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 ‘푸른 안개’가 방영되면서부터다. ‘푸른 안개’는 40대 후반의 남자 이경영과 20대의 풋풋한 에어로빅 강사 이요원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로 당시 남편은 젊은 여성과 중년 남성이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이 드라마를 굉장히 심취해서 봤다. 마지막에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에이, 저러면 안 되지. 어떻게 만난 사랑인데…. 당신 이금림 작가 잘 아니까 제발 줄거리 바꿔서 이요원이랑 새출발하게 해달라고 그래” 하며 흥분을 하기도 했다. 그 후로 남편은 ‘파리의 연인’ ‘매직’ ‘풀하우스’ 등의 드라마를 빼놓지 않고 봤다. 물론 텔레비전 채널권을 놓고 다투지 않아 좋지만 남편의 변화가 어느 순간 낯설게 느껴졌다.
멜로드라마, 장보기를 좋아하고 말수도 많아진 남편
또 다른 변화는 장보기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남편은 쇼핑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아니 적어도 나와 함께 가는 쇼핑은 싫어하는 척했다. 다행히 예전에 살던 집 앞에는 배달을 해주는 슈퍼마켓이 있었고 집 근처에 시장도 있었다. 그러나 이사를 온 후에는 어쩔 수 없이 대형 할인마트에서 한꺼번에 장을 봐야 하는데, 운전을 못하는 나로서는 남편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처음에는 억지로 따라와서 짐만 나르더니 이제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며 장을 보기까지 한다. 자신이 먹을 맥주며 안주거리를 챙기고 시식 코너에도 빠지지 않고 들러서 이것저것 맛도 보고 “이왕이면 선물을 주는 상품을 사자. 약간 포장이 찢어졌지만 싼 물건을 골라야 한다”며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나는 가끔 남편이 아니라 언니와 함께 장보러 온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부엌 출입도 잦아졌다. 예전엔 내가 끙끙 앓아누워 있어도 부엌에 얼씬도 하지 않던 그가 요즘엔 부엌에서 직접 물도 가져다 마시고, 냉장고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나보다 더 잘 아는 것 같다. 물론 여전히 혼자 밥을 차려 먹는 등의 일은 하지 않는다. 다른 집 남편들은 마누라 밥도 차려주고 빨래며 설거지 등을 척척 한다고 하지만 워낙 게으르고 집안일은 돕지 않던 남자라 이 정도만으로도 내겐 ‘경천동지’ 할 만한 일이다.
행동뿐만이 아니라 감정이나 정서적인 면에서도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남편은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다. 경상도 ‘싸나이’임을 자랑으로 여기는 보수적인 남성의 표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내에게만은 과묵한 사람이다. 화나는 일이 있어도 입을 꾹 다물면 그뿐이고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그냥 씩 웃고, 고민거리가 있더라도 상의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것을 굉장히 남성적인 강점이라고 믿었던 사람이다.

나이 들수록 아줌마처럼 변해가는 남편

그런데 요즘은 말이 좀 많아졌다. 얼마 전에는 업무상 기분 좋은 일이 있었는지 전화를 걸어 나와 딸아이에게 자랑을 했다. 그러나 주의가 산만한데다 남편 일에 별로 관심이 없는 나는 건성으로 “그래, 축하해. 잘 될 거야”라고만 말하고 딸아이 역시 “좋겠네. 그런데 올 때 과일 좀 사와”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집에 들아온 남편을 평상시와 다름없이 대했는데 결국 남편은 혼자 나가서 술을 마시고 돌아오더니 “무진장 섭섭하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남편의 변화가 내겐 큰 충격이다. 태어나 50년, 나와 결혼해 19년을 그토록 간 큰 남자로 살아왔던 사람이 왜 갑자기 아줌마처럼 변하는 걸까. 내가 같이 쇼핑하자고 노래 부를 때면 부르르 떨며 싫어하던 사람이 왜 이제는 먼저 알아서 장바구니를 드는지, 그리고 울면서 제발 대화 좀 하자고 할 때는 모른 척하고 ‘쿨쿨’ 잠만 자던 사람이 왜 이젠 먼저 말을 거는지…. 정작 지금의 나는 밖에서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아 매일 늦게 집에 들어오는데, 어쩌자고 그는 갑자기 착실해져서 일찍일찍 집에 들어와 밥상 앞에 앉아 있느냔 말이다. 난 갈수록 씩씩해지고, 남편과 이야기하는 것보다 싱싱한 후배들과 대화하는 것이 더 즐거운데 말이다. 어쩜 이렇게 타이밍이 맞지 않는지….
남은 생 행복하려면 남편에게 살림 가르치고 함께 즐길 취미 만들어야 할 듯
생리학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남편의 이런 변화는 당연한 일이다. 중년이 되면 남성들은 여성호르몬이 많이 분비되어 여성적인 면을 보이고 숱한 술자리 약속도 다 귀찮아져 집으로 일찍 돌아가게 된다고 한다. 반면 여성들은 남성호르몬의 분비가 왕성해지면서 목소리도 커지고 계 모임, 찜질방 모임, 여행 등을 이유로 집밖으로 나돌게 된다. 신혼 초엔 조금만 남편이 늦게 들어와도 초조하게 기다리고 행여 출장이라도 가면 “몰라 몰라, 나도 데려가줘” 하던 새댁들이 중년이 되어서는 남편이 출장 간다면 박수를 치며 즐거워한다. 얼마 전 친척언니를 만났는데 너무 표정이 밝아서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고 물어봤더니 ‘까르르’ 웃기부터 했다.
“응, 남편이 다음주부터 두 달간 중국으로 출장 가거든. 아유, 요즘은 친구도 다 없어졌는지 7시 땡 치면 들어와 남편 밥 차려 주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솔직히 말하자면 남편이 외국 나가서 돈만 척척 보내주면 좋겠어. 호호호.”
또 요즘 아줌마들은 ‘까·불·지·마’라고 쓴 글을 냉장고에 붙여놓고 남편만 혼자 남겨둔 채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까불지마’란 가스 조심, 불 조심, 지퍼 조심(영감님들은 볼일 보고 지퍼를 잘 안 올리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 지퍼를 내리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고), 마누라 찾지 마!!란 뜻이라고.
노안이 와서 안경을 벗고 잔글씨를 보는 남편, 유난히 코 고는 소리가 커지고, 젊게 보이려고 염색도 하는 남편. 이처럼 늙어가는 모습을 감추지 못하는 남편을 볼 때마다 기분이 참 묘하다. ‘젊을 때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 남자도 나이 못 속이는구나’라는 생각에 연민의 감정이 느껴진다. 하지만 가장 걱정스러운 건 ‘이 영감과 앞으로 어떤 노후를 맞이해야 하나’하는 점이다.
비단 내 남편과 나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나이 들면서 성 역할이 바뀌어가는 부부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게다가 요즘은 평균 수명이 늘어나 잘하면 백 살도 거뜬하게 산다는데 앞으로 이 영감과 50여 년을 늙은 상태로 살아가려면 지금부터 뭔가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 같다. 이제부터라도 요리나 청소를 제대로 하는 법을 가르치든가 아니면 둘이서 사이 좋게 즐길 수 있는 취미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긴 남편도 나 같은 마누라와 노년을 같이 보내는 게 걱정스럽긴 한가보다. 지난 일요일에 약속이 있어 알아서 저녁을 해결하라고 하고 나갔더니 딸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아무리 바빠도 아빠 밥은 좀 챙겨줘. 나 결혼하면 아빠가 엄마랑 안 살고 우리 집에 와서 살겠대, 제발 이러지들 마!!”
겨우 고등학생인 딸에게 이런 협박을 했다니 남편도 참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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