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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명복을 빕니다

오랜 암투병 끝에 세상 뜬 가수 길은정

‘죽음 전날까지 라디오 생방송 진행하며 삶에 대한 의욕 잃지 않아’

■ 기획·최호열 기자 ■ 글·김순희‘자유기고가’ ■ 사진·조영철 기자 원음방송 제공

입력 2005.01.31 13:40:00

가수 길은정이 끝내 세상을 떠났다. 오랜 세월 암과 맞서 싸우고, 전남편 편승엽과 2년여에 걸쳐 법정다툼을 벌이며 힘겹게 산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취재했다.
오랜 암투병 끝에 세상 뜬 가수 길은정

“납골당과 상복을 준비할 때도 괜찮았는데 마지막 무대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네요.”
지난해 11월9일 KBS ‘열린 음악회’ 무대에 서기 직전 길은정이 한 말이다. ‘열린 음악회’ 무대에 오르기 두 달 전 암세포가 골반까지 퍼져 병원으로부터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는 말기암의 고통 속에서도 휠체어를 탄 채 무대에 올라 밝고 편안한 모습으로 평소 즐겨 부르던 팝송 ‘렛 미 비 데어(Let me be there)’와 그의 마지막 앨범 ‘만파식적’ 타이틀곡인 ‘난 널’을 열창했다.
열정을 다한 그의 무대를 지켜본 청중과 출연자들의 눈엔 이슬이 맺혔다. 노래를 마친 그는 이날이 자신의 마지막 무대가 될 것을 점치고 있었을까, “이번이 제 마지막 무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무대를 내려왔다.
직장암으로 오랫동안 투병 생활을 해온 길은정은 1월7일 밤 경기도 분당의 자택에서 마흔의 나이로 이승과 작별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 자신의 홈페이지(kileunj ung.starnstar.net)에 ‘마지막 일기’를 남겨놓아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1월4일 새벽 0시32분에 ‘내가 좋아하는 블루’라는 제목으로 오른 이 글에는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한 듯, 못다 이룬 꿈에 대한 안타까움과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엄숙함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그냥 파란색을 좋아한다”고 말문을 연 그는 “이상하게도 파란색 기타를 갖고 싶었는데 한 기타 제조회사가 나만의 이니셜이 새겨진 기타를 선물해주겠다고 해 너무 기뻐 폴짝폴짝 뛰었다”고 회고했다. 길은정은 “반드시 그 파란색 기타를 메고 더 파랗고 싱그럽게 노래 부르고 싶었는데…, 이미 병세가 악화돼 더 이상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된 크리스마스이브에야 기타를 건네받을 수 있었다”면서 “조금만 더 일찍 만들어졌다면 열린 음악회에 나갔을 때 연주할 수 있었을걸” 하고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오랜 암투병 끝에 세상 뜬 가수 길은정

그는 “내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길은정의 노래 하나 추억 둘’ 송년특집을 생방송으로 진행할 때 그 파란색 기타로 내 사랑을 흠뻑 담아 ‘호텔 캘리포니아’를 연주했다”며 파란색 기타에 얽힌 애틋한 사연을 소개했다. 생전에 그가 사랑하고 아낀 파란색 기타는 ‘주인’의 영정 사진 오른쪽에 놓여 있었다.
길은정은 마지막 일기에서 “요샌 책을 읽기도 힘겹고 인터넷에서 오랫동안 글자를 읽고 쓰기도 어렵지만 난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제 모든 것은 내 마음과 정신력에 달려 있을 뿐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이란 통증을 줄일 수 있는 ‘모르핀’ 주사를 놔주는 일뿐이다”며 시한부 선고를 받은 절망적인 상황을 담담히 적어나갔다. 그는 일기 말미에 “말이 통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처럼 순수하고 맑은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엄습한 외로움을 토로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통증과 싸우면서도 원음방송에서 매일 생방송 ‘길은정의 노래 하나 추억 둘’ 진행에 혼신의 힘을 다한 그는 사망하기 전날까지도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1월6일 방송을 마친 길은정은 제작진에게 “그동안 방송할 기회를 줘 너무 고맙다. 통증이 너무 심해 내일은 팬들에게 고별 방송을 하고 싶다. 내 부음도 가장 먼저 전하면 좋겠다”고 말해 방송국 측에서는 고별 방송을 준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1월7일 오전 전화로 “도저히 방송에 출연할 수 없을 만큼 증세가 심각하다”고 말한 뒤 결국 이날 자택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오랜 암투병 끝에 세상 뜬 가수 길은정

길은정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팬을 위로하는 언니 선옥씨. 그는 길은정의 투병 생활 동안 늘 곁에서 함께 했다.


“수의 대신 97년 ‘빅 쇼’ 무대에 설 때 입었던 미색 드레스를 입혀달라고 했어요. (1월7일) 오전부터 심한 구토 증세를 보이더니 계속 힘들어했죠. 은정이가 떠나기 1시간 정도 전에 ‘언니’하면서 저를 부르더니 ‘그동안 고마웠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언니, 많이 사랑해’ 하면서 팔을 벌려 저를 꼭 껴안아줬는데 그 이후 바로 정신이 혼미해졌어요. 계속 무슨 말을 읊조렸는데 알아들을 수 없었죠. 임종은 저와 조카, 그리고 담당의사가 함께 했어요.”
죽는 순간까지 길은정의 곁을 지킨 언니 선옥씨는 임종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오랜 투병 생활을 지켜본 선옥씨는 “죽음을 준비하는 동생의 모습을 통해 ‘삶의 엄숙함’을 느꼈다”고 했다.
“빈소에 놓인 영정 사진은 베스트 앨범 재킷 사진 중에서 동생이 가장 맘에 들어 하는 것으로 미리 확대해뒀어요. 동생은 ‘나 죽거든 빈소에 만파식적 앨범을 틀어달라’고 했어요. 검소하게 장례식을 치러주고 화장해서 납골당에 안치해달라는 부탁도 했고요. 납골당에 가져갈 유품도 미리 지정해줬어요. 베스트 음반과, 동생의 마지막 음반(만파식적), 그리고 끝내 출간되지 못한 ‘책상은 책상이다’ 시집과 명함 크기만한 마스코트(강아지가 이불 속에서 누워 있는 모양)를….”
길은정은 84년 ‘소중한 사람’이 실린 데뷔 앨범을 발표하며 가요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데뷔 직후 왕영은에 이어 MBC ‘뽀뽀뽀’의 ‘제2대 뽀미 언니’로 낙점되면서 시청자들과 방송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10여 년 동안 MBC ‘영11’, KBS ‘가요톱 10’, MBC 라디오 ‘정오의 희망곡’ 등을 진행하며 사랑을 받았다. 또한 그는 연기자로도 활동, 92년 MBC 연기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으며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동료 연예인의 부러움 섞인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그의 인생에 직장암이라는 ‘고난’이 찾아온 것은 96년. 그러나 그는 병마 앞에서 좌절하지 않았다. 직장암 발병 사실을 안 그해 가수 편승엽과 ‘눈물의 결혼식’을 올렸고 암을 이겨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불태웠다.
길은정·편승엽 커플은 결혼 당시 ‘병마를 극복한 아름다운 사랑’으로 주목을 받았는데 그 후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을 남기고 7개월 만에 협의이혼하며 짧은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2002년 길은정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공개일기에서 ‘그동안 편승엽의 자상함은 모두 거짓이었다’고 밝히면서 2년여 동안 지리한 명예훼손 공방이 이어졌고, 지난해 7월 서울서부지방법원은 그에게 징역 7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편승엽이 순애보의 주인공은 아니었어도 사회에서 매장당할 만큼 파렴치범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길은정도 재판을 통해 진실이라고 믿었던 사실이 허위나 과장이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이로 인해 편승엽과 그의 가족이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음에도 그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은 점은 죄질이 무겁다”고 실형 선고 이유를 밝혔다. 이에 길은정은 “그럼 내가 (편승엽에게) 사과하란 말이냐. 난 그럴 수 없다”며 항의하다 실신하기도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그의 건강 상태 등을 감안해 법정 구속은 하지 않았고, 선고가 내려진 이틀 후 편승엽이 길은정에 대한 민·형사 소송을 모두 취하하겠다고 밝혀 사건은 일단락됐다. 이후 길은정의 병세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의 힘겨운 투병기는 KBS ‘병원 24시’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소개되었는데, 일각에서는 “매일 생방송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길은정이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병세를 부풀린 것은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길은정과 오랜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방송작가 민경미씨는 “다른 사람들이 언니의 투병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지만 재판 진행 중에 아픈 내색 하지 않은 채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죽기 전날까지 방송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정신력으로 버텼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전했다.

오랜 암투병 끝에 세상 뜬 가수 길은정

조문 여부에 관심이 쏠렸던 전남편 편승엽은 발인 전날인 1월8일 밤 11시 길은정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을 찾았지만 길은정의 오빠 등 유족들이 반대해 발길을 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개그맨 겸 MC 이홍렬은 1월8일 밤 빈소를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그는 “고인이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프로그램이 바로 제가 진행하는 ‘이홍렬 박주미의 여유만만’이었다”고 회고하며 고인의 죽음을 애석해했다.
“녹화 중에도 너무 많이 아파해서 가슴이 아팠어요. 저희 어머니가 오래전 암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셔서 얼마나 아픈지를 알거든요. (길은정씨가) 제 어머니보다 더 아픈 것 같아 더욱 가슴이 아팠어요.”
이홍렬은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시길…. 다음 만날 때까지 잘 계시길…”이라며 고인에게 전하는 말을 맺지 못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빈소를 떠났다. 그의 빈소에는 이홍렬 외에도 김창남, 노사연, 신정환, 임지훈 등 동료 가수들과 방송국 관계자 등이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가족과 동료 연예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1월9일 경기도 고양 ‘청아공원’에서 치러진 추모식에서 길은정이 세상을 뜨기 전날까지 투혼을 불사르며 진행했던 ‘길은정의 노래 하나 추억 둘’ 방송 당시의 육성이 10여 분 동안 흘러나와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경기도 벽제 승화원에서 한줌 재가 된 길은정은 이승과 ‘짧은 인연’을 끝내고 ‘청아공원’ 납골당에 안치됐다. 길은정은 갔지만 그를 사랑했던 팬들은 그의 노래와 목소리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 길은정의 마지막일기 #
가수 길은정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 투병생활을 하면서 남긴 일기가 팬들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암으로 인한 고통, 세상 사람들의 오해로 인해 힘든 상황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의 따뜻한 마음이 깊은 감동을 주는 마지막 일기의 전문을 공개한다.
2004. 11. 8. 준비하기
내일 있을 ‘열린 음악회’ 녹화 때문에 괜스레 마음 동동거리며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동안 노래 연습을 하지 못했고 또 내일의 무대는 어쩌면 내게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르는 마지막 노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깊어서였다. 불안하면서도 설레는 기운이 내 방안을 감돈다.
언니에게는 검은색 정장을 선물했다. 그것은 상복을 의미했다. 그동안 집에서 음악작업을 하던 미디 프로세서도 음악하는 후배에게 쓰라며 건네주었다.
거의 30여 년간 모아왔던, 지금은 구하기도 어려운 자료인 LP와 CD 수백 장은 원음방송에 자료로 쓰라며 전해주기로 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질 좋은 방송, 정성 어린 방송을 만들기 위해 필요했던 음악자료 1천여 곡을 오디오 파일에 입력시켰던 것까지 합하면 그 자료는 꽤나 유용할 것이다.
무엇은 누굴 주고, 누구에겐 무엇을 주고… 다 주는 것만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언니의 상복까지 준비하는 것을 두고 너무 성급한 것은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느끼고 있다. 지난 9월 초, 말기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앞으로는 혼자서 일어나 앉지도, 혼자서 자리에 눕지도 못하게 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는데 그것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암덩어리는 점점 커지기만 해 손으로도 만져질 뿐 아니라 육안으로도 구분이 될 정도다.
‘… 노래 하나 추억 둘’을 진행하는 방송 시간의 행복이 지나면 집으로 돌아와 통증 때문에 1시간 간격으로 깨어 울부짖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길게 기다리고 있다.
일부러 휠체어에 앉은 채 잠을 안 자고 새벽까지 버텨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그럴듯하지 않았다.
언니는 덩달아 밤 새도록 1시간 간격으로 내게로 와 나를 일으키고 눕히고를 반복하고, 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아프다고 눈물 흘리는 내 등을 쓰다듬는다.
그러나 그 눈물은 금세 그치고 만다.
이내 내가 우스갯소리를 하거나 장난스러운 말투로 언니를 웃긴다.
“언니이~~~ 우리 요즘, 스킨십이 너무 잦은 거 아냐?”
영화나 CF에 나오는 끈적끈적한 말투의 성우 목소리 성대모사를 하곤 하기 때문이다. 언니는 내 흉내에 웃고 잠깐이라도 우리는 아픈 현실을 외면할 수 있다.
오늘 밤은 과연 몇십 분 정도 눈을 붙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일 있을 ‘열린 음악회’ 녹화를 마음으로 준비하며 긴장감에 피로를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4인조 밴드와 연주했던 음악을 관현악단 편곡으로 대하자니 어색하기 그지없다. 맑고 순수하고자 하는 원곡의 느낌이 복잡한 악기 대형과 편성으로 인해 사라지는 단점이 있음을 느꼈다. 잘 하고 싶은데….
나는 분명 뜬눈으로 밤을 지샐 것이다. 구토를 하고 강한 진통제를 먹고 지쳐 쓰러져 보낼 것이다. 밤새 몇 번이고 언니의 도움을 받아야만 침대에서 자세를 바꿀 수 있을 것이며 일어나고 눕고를 반복할 것이다. 정말 잘 하고 싶은데….

오랜 암투병 끝에 세상 뜬 가수 길은정

길은정이 평소 가장 아끼던 파란색 기타를 들고 이승에서의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2004. 11. 15. 입원
어젯밤부터 언니와 나는 가방을 꾸리기 시작했다. 어디론가 멀리 신나는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처럼. 우리가 여행을 떠날 곳은 다름 아닌 종합병원이다. 말기암 환자에게 투여하는 진통제인 ‘모르핀’을 처방받고 주사 맞기 위해서는 입원을 해야만 했다. 단 조건이 하나 있었다. 입원은 하되, 매일 생방송 시간에 맞춰 외출을 허락해주겠다는 조건이었다.
우리는 이제 병원에서 방송국으로 출퇴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매일 밤마다 언니를 깨워 울부짖는 일은 줄어들 것이란 생각에 마음이 놓인다. 그동안 집에서 혼자 지내야 할 강아지 ‘코코 샤넬’양이 걱정스럽기만 하다. 언니가 분주하게 다녀가겠다는 약속을 하긴 했지만 그녀도 뭔가 우리의 새로운 움직임과 나의 아픔을 이미 눈치 채고 있는 것 같았다. 점점 야위어 가는 그녀의 얼굴과 눈동자에도 슬픔이 어려 있다.
드디어 오늘 나는 입원을 하게 되었다. 지독하게 싫은 병원 냄새를 맡아야 한다.
2004. 11. 23. 귀가
통증을 견디다 못해 입원한 병원에서 지낸 날들은 끔찍했던 날들이었다. 링거액에 직접 투입한 모르핀은 통증을 완전히 없애지도 못했고 나를 바보로 만들어버렸다. 병든 닭처럼 꼬박꼬박 졸기를 거듭하고 헛소리를 하거나 금방 누가 다녀갔고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게 했다. 발음은 이상하게 꼬였고 그 상태로 방송을 진행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생방송 4시간 전부터 주삿바늘을 빼내 모르핀 투여를 중지하고 통증을 견디며 먹으나마나 한 진통제를 복용해야 했다. 생방송을 마치면 다시 병실로 돌아와야 했고 그렇게 며칠을 보내는 사이 언니와 나는 더욱 지쳐갔다. 식사도 마음대로 할 수 없거니와 입원 기간 내내 병원 침대 위에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나는 휠체어에 앉아, 보호자용 의자를 다리 아래 놓고 있어야 했고 울며불며 1시간마다 통증을 호소해야 했으니 언니 역시 잠을 못 자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열린 음악회’ 녹화를 위한 리허설 도중 넘어져, 절대로 부러지면 안 된다고 의사가 경고했던 골반뼈의 나머지 부분이 골절되어, 나의 오른쪽 다리는 내출혈을 일으켰고 발가락 끝까지 부은 다리의 허벅지는 스모 선수 같았다. 그런 상황인데도 병원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다고 했다. 그저 모르핀 주사액을 혈관에 투여하는 방법밖에는.
퇴원을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새로운 각오가 생겼다. 종합병원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걸, 어쩌겠는가. 견뎌내야 한다는 각오뿐.
나는 이제 누워서 잠을 청하는 일을 포기했다. 각종 이불 등을 쌓아놓고 그 위에 엎드린 채 1~2시간을 보내다가 또 통증을 호소하며 언니를 부르면 언니는 병원에서 배워온 주사 놓는 방법으로 내게 진통주사액을 능숙하게 놓아준다.
이렇게 힘겨운 밤을 매일 보내고 있으면서도 방송을 하는 동안의 목소리는 날아갈 듯하니 나의 고통을 실감하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은 듯하다.
내겐 아주 중요한 오디오 북인 ‘책상은 책상이다’의 디자인 작업과 재킷완성 작업을 의뢰했는데 ‘세월아 네월아’다. 내게는 1년 같은 하루들을 기다림으로 지루하게 보낼 수밖에 없는 일이 한심하고 답답할 뿐이다. 제작비는 이미 다 건네졌고 성의만 있다면, 약속을 지킬 마음만 있다면 벌써 내 손에 쥐어졌어야 할 작품.
내가 직접 움직일 수만 있다면 쫓아가 밤을 지새며라도 디자인 작업을 마칠 각오인데. 내 몸의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이리도 답답하고 불편한 것이었다.

2004. 12. 6. 링거액 같은 빗방울
똑, 똑. 빗방울이 창문에 노크를 해댔다. 원래는 ‘눈’이어야 하는데. ‘대설’이라는 절기를 앞두고 ‘눈’ 대신 ‘비’가 찾아왔다.
날씨는 쌀쌀해져 가고 날이 가는 만큼 진통효과가 높은 모르핀으로 진통제의 수위는 올라가고 있다. 그 또한 며칠 내에 곧 내성이 생길 테고 또 더욱 용량이 높은 진통제로 약의 양은 늘어날 것이다. 그것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수용해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아직도 내가 미처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들이 몇 가지 있다.
얼마 전의 일이었다. 주차장은 넓었지만 그곳에서 어떤 행사가 열렸기 때문에 자동차를 댈 곳이 없어 전날부터 전전긍긍하던 참이었다. 미리 그곳에 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주차 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양해를 충분히 구해놓은 상태였다.
당일, 그곳에 도착해보니 미리 약속되어 있던 자리에 다른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고 더 이상의 주차 공간은 없었다. 워낙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기에는 불가능한 곳이어서 건물 관리인이며 행사 담당자들이 나서 그 자리에 주차되어 있던 자동차를 빼줄 것을 요청했었다. 그 사람은 차를 댈 때도 막무가내였다며 담당자들도 난감해하고 있었다.
10여 분의 실랑이가 있은 후, 드디어 누군가 자동차 키를 들고 내려와 시동을 걸었다. 그때 건물 위쪽으로부터 큰 소리가 들려왔다. “야! 차 빼지 마! 너 가만 안 둬!” 그 소리에 모두 위쪽을 쳐다보았다. 실제 차의 소유주라고 했다. 그리고 또 이어진 한 마디에 난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장애인이면 다야!”
그런 일이야, ‘성격이 좀 남다른 사람인가보다’라고 접어둘 수 있었지만 요 며칠 전 내 얘기가 방송되고 난 후 나는 또 다른 종류의 오해나 편견 때문에 울음을 삼키고 고개를 떨구며 외로워해야 했다.
“길은정이 말야, 진짜 아파? 쇼 하는 거 아니고? 아니,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웃어?”
“무언가 증명해 보여라. 그래야 내가 믿겠다”라는 뜻의 말은 이미 너무 오래 들어왔고, 게다가 거짓을 오히려 더 잘 믿는 현실과도 부딪혀왔었는데….
그래서 더욱 외로운 나는 오늘 찾아온 손님이 차라리 ‘눈’이기를 바랐다. 24시간 내 몸 속으로 투여되고 있는 모르핀 주사는 이미 오랫동안 내리는 지루한 장마 같기 때문이다.



2004. 12. 19. 길은정
내 이름은 길은정이다.그러나 사람들의 입을 통해 불릴 때는 기른정으로 불린다. 기른정….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길은정도 역시 좋아한다.길은정과 기른정. 그들은 무엇일까….나는 한 가지밖에 알지 못한다.그 안에는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다.

2005. 1. 3. 내가 좋아하는 블루
파랑이라는 색깔에서 파생된 색이라면 나는 그냥 좋다. 물론 ‘그냥’이라는 답은 없어서 깊이 생각하고 따지고 들어가 보면 좋아하는 이유를 알 수 있겠지만 지금은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한다. ‘그냥’이라고.
내게는 기타가 2대 있는데, 두 대 모두 원목 색깔 그대로를 살린 기타다. 물론 어쿠스틱은 원목의 빛깔과 나뭇결을 그대로 살린 기타 중에서 훨씬 더 좋은 기타를 찾기 쉽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파란색으로 칠을 한 기타를 갖고 싶었다.
마침, 국내 기타 제조회사인 ‘콜트(Cort)’에서 나만의 이니셜이 새겨진 파란색 기타를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해왔다. 나는 그분께 ‘정말이냐?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사실이냐?’고 수도 없이 물었고 너무 좋아 그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기도 했고 뱅글뱅글 돌기도 했었다. 나는 ‘록시’에서나 다른 공연 때 와이키키브라더스와 함께 무대에 서면 반드시 그 파란색 기타를 메고 파랑보다 더 싱그럽게 연주하고 노래하리라 마음먹었다.
그 약속은 막 여름이 시작되려는 시점에서 이루어졌고 불과 몇 개월 후 나는 걸을 수 없어졌고 휠체어에서만 생활할 수밖에 없어졌다. 이미 욕창까지 생겨버린 정도였다. 이젠 무대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일까, ‘열린 음악회’에서 노래를 불렀던 것을 빼곤 대중들 앞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 파란색 기타에 대해서도 잊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크리스마스라고 가슴 설레던 그날. 바로 크리스마스이브에 방송국으로 연락이 왔다. 그때 약속했던 기타가 다 만들어졌으니 가지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볼이 아리도록 추운 날. 달마팔자님(길은정 행복카페의 회원 닉네임)이 산타클로스처럼, 여성용으로 작고 예쁜 모양에 금색으로 영문 ‘길은정’이라는 이름을 새긴 파란색 기타를 들고 찾아오신 것이었다.
파란색으로 칠했지만 원목의 결을 그대로 살려, 얼마나 이 기타를 만드는 데 공을 들였는지 금방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정작 잊고 있었던 내 이름이 새겨진, 나만의 파란색 기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기타. 그 기타를 쓰다듬으며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만감이 교차하는 울음이었다.
잊지 않고 나만의 기타를 만들고 있었던 ‘콜트’ 기타 회사 직원들과 달마팔자님의 선의를 생각하니 그 어떤 말로도 고맙다는 표현을 대신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고맙다고 말하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한참 동안 기타를 쓰다듬다가 자리를 정리했다. 그대로 있다가는 날을 새도 모를 지경이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일찍 만들어졌다면 ‘열린 음악회’에 나갔을 때 연주할 수 있었을걸” 하고 아쉬운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 꺼내 보고 또 꺼내 보고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 소리를 내보고 줄을 맞추고…. 휠체어에 앉아 기타를 오래 안고 있기에는 무리한 일이었는데도 나는 그랬다. 그리고 나는 ‘길은정의 노래 하나 추억 둘 송년특집-라이브 우체국’을 생방송으로 진행할 때 그 파란색 기타로 ‘호텔 캘리포니아’를 연주했다.
기타 폭이 좁아, 휠체어에서 몸을 조금 앞으로 빼어 앉으면 연주할 수 있는 모델이라 나는 내 사랑을 흠뻑 담아 기타 줄을 퉁겼다. 행복한 2시간 동안의 생방송이 순간처럼 흘러갔다. 그렇게 파란색, 내 이름이 새겨진, 나만의 기타와 나는 하나가 된 듯했다.
아이처럼 자랑하고 싶어 자꾸만 꺼내어 보고 있다. 이젠 기타를 메고 앉을 무대도 없으면서.
요즘은 책을 읽기도 힘겹고 인터넷에서 오랫동안 글자를 읽고 쓰기도 어려워졌다. 의사의 말로는 암세포가 뇌로 옮겨가 시신경 어느 부분을 누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난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제 모든 것은 내 마음과 정신력에 달렸을 뿐 병원에서 내게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엄청난 말기암의 통증을 줄일 수 있는 ‘모르핀’ 주사를 놓아주고 역시 마약류로 분류되는 진통제를 처방해주는 일뿐이다.
내가 방송하는 목소리를 듣고는 정말 아픈 것 맞냐고 묻는 이도 있는걸. 이제 모든 것은 내 정신력에 달려 있고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덜 받도록 노력해야 할 텐데…. 내가 하는 일이 아닌, 남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어찌할 수 없기에 스트레스를 줄이는 일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것 같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파란색처럼 순수하고 맑으며 천재성이 빛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같은 사람.

여성동아 2005년 2월 4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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