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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유인경의 Happy Talk

새해에는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

2005. 01. 03

새해에는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

부족함과 약점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은 아름답다. 미국 명문대 박사 출신임에도 자신이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무식하다”고 표현하는 대학 교수, 남이 들으면 당혹스러울 수 있는 이혼 사실을 재치 있는 어투로 떳떳하게 밝히는 중년의 남성.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솔직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이 평소 주위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고 신뢰를 받는 이유도 바로 솔직함 때문이다. 그러나 솔직하기가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나 역시 젊은 시절엔 ‘아는 척, 있는 척’ 하느라 마음을 졸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솔직한 모습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깨닫게 된 뒤로는 무거운 가면을 벗을 수 있었다. 새해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도록 솔직해지면 좋겠다.
“여러분들께 더 멋진 곳에서 더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드려야 하는데 차린 것이 별로 없어 죄송합니다. 사실 제가 돈이 별로 없거든요. 전처랑 이혼해서 매달 아이들의 양육비를 보내줘야 하고, 재혼해서 낳은 여섯 살배기 아이를 키우려니 돈이 많이 들어가네요. 제가 바람을 피워 이혼했기 때문에 빈 몸으로 나와 지금 사는 집도 후져요.”
최근에 참가한 모임에서 주최 측인 중년 남성이 자신의 가정사를 솔직하게 밝히며 한 말이다. 초면인 사람들끼리 서로 당혹스러울 만한 이야기인데도 그는 농담처럼 가볍게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 덕분에 모두들 솔직한 대화를 나누면서 밥도 맛있게 먹고 술도 많이 마셨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품위 있는 척하는 사람들과 비싼 식사를 먹는 것보다 솔직한 이들과의 소박한 식사가 훨씬 속 편하고 즐거웠다.
자기 분야는 물론 다른 여러 분야에서 두루 존경받는 한 학자는 “당신에게 중독됐다”며 열광하는 팬들이 수두룩하다. 그가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비결 또한 솔직함이다.
“학창 시절에 너무 가난해서 고등학교 때부터 입주과외를 해 교양도서를 읽을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클래식 음악도 교과서에 나온 것 외엔 잘 몰라요. 대학 들어가서야 겨우 전문서적을 읽기 시작했죠. 그래서 독서를 많이 한 사람들을 보면 지금도 부러워요. 나도 알고 보면 굉장히 무식하거든요.”
미국 명문대 박사 출신에다 끊임없이 논문을 발표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무식하다”고 털어놓는 그의 솔직함이 멋져 보인다. 이처럼 인간적인 매력이 풍기는 사람, 다시 만나고 싶어지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바로 ‘솔직함’이다.
몰라도 아는 척 하느라 머리에 쥐가 날 뻔했던 20대의 나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빠르게 변하고 다양한 사건들로 가득한 요즘, 많은 사람들이 어지간한 일에는 충격도 받지 않는 것 같다. 또 마약을 했건 간통을 했건 죄인이라도 “잘못했습니다”라고 한마디만 하면 너그러이 용서해주는 것이 한국인의 습성이다.
그러나 거짓말을 했다가 탄로 난 사람들에게는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솔직하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것이 아니다. “충치가 많다, 치질수술을 했다” 등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자신의 과거사, 병력 등을 늘어놓는다거나 “저 사람 기분 나빠” “저것 먹고 싶어” 등 자신의 심리 상태를 생중계하는 것도 아니다. 바로 자신을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20대엔 나도 솔직하지 못했다. 외모며 조건이며 모든 것에 열등감 투성이었던 나는 남들이 나를 우습게 보거나 무시할 거란 생각에 참 아는 척을 잘 했다. 조금만 알아도 많이 아는 척 과장해서 말하고 누가 뭘 물어보면 절대로 “모른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누굴 아느냐”는 질문에는 “이름은 들어봤다”고 얼버무렸다. 책, 음악, 영화 등 문화 방면 역시 다 아는 척하느라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

그런데 정말로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한다는 사실을 사회인이 되어서야 알았다. 그리고 너무 완벽하고 잘난 사람보다는 적당히 모자라 보이는 사람에게 더욱 호감이 간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러면서 나 역시 무거운 가면을 조금씩 벗어던지고 솔직한 모습으로 타인 앞에 서게 된 것 같다.
완벽하고 잘난 사람보다 적당히 모자라 보이는 사람에게 호감 가져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직업이 기자이지만 그 분야는 문외한이어서요.” “그분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유명한 화가 맞으세요?” “아직 그 책은 안 읽었습니다. 한번 읽어보죠” “머리가 나빠서인지 난 아무리 읽어봐도 이 자료가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어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하게 얘기하자 어깨 위에 놓인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개운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가끔씩 자신의 약점을 재치 있는 말로 표현하는 것도 상대방에게 호감을 살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요리솜씨가 형편없어서 딸아이에게 자주 구박을 받아요” “팔이 짧아서 8부 소매를 입으면 딱 맞아요” “남편에게 단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못 들어 봤답니다” 등등.
이런 말을 하면 상대방은 날 한심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 서로 편안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잘 모르겠다, 잘 못한다, 이런 게 모자라다, 이래서 욕을 먹는다”고 다 털어놓고 나니 세상살이가 훨씬 쉬워졌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실망하는 이유는 그의 능력이 모자라서거나 그가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한 말이 거짓으로 드러났을 때, 그 사람의 행동에 신뢰가 안 갈 때, 자신이 한 말에 책임지지 않을 때 상대방에 대한 기대가 허물어지면서 더 이상 그와 만나기 싫어지는 것이다.
어떤 여성들은 ‘내숭 교육’이라도 받았는지 “어머머머, 술 못해요” “집안이 엄격해서 밤 10시 전엔 집에 꼭 들어가야 해요” “절대 얼굴에 손댄 거 아니에요” 등 오리발을 내밀다가 어느 순간 본색을 드러내면서 날이 밝아오는 줄도 모르고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술을 마시고, 잘못 건드린 코가 아프다며 난리법석을 떠는 경우가 있다. 괜히 공주인 척하려다가 무수리로 전락해버리는 순간이다.
새해엔 남녀노소 모두 자신을 포장할 필요 없이 솔직하고 자연스러워지면 좋겠다. 화려한 포장지 안의 텅 빈 상자보다는 소박하지만 속이 알찬 선물이 더욱 가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솔직하다 하더라도 내 몸무게만은 밝히지 못하겠다. 남들이 궁금해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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