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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진정한 예술가의 길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로 한길 걷는 러셀 셔먼·변화경 부부가 들려주는 음악교육법

“끊임없이 주변을 관찰하고 생각하는 훈련을 하도록 만드는 게 중요해요”

■ 기획·구미화 기자 ■ 글·백경선‘자유기고가’ ■ 사진·박해윤 기자

2004. 12. 01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러셀 셔먼이 아내 변화경 교수와 함께 최근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갔다. 스승과 제자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두 사람은 그동안 20대에 서울대 음대 교수가 된 피아니스트 백혜선 등 여러 한국인 제자를 키워냈다. 올해로 결혼 30주년을 맞은 부부를 만나 세계무대에서 인정받는 음악인을 양성하는 그들만의 독특한 음악교육법에 대해 들어보았다.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로 한길 걷는 러셀 셔먼·변화경 부부가 들려주는 음악교육법

‘건반의 사색가’라 불리며, 시적이고 품위 있는 연주와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유명한 뉴잉글랜드 음악원 석좌교수 러셀 셔먼(74). 한국인 최초로 미국 명문 음대인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가 된 변화경(57). 스승과 제자로 처음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지 어느덧 30년이 된 두 사람이 지난 10월17일 한국을 찾았다. 러셀 셔먼이 96년 미국에서 출간한 에세이 ‘피아노 이야기’를 아내의 나라 한국에서도 출간하게 된데다 서울, 부산, 대구에서 독주회를 연 것.
이번이 네 번째 한국 방문인 러셀 셔먼은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연주자로서뿐만 아니라 교육자로도 탁월한 그는 부인 변화경을 비롯해 20대에 서울대 음대 교수가 된 백혜선 등 여러 한국인 제자를 길러냈다. 윤회설이나 선불교에도 관심이 많다는 그는 “다음 생에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러셀 셔먼과 변화경 교수가 처음 만난 건 1970년. 그 무렵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뉴욕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변화경 교수가 러셀 셔먼에게 찾아간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음악적 의문을 풀기 전에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 그가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누구냐”고 묻자 주위 사람들이 당시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로 재직 중인 러셀 셔먼을 일러줬던 것.
무작정 찾아가 레슨을 청하는 한국인 여학생에게 러셀 셔먼은 음악과는 거리가 먼 엉뚱한 이야기들만 잔뜩 늘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곧 그의 용기와 진지함, 그리고 순수함에 끌려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러셀 셔먼은 당시를 회상하며 “제자로서 변화경은 고집 있는 학생이었다”고 말했다. 그 고집이 있었기에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그렇다면 스승과 제자로 만난 두 사람이 어떻게 부부의 연을 맺게 됐을까. 변화경 교수는 러셀 셔먼의 생일에 자신이 특별한 선물을 한 뒤로 두 사람 사이에 연애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한다.
“선생님 생일은 다가오는데 돈은 없고, 선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동양 자수를 잘했거든요. 그래서 한국에 계신 어머니께 예전에 제가 수놓은 봉황 자수를 2개 보내달라고 했어요. 거기다 솜을 넣어 쿠션으로 만들어 선생님께 드렸더니 무척 감동하시더라고요. 봉황을 가리키며 ‘이게 뭐냐’고 물으시기에 한국에서는 결혼을 상징하는 거라고 말했죠(웃음).”

15달러짜리 웨딩드레스 입고 시 10편 읽으며 둘만의 결혼식 올려
두 사람을 맺어준 봉황이 수놓인 쿠션은 지금도 보스턴 자택의 거실 소파에 있다고 한다. 레슨을 받으러 오는 학생들 대부분이 그 쿠션의 사연을 알고 있어 함부로 깔고 앉지 못하고, 가슴에 꼭 안는다고 말하는 변화경 교수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저는 원래 결혼하면 머리에 비녀 꽂고, 한옥에서 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정도로 보수적이었던 제가 미국 사람과 결혼한다는 거, 어휴~ 처음엔 생각도 못했죠.”
그러나 두 사람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피아노라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며 보통의 스승과 제자 사이 이상으로 가까워졌다. 그러다 변화경 교수가 첫 연주회를 열 때 러셀 셔먼이 찾아와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제의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급진전됐다. 워낙 제자가 많아 제자들의 연주회를 일일이 찾아다니지 않기로 유명한 러셀 셔먼이 변화경 교수의 연주회를 관람하고 저녁 식사 초대까지 한 건 획기적인 일이었던 것.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로 한길 걷는 러셀 셔먼·변화경 부부가 들려주는 음악교육법

올해로 결혼 30주년을 맞은 러셀 셔먼·변화경 교수 부부는 지난 5월, 미국에서 듀오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저는 사실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전 음악에 완전히 빠져 있는데 결혼을 하면 아무래도 여자가 많은 부분 희생해야할 테니까요. 그래서 아예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선생님으로부터 ‘결혼 안 해도 된다’는 말을 들으니까 이렇게 용기 있는 사람이라면 결혼을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러셀 셔먼은 변화경 교수에게 멋진 프러포즈를 하진 않았다고 한다. 다만 비자 만료 시기를 앞두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당신은 이제 곧 미국 시민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안심시켰다고. 하지만 국적이 다르고, 나이차가 열일곱 살이나 나는 두 사람의 결혼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특히 변화경 교수의 어머니가 결혼을 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결국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다.
“친구의 별장에서 음악도 없이 선생님과 제가 시 10편을 함께 읽으며 결혼했죠.”
15달러짜리 낡은 웨딩드레스를 구입해 해진 곳을 기워 입고 올린 결혼식을 변화경 교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결혼식은 비록 초라했지만 두 사람은 한 번도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결혼 후 변화경 교수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뉴잉글랜드 음악원의 교수가 되면서 두 사람은 부부교수가 됐다. 두 사람은 특히 백혜선 서울대 교수를 비롯해 박수진, 이미혜, 이미주, 박종화, 박종경, 손민수 등 여러 명의 뛰어난 한국인 피아니스트를 배출했다. 러셀 셔먼에게 한국인의 음악적 재능에 대해 묻자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한국 학생들은 도전정신이 강하고, 훈련을 잘 받았으며, 융통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느낌이 좋다고. 러셀 셔먼은 그러나 “갈수록 한국 학생들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 학생들의 상상력이 말라가고 있다”고 꼬집었다.
러셀 셔먼은 자신의 제자들이 고난이도의 기교를 연마하기보다 생각하는 연주,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독특한 연주를 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 연주는 단순한 기교가 아닌 세상과의 교감과 조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학생들이 무의식적으로 스승인 자신의 연주를 흉내낼 때 화를 벌컥 낸다고.
부조니와 쇤베르크의 제자였던 에드워드 스토이어먼을 11세 때부터 사사했던 러셀 셔먼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피아노가 아닌 인류학을 전공했다. 인문학적 기반 때문인지 그의 연주는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이와 함께 그에겐 ‘건반 위의 철학자’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문학·미술·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자기만의 음악 세계 만들어
“제 스승인 에드워드 스토이어먼은 셜록 홈스의 추리소설을 많이 읽으라고 권했습니다. 탐정이 사건의 단서를 찾듯이 세상 모든 것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조심스럽게 다루는 능력을 키우라는 이유에서였죠. 연주자도 그런 태도로 끊임없이 음악, 미술, 문학, 자연을 관찰해야 합니다. 연주는 세상과의 교감을 통한 다양한 경험을 반영해야 하니까요.”
러셀 셔먼은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같은 방식의 훈련을 요구한다. 끊임없이 주변을 관찰하고 생각하는 훈련을 위해 그는 학생들에게 회화의 명암에 관한 짧은 논문을 쓰라고도 하고, 화초를 사서 성장 주기를 살펴보라고도 한다. 또한 러시아의 찻주전자인 사모바르의 이미지에 대한 비유적 표현을 스물다섯 가지 써보라고도 했다.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로 한길 걷는 러셀 셔먼·변화경 부부가 들려주는 음악교육법

서로에게 배울 점이 많다고 말하는 두 사람은 앞으로도 창의력 있는 피아니스트를 양성하기 위해 애쓸 계획이다.


얼핏 피아노 연주 실력을 키우는 것과 전혀 상관 없어 보이지만 러셀 셔먼은 이를 통해 생각하는 훈련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생각의 유연성이야말로 음악에 생기를 불어넣어 피아노 연주가 기술이 아닌 예술 행위라는 것을 일깨워줄 수 있다고. 변화경 교수 역시 “음악에 스스로 입김을 불어넣어 자기만의 연주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것이 음을 틀리지 않게 짚어내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면서 학생들에게 “인스턴트 국물보다는 곰국 같은 음악을 만들라고 가르친다”고 말했다.
또한 러셀 셔먼은 훌륭한 피아니스트를 양성하는 데 부모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음악적으로 조숙한 아이들의 경우 진로를 정하고, 미래를 설계하고, 운명을 결정하는 사람은 부모이고, 그러한 부모의 영향력을 극복할 수 있는 교사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라고. 더욱이 그는 오랜 시간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피아니스트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부모가 자녀를 어떻게 인도하느냐에 따라 단순히 부모를 뿌듯하게 하기 위한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이 될 수도 있고, 우주를 이해하는 이상주의적인 계획을 품은 예비 예술가로 성장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러셀 셔먼은 피아니스트로서 또한 교육자로서 살아오면서 얻은 그간의 소중한 경험과 깊은 성찰들을 한데 모아 지난 96년 ‘피아노 이야기’라는 에세이를 펴냈다. 국내에는 지난 10월 중순 번역본이 처음 출간됐는데 그는 이 책에서 음악의 위대한 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특히 피아노 연주의 예술적·교육적 사명을 가로막는 오래된 인습들을 비판하고 있다.
러셀 셔먼은 ‘피아노 이야기’의 맨 앞장에 “내 아내 변화경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썼다. 아내를 향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 그는 아내가 없으면 자신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내는 무척 관대하고 누구에게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줍니다. 이런 사랑의 불꽃이 아내를 만나는 사람들을 변화시키죠. 저도 아내를 만난 행운으로 저만의 음악 세계를 무한히 넓혀 나갈 수 있었어요. 아내를 만나 연주에 있어 서정적인 부분, 음악에 대한 관대함이나 청중과의 교감 등을 새롭게 배웠습니다.”
변화경 역시 남편이자 스승인 셔먼에게서 음악에 모든 걸 바치는 예술가적 태도를 배웠다며, “선생님은 내 인생의 길잡이요, 빛과 같다”고 얘기한다.
두 사람 사이엔 자식이 없다. 아이가 있으면 둘 중 하나가 희생해야 되고, 그러면 음악에 모든 걸 바칠 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이를 낳지 않았다고 한다. “친자식은 없지만 수많은 제자들이 다 우리 자식들”이라며 웃는 그들이 풍요롭고 행복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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