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던 직장까지 때려치우고 4백8일 동안 22개 나라를 여행한 간 큰 부부가 있다. 서울대 동창생이기도 한 주하아린(30)·빈진향(30) 부부는 지난 2003년 3월7일 뉴질랜드를 시작으로 칠레, 브라질, 스위스, 모로코, 인도, 이집트 등을 거쳐 올해 4월14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누구나 어렸을 적부터 세계일주의 꿈을 막연히 갖게 마련인데, ‘막연한 꿈’이라고 해서 도전 못할 것도 없잖아요. 아내와 저는 ‘해보고 싶으니까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일단 저질렀어요.”
당시 주씨는 인터넷 회사 웹 기획자로 일하고 있었고 빈씨는 제약회사에 다니고 있었지만 둘만의 여행을 위해 과감히 사표를 제출했다.
“연애할 때 밤늦게까지 함께 놀다가 각자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싫어서 결혼을 했어도 맞벌이를 하다보니 오히려 연애할 때보다 서로 볼 수 있는 시간이 없더라고요. 주로 제가 야근이 많았는데 아내에게 미안했어요.”
빈씨 역시 남편과 저녁식사 한번 오붓하게 못하고 매일매일 이어지는 독수공방 신세가 짜증나 있던 상태였다.
“남편 얼굴 보기가 힘드니까 제가 남편 회사 회식자리까지 쫓아가서 함께 놀고 그랬어요.”
그러던 어느 날 빈씨는 방바닥에 누워 여행 에세이를 읽다가 남편에게 무심코 이런 말을 던졌다.
“자기야, 나 세계일주 한번 해보고 싶은데 같이 떠날래?”
아내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는 ‘삼돌이’ 체질의 모범 남편인 주씨는 빈씨보다 한 술 더 떴다.
“설마 여행 갔다 와서 굶기야 하겠어?”
의기투합한 부부는 일단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올랐다. 3개월간 뉴질랜드에 체류하며 어학연수를 했고 그곳에서 장기여행을 위한 각종 정보를 수집했다. 미리 디지털 카메라와 노트북을 준비해 여행을 하는 동안 여행지의 풍경과 감상을 각자의 인터넷 개인 홈페이지 좌린닷컴(www.zwarin.com)과 비니타임닷컴(www.beanytime.com)에 올렸다.
“둘 다 사진 찍기를 좋아해요. 대학시절에도 사진동아리에서 활동했을 정도로 사진에 관심이 많죠. 그런데 여행 초기에 카메라 두 개를 도둑맞았어요. 하나는 페루를 여행할 때 버스 안에서 날치기를 당했고, 다른 하나는 코스타리카 해변에서 누군가가 우리 가방을 몰래 들고 사라져버렸어요.”
모로코에선 여권위조범으로 몰려 3박4일간 유치장에 갇혀
그렇지만 ‘모로코 유치장 사건’에 비하면 카메라 분실은 ‘재난’ 축에 끼지도 못한다. 모로코 여행 도중 이들은 ‘여권위조범’으로 몰려 모로코 방문 첫날 경찰에 체포돼 유치장 신세까지 졌다.
“제 여권이 많이 낡아서 좀 찢어진 상태였는데 단지 그것만으로 저를 여권위조범으로 몰더라고요. 처음에는 영문도 모른 채 유치장으로 끌려가 하룻밤을 잤어요. 저랑 아내랑 둘 다 안경을 쓰는데 자살기도를 막기 위해 둘 다 안경을 벗게 하고 운동화 끈도 풀라고 하더군요.”
이때 빈씨는 유치장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운동화 끈을 풀면서 설움과 분노가 뒤섞인 울음을 터트렸다. 당시 상황을 그는 인터넷 개인 홈페이지 비니타임에 이렇게 남겼다.
대기업 웹디자이너와 약사란 직업을 포기하고 해외배낭 여행을 다녀온 빈진향·주하아린 부부.
‘퍼뜩 이곳이 경찰서가 아닌 인신매매 집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닉에 빠졌다. 나는 이성을 잃었다. ‘하아린아, 여기는 경찰서가 아닌 거야. 이건 정상적인 절차가 아니야. 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어리석은 줄 알면서 캠코더를 꺼내 들었다. 당장 제복 입은 한 명이 달려들어 빼앗았다. 내가 저항하며 돌려달라고 하니 무지막지한 손으로 내쳤다. 바닥으로 나동그라지면서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부끄러움 같은 것은 이미 생각할 수도 없는 감정이었다. 엉엉 소리내어 울면서 악을 썼다. 너무나,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결국 3박4일 동안 모로코 유치장과 법원을 오가며 여권위조범이 아님을 밝힌 두 사람은 스페인으로 가는 페리에 오르면서 악몽과도 같은 모로코 여행에서 벗어났다.
그런가 하면 칠레 북쪽의 한 마을을 여행할 때 주씨가 고산병에 걸려 앓아눕기도 했다.
“해발 4,000m가 넘는 화산지대였는데 해 뜨기 전 등반하려니까 좀 춥더라고요. 그때 기온이 영하 12℃ 정도 됐는데 발이 시려워서 추위를 이겨보려고 제자리 뛰기를 한참 했어요. 그랬더니 금세 숨이 막히고 몸살 기운이 느껴지더라고요. 원래 고산 지대는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어요.”
이렇게 도난사고, 유치장 사건, 질병 등 장기여행자가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일을 겪으면서 부부는 서로를 더욱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저희 부부의 공통점이 대책 없이 허술하고 낙천적이라는 점이에요. 어느 정도인가 하면 신혼여행을 갔을 때 시집에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남편이 자기 집 전화번호도 기억을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행하면서 보니까 성실한 면이 눈에 많이 띄었어요. 그날 찍은 사진은 그날그날 전자앨범에 정리하고 각종 장비 챙기는 것을 보니까 꽤 꼼꼼하더라고요.”
평소 한국에서 생활할 때는 주씨가 ‘밖에서 새는 바가지’였고, 빈씨가 ‘바가지에 담는 일’을 했는데 배낭여행을 할 때는 상황이 역전됐다고 한다.
“모로코 유치장 신세를 지면서 확연히 드러났어요. 저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면서 막 울기도 하고 돌출행동을 하다가 경찰한테 밀침을 당하고 그랬는데 남편은 시종일관 여유가 있더군요. ‘경찰차를 태워주니 차비가 안 들어서 좋다’는 둥, 유치장에 갇혀서도 코란을 외우는 사우디아라비아 사람을 상대로 반야심경을 외우고…. 남편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자타가 공인하는 ‘닭살커플’이지만 긴 여행 중에 부부싸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주로 코스 때문에 다툼이 많은데 저희는 그 반대였어요. 제가 어디를 가자고 해도 남편은 ‘아무 곳이나 상관없다’는 식이에요. 원래 ‘꼭 이것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는 사람이죠. 서로 이견이 없어서 불만이었다고 할까. 그래서 괜히 심심하면 사소한 일로 다투고 ‘여권 내놔. 나 혼자 간다’ 하면서 엄포를 놓았죠(웃음).”
훌쩍 여행을 떠나보고 또 여행지에서 많은 것을 보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인생의 활력소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이곳에 삶의 뿌리를 제대로 내릴 수 있느냐가 여행 이후의 숙제일 터. 4백8일간의 짧지 않은 여행 이후 이들의 삶은 과연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주말마다 홍대 앞 예술시장에 나가서 여행하면서 찍었던 사진들을 팔아요. ‘좌린과 비니의 세계여행 사진가게’라고 간판까지 내걸었는데, 잘 팔릴 때는 하루 30~40장도 팔아봤어요. 저희가 찍은 사진이 팔린다는 게 너무 신기해요.”
빈씨는 월급 약사로 취직한 터라 일요일에만 사진을 팔러 나오지만 주씨는 토·일요일에는 홍대 앞에서 평일엔 인사동에서 사진을 판다. 꼭 돈벌이만을 목적으로 사진판매를 하는 것은 아니다.
“남미를 여행할 때 보니까 아무리 못살아도 사진 몇 점은 꼭 집에 걸려 있더라고요. 좋은 사진을 사서 집 안을 장식하고 친구들과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일상화돼 있어요. 우리나라에도 그런 문화가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무슨 행사 때 ‘꽃다발’ 선물하는 것처럼 좋아하는 사진작가의 사진을 선물하는 것이죠.”
사진 선물도 꽃다발 선물만큼이나 낭만적이고 실용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 주씨의 주장인데 그에게 ‘사진’은 여러 가지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아마 사진이라는 ‘오작교’가 없었다면 이들 부부의 만남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10년 전 처음 만났는데 그때는 별 느낌이 없었어요. 저는 대학신문사에서 사진부기자로 일했고 아내는 사진동아리 소속이었는데 그냥 오다가다 서로 카메라 들고 있는 모습만 봤죠.”
별 감정이 없는 상태였지만 주씨가 우연히 빈씨의 술주정(?)을 듣고 먼저 색다른 감정을 갖게 됐다.
“한 선배가 농담처럼 ‘하아린이 찍은 사진 다 별로야’ 하고 말하는데 조용히 술만 마시고 있던 아내가 정색을 하더니 ‘하아린 사진이 얼마나 괜찮은데요. 그런 말씀하시면 안 되죠’ 하면서 제 사진을 두둔하더라고요. 기분이 상당히 좋았어요.”
이날 이후 주씨의 마음에 빈씨가 들어앉아버렸고 주씨는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빈씨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결혼을 전제로 한번 사귀어보자.”
이 무렵 인간관계에 지쳐 있던 빈씨는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편이었다. 그런데도 망설임 한번 없이 덜컥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제가 그때 술에 취해 있어서 그 말을 ‘우리, 결혼을 전제하지 말고 한번 사귀어보자’로 잘못 들었어요. ‘에라, 결혼 부담도 없고 잘됐다’ 싶어 흔쾌히 받아들였는데 나중에 서로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1년 6개월 남짓 ‘찐한’ 연애 기간을 거쳐 결혼에 골인한 두 사람은 아직 아기가 없다. 현재 아기보다 더 급한 것은 여행경비로 날린 4천만원을 복구하는 일이다.
“그동안 직장생활해서 번 돈을 다 여행경비로 썼으니까 또 열심히 벌려고요. 직장생활할 때는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빨리 갔는데, 좋아하는 여행을 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보내니까 하루하루가 정말 길게 느껴졌어요. 사람이 오래 산다는 것이 반드시 80세, 90세까지 산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아요. 아내와 함께 하루를 오래오래 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부부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에 대해 묻자 이들 부부는 이구동성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부부는 친구처럼 사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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