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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이 여자의 드라마틱 인생

간호보조원으로 독일 건너가 세계적 화가로 성공한 노은님

“낯선 이국땅에서 외로움 달래려고 그린 그림이 날 동화 속 주인공으로 바꿔놓았어요”

■ 글·이영래 ■ 사진·도서출판 샨티 제공

입력 2004.06.10 15:24:00

지난 1970년, 가난을 이기려고 간호보조원으로 독일 땅을 밟았던 한 여성이 함부르크 조형예술대 교수로, 세계적 화가로 성공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유럽 화단에서 ‘그림의 시인’으로 호평받는 노은님씨의 드라마틱한 삶.
간호보조원으로 독일 건너가 세계적 화가로 성공한 노은님

가수이자 화가인 조영남은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한민국 여류화가 중 둘을 꼽는다면 미국의 김원숙, 유럽의 노은님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고기, 새, 꽃을 주로 그려온 노은님씨(59)의 그림은 어찌 보면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단순미의 극치를 통해 달관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함부르크 알토나 성 요한니스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한 세계적 화가, 그리고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 교수라는 그의 프로필만을 보면 그가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유럽으로 미술 유학을 떠났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노은님은 ‘재독 유명 화가’라는 말로 설명될 수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는 1946년 전주에서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유년시절은 평화로웠지만 중학교 2학년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면서 모든 것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무려 12명이나 되는 식구가 남의 집을 떠도는 생활을 해야 했다. 방 한칸을 빌려 서로 포개진 채 자야 하는 생활.
“자다가 문득 일어나 천장을 봤어요. 혹시 이 낡은 집이 무너져서 우리 식구가 전부 깔려죽는 건 아닐까 불안했거든요. 누울 데가 없어 서로 포개져 있는 형제들을 보고, 또 부모님 얼굴을 한번 보고 나서야 다시 눈을 붙일 수 있었죠.”
방이 좁아 때로는 부엌에서 자기도 하고, 굿을 하고 남은 음식을 얻어다 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먹을 것이 부족한 집에선 형제만큼 미운 게 없다던가. 그에게 가족은 커다란 짐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수업료를 가져오라는 선생님들의 재촉에 학교 또한 지옥처럼 여겨졌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자애로운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스무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불행이 계속될지 모르는 암담한 삶이었다.
“유일하게 의지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모든 게 싫어졌어요. 형제 많은 집에서 치이고 사는 것도 지겹고 해서 어디든 가야겠다 생각했죠. 그래서 면서기로 취직해 경기도 포천으로 갔어요. 거기서 결핵관리 요원으로 한 5년간 일했죠.”
스물다섯이 되던 해, 그는 독일에서 일할 간호보조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외국에 나가는 게 좋아서, 또 돈을 많이 준다는 말에 솔깃해서 지원을 했고, 1970년 드디어 독일 땅을 밟았다.

돈 많이 준다는 말에 선뜻 독일 간호보조원 자원, 고된 생활과 향수병에 시달려
외국에 간다고 들떠서 돈까지 빌려 가방도 사고 옷도 한 벌 맞춰 입고 비행기를 탔지만 막상 도착한 독일 땅은 동경하던 곳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온 간호보조원 선발 기준 제 1항은 ‘튼튼한 사람’이었다. 힘은 셀지, 일은 잘할지, 요모조모 뜯어보는 시선들. 그것은 노예시장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처음 일하게 된 곳은 항구 근처의 시립외과병원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창녀촌이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환자들은 주로 외국인 선원, 창녀, 뱃사람, 술꾼, 거지들이었다. 노망든 노인들도 많았다. 음식도 입에 맞지 않는데, 일은 잠시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고되게 이어졌다.
“말 설고 물 선 외국생활이 오죽이나 외롭고 힘들었겠어요. 그래도 6개월 있으니까 귀가 트이고, 1년 있으니까 입이 트이더라고요. 하지만 어느 정도 적응하니까 이번에는 고향도 그립고 식구들도 그립고, 향수병이 생겼죠. 병원 일이 끝나면 답답한 마음을 달래느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맘대로 그린 유치한 그림이라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았죠.”

간호보조원으로 독일 건너가 세계적 화가로 성공한 노은님

집에 전화 한통 하면 한달치 방값이 없어지는 생활. 달리 소일거리도 없어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 그림들을 차곡차곡 침대 밑에 쌓아두었다. 그림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었고, 화가가 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회화의 기본 원칙보다 노은님 자신의 주관적인 욕망에 따라 그려진 그림들이었다. 어린 시절 개울에서 잡아 집 우물에 옮겨놓았던 물고기, 고향 들녘의 이름 모를 꽃, 담장 뒤켠에 둥지를 틀고 울던 새 등 그는 고향의 풍경을 화폭에 옮겨다 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감기에 걸려 병원에 결근하는 일이 생겼다. 그때 문병을 온 병원 간호부장이 우연히 방 안에 꽉 찬 그림을 보고 ‘그냥 두기 아깝다’며 병원 한쪽에서 전시회를 열어줬다.
그리고 한국에서 온 간호보조원이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연다는 소식이 독일 신문에 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전시회를 보러왔다. 그의 그림 한점이 제법 큰 돈에 팔리기도 했다.
“도대체 왜 제 그림을 그렇게 비싼 값으로 사가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어요. 그래서 수간호사한테, 병원장에게 물어봤죠. 이 돈 받아도 되냐고. 아마 날 동정해서 사주는 게 아닌가 싶었거든요. 원장이 그림값이니까 받아둬도 된다고 해서 받았어요. 그 돈은 받자마자 고향으로 부쳤죠.”
그의 그림솜씨는 점점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하라고 권했다. 그는 미대에 다니고 있던 한 간호사의 소개로 함부르크 미대의 티만 교수를 소개받았다.
티만 교수를 만난 것은 그에게 커다란 행운이었다. 미술을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이 없는 그는 처음에 다른 학생들이 그리는 것을 어깨너머로 배워 흉내내려고 했다. 그때 티만 교수가 말했다. “그림은 당신 맘대로 그리는 것”이라고.
담쟁이 이파리, 새 한마리…. 그렇게 마음대로 자신의 세계를 펼치며 그림을 그리다 보니 어느덧 졸업을 맞았다. 졸업 후에도 그는 독일에 남아 그림을 그렸다. 생활은 어렵기 그지없었다. 창문은 워낙 오래되어 제대로 닫히지 않았고, 벽과 바닥의 구석에는 용을 그려놓은 형상으로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먹고살 게 없어 다시 병원에 나가 일했다.

57세의 나이에 독일인 노총각 교수와 결혼, 숲 속의 그림같은 집에서 살아
집세 걱정을 하지 않고 살게 된 것은 대학강사 생활을 시작하면서였다. 그의 전시회를 보고 간 대학교수들이 추천해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한 것. 강사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 대학의 유화 교수 자리가 났고 그는 이 자리에 도전했다. 독일에서 이름깨나 알려진 화가는 죄다 응시했다.
면접관은 그에게 물었다. “우리 학교는 기초적인 것을 가르쳐야 하는데 당신의 그림은 모두가 뭉실거리니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가 대답했다. “이 학교 교수가 모두 다 그것을 가르치는데 왜 저까지 그 일을 해야 하죠?”
일년이 지난 후 그는 교수로 임용됐다. 86년에는 백남준, 요셉 보이스 등 세기의 거장들과 함께 ‘평화를 위한 전시회’에도 참가했다. 이를 계기로 백남준씨가 한국의 화랑 주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독일에 노은님이라고 그림 잘 그리는 여자가 있다’는 말을 했고, 노씨의 이름은 8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설치 작품은 국내에서도 볼 수 있는데, 서울 LG아트센터 지하도 연결 벽화, 강원도 원주시 문막 오크밸리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그의 작품이다.
유명 화가로 거듭나면서 그의 삶은 점차 풍족해졌다. 아홉명이 엉켜 살던 남의 집 문간방 생활, 곰팡이 가득한 독일에서의 자취생활은 이제 아득한 추억이 되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현재 ‘작은 로코코 성에서 동화 속 주인공처럼 산다’. 하이델베르크와 다름슈타트 중간에 있는 작고 아름다운 도시 미헬슈타트의 엘리자베스 성 안에는 8백년간 보존돼온 집들이 즐비하다. 그는 물이 흐르는 숲 속에 감춰진 운치있는 3층집을 35년간 빌렸다.

간호보조원으로 독일 건너가 세계적 화가로 성공한 노은님

최근 한국을 찾은 노은님씨는 어린이, 학부모들에게 창의적인 미술교육에 대해 강의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큰 변화가 있었다. 그의 나이 쉰일곱살이 되던 지난 2002년 결혼한 것. 그의 남편 게하르트는 같은 대학에서 미학사를 가르치는 동료교수로 그또한 결혼 당시 59세의 노총각이었다.
“남편은 평생 책만 읽으며 살아온 사람인데, 천성이 저와 비슷해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람이었어요. 남편 말로는 자기가 예순살이 되기 전에 제가 구원해준 거라고 하는데, 사실 저 또한 구원을 받았죠(웃음). 워낙 늦은 결혼이라 결혼식은 화려하게 치르지 않았어요.”
두 사람은 인도 동해안의 말레디벤 섬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틈만 나면 세계 곳곳을 여행한다고 한다.
최근 자전 에세이 ‘내 짐은 내 날개다’를 펴낸 그는 “인생의 고난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다”며 그 감회를 이렇게 표현했다.
‘벌을 받는 기분으로 많은 고통의 시간들을 보내왔다. 고통 속에서 내가 바란 것은, 이 고통이 그냥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것뿐이었다. 부잣집 딸도 아니고, 나이도 다른 학생들보다 한참 많은 스물여덟에 시작한 그림을 붙들고 ‘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하는 물음 속에서 괴로워했다. …남들은 다들 남자친구가 있어 사랑을 받고, 성격도 밝아 아무하고나 잘 어울리고, 돈 걱정도 없고, 나처럼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나 하는 걱정도 없이 지내는 것 같은데, 나는 그 어느 것 하나 해결된 것이 없었다. 내게는 봄도 지루하고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앉으니 내 앞에 있던 큰 담벼락이 갑자기 내 뒤로 가 있고 내 앞은 텅 비어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 오랜 세월을 나는 담벼락 아래에 앉아 높은 담벼락만 쳐다보며 벽을 더 높이 쌓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산이나 혹은 흐르는 물 같다. 공기처럼 가벼움을 느끼며 끝없이 땅과 하늘 사이를 떠도는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짐은 내 날개였던 것이다.’

여성동아 2004년 6월 4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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