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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만나고 싶었습니다

사랑의 환상 주제로 한 장편소설 펴낸 작가 김형경

“여자는 사랑을 ‘불후의 명작’으로 믿지만 남자는 ‘읽고 버리는 잡지’로 여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 글·박윤희 ■ 사진·김형우 기자

2004. 05. 10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의 작가 김형경이 새 장편소설 ‘성에’를 펴냈다. ‘성에’는 이전 작품과 달리 성(性) 묘사가 대담해졌다는 게 특징. 사랑의 환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그를 만났다.

사랑의 환상 주제로 한 장편소설 펴낸 작가 김형경

“저산이 정발산이에요. 산이라고 해도 되나(웃음), 정발산은 해발 90m도 채 안 되거든요. 이 소설에 완전히 집중해 있던 지난 2년 동안 거의 매일 저 산에 올랐어요.”
새 장편소설 ‘성에’를 펴낸 소설가 김형경씨(44)를 경기도 고양시 일산 호수공원에서 만났다. 보통 작가를 만나면 손을 유심히 보게 되는데 이번 경우는 달랐다. 유독 그의 발에, 걸음걸이에 눈길이 갔다. 어딘지 모르게 장편소설 ‘성에’의 문체가 그의 걸음걸이와 닮아보였기 때문이다. 공간을 가르는 절도있는 보폭, 일정한 속도, 단검으로 급소를 찌르는 듯한 구두 뒤축의 묘한 마찰음까지….
공들여 쓴 문장의 마침표를 찍듯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호숫가를 걷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정발산에 눈길을 오래 준다.
“나즈막한 동네 뒷산이지만, 문학적 과장을 조금 섞는다면, 저 산도 우주를 품고 있어요. 산은 생명체가 성장하고 열매 맺고 소멸하는 과정에서 우주적인 비의(悲意)를 보여주죠. 그래서 자주 걸음을 멈춘 채 오감을 열고 산의 마음을 느껴보려 애썼어요. 이번 소설은 아무래도 저 산의 창조성을 조금 빌려온 것도 같아요.”
땅이 햇빛과 빗물을 받아 제 몸속의 온갖 에너지로 봉숭아나 맨드라미를 길러낸다면 그는 발을 통해 땅속의 고농축 에너지를 흡수해 김형경 고유의 유전자를 복제해냈다. 장편소설 ‘성에’는 그만큼 생명 에너지가 넘쳐난다. 그렇다고 ‘성에’를 생태소설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무덤 속 섹스의 향연이라고 해야 할까. 도발이라면 도발이고 엽기라면 엽기다.
“1960년대 중반에 ‘모가지를 내놓고’ 군사분계선을 넘은 귀순자가 있는데, 그의 귀순 동기가 세계일주였다고 해요. 10년 전쯤 친구로부터 이 귀순자 이야기를 듣고 오랫동안 소설을 구상해왔어요. 한마디로 ‘성에’는 ‘환상’에 관한 소설이에요.”
2년 동안 매일 산에 오르며 ‘성에’ 집필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은 연희와 세중, 사내, 남자, 여자다. 소설은 10년 전 옛사랑 세중을 떠올리는 연희의 회상에서 시작된다. 연희는 ‘기이한 옛사랑’을 가슴에 묻고사는 평범한 주부. 어느날 밤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너는 그런 사랑이란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겠지. 나도 알아. 환상 때문에 현실의 삶을 망치지도 않았고. 아들은 잘 커서 올해 중학교에 들어갔고 남편은 늘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출근해. 그렇지만 가족이 잠든 시간에 혼자 깨어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있어. 남편과 사랑을 나누다가 서늘하게 도취가 식어내리는 지점, 가족과 식사하다가 바람부는 거리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때가 있어. 내 힘으로는 통제되지 않는 그 지점들에 늘 그 사람이 있었어.’(‘성에’ 중에서)
이런 친구의 ‘환상 속 사랑’을 곱씹어보던 연희는 ‘친구의 말에 되비치는 자신의 내면’ 때문에 갈등하다 옛사랑 세중에게 전화를 걸고, 둘은 재회한다. 여기서 소설은 연희와 세중이 기이한 사랑과 과도한 섹스를 나누었던 과거의 한 공간, 폭설이 쏟아져 외부와 차단된 강원도 숲속 외딴집으로 시계를 되돌린다.
과거 직장동료였던 두 사람은 각자 결혼을 약속한 상대가 있었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 돌발여행을 떠나게 되고 예정된 것처럼 산속에서 길을 잃는다. 밤새 숲속을 헤매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무덤과도 같은 빈 집. 이 곳에서 ‘사내’ ‘남자’ ‘여자’로 불리는 세 구의 시체를 발견하고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인다.
공포감에 짓눌린 이들이 할 수 있는 행위는 죽음을 흉내내는 일이다. 두 사람은 섹스라는 행위를 통해 생명을 낭비한다. 그래서 공포에 압사당하지 않고 살아남기를 도모한다.

이색적인 것은 참나무, 박새, 청설모 등의 ‘생물화자’와 바람 같은 ‘무생물화자’가 소설 중간 중간에 등장해 죽음에 대한 주요 대목을 풀어나간다는 것이다. 생물화자 및 무생물화자의 등장으로 ‘성에’는 일면 실험소설의 성격을 띠면서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독자가 잠시나마 다른 ‘종’이 되어서 인간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환상 주제로 한 장편소설 펴낸 작가 김형경

김형경은 세계여행을 하기 위해 군사분계선을 넘었다는 귀순자 이야기가 ‘성에’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말했다.


소설 속 생물화자의 등장이 작품의 활기를 더해주는 까닭은 생물의 짝짓기에서 인간의 짝짓기에 이르기까지 그만의 ‘필터’를 통해 여과된 동물학, 사회생물학, 인류학적 지식과 감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 생물학 관련 책읽기를 즐기는데 그의 서재에 꽂힌 생물학 관련 책만 해도 어림잡아 2백 권이 넘는다. 게다가 특유의 장인 기질도 소설을 풍요롭게 만드는 요소다.
“매일 산에 가면 이것저것 유심히 관찰해요. 나무도 보고 청설모가 도토리 갉아먹는 것도 한참 쳐다보죠. 항상 산에 갈 때 운동복 바지 주머니에 A4 용지를 손바닥만하게 접고 그 사이에 볼펜을 끼워가는데, 산길을 걷다가 뭔가 떠오르면 끊임없이 메모를 하는 습관이 있어요.”
어쩌면 아름드리 참나무의 ‘꿈’과 ‘환상’을 키웠을 법한 한알의 도토리가 청설모의 입에서 무참히 박살나는 과정을 지켜볼 때, 그의 머리 속에는 과연 어떤 생각이 스쳤을까. 그의 예리한 눈은 생태계의 먹이사슬 속에 감춰진 ‘자연의 관능미’를 날렵하게 포착해 소설에 살을 보태주고 있다.
소설 ‘성에’에는 성에(추운날 유리에 수증기가 얼어붙은 얼음조각)에 관한 묘사가 어느 한 장면도 없다. 다만 ‘성애(性愛)’가 나올 뿐이다. 그가 유리창에 생겼다 사라지는 성에와 성애가 발음이 비슷하고 둘 다 ‘사랑의 환상’을 내포하고 있다는 계산에서 제목을 정했기 때문이다.
세 구의 시체가 차례로 발견될 때마다 벌어지는 연희와 세중의 성애 장면을 묘사하는데 있어서도 그 어떤 억압이나 내숭이 없다.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인간, 종족보존의 행위에서 드러나는 자연의 관능미를 드러낼 뿐이다.
“예전에 성에 관한 장면을 묘사할 때는 괜히 부끄러워서 ‘이렇게 써도 되나?’ 싶은 ‘자기검열’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이 작품 쓸 때는 그런 억압이 거의 없었어요. ‘어디 한번 성 묘사의 극대까지 가보자는 심정이었죠. 제가 많이 성숙해졌어요. 이젠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요.”
이런 성숙의 계기를 그는 ‘정신분석’에서 찾는다. 30대 후반 무렵, 그는 몸과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한다. 몸의 특정 부위가 아픈 것도, 뚜렷한 병명이 있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오래 앓았다고 하는데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제2의 사춘기’쯤 된다.
“그때 정신분석을 받고 해외여행을 하면서 제가 많이 성숙해진 것 같아요. 정신분석을 받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잘한 일 같아요. 상처는 치유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에 대처하고 통제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생겨서 세상을 살아가는 게 훨씬 더 편해졌어요. 모든 사람들이 꼭 정신분석을 받아보면 좋겠어요. 인생에 도움이 되거든요.”
그의 전작 소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전2권)’이 정신분석 보고서의 성격을 띠는 것도 이런 그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거칠게 말하면 ‘사랑을 선택하는…’은 읽다가 미쳐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들 정도로 치열한 소설이다. 그만큼 작가의 개인적 고통이 반영되어 있다는 뜻이고 설득력과 흡인력이 있다.

“일부일처제도 가부장제도 다 ‘환상’일 뿐”
이에 비해 ‘성에’는 한결 부드러운 느낌을 주면서도 금속처럼 단단한 과실을 연상하게 한다. 그는 이 과실을 동시대인, 특히 여성들의 정서를 어루만져주는 약으로 처방하는데 어쩌면 ‘금단의 열매’가 될지도 모른다. 여성들이 먹고 이 사회가 걸어놓은 최면에서 깨어날 수 있는 그런 열매. 그래서일까? 이 과실을 맛본 대부분의 남성 독자들은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남성 독자들은 불편해해요. 자신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밝혀냈으니까. 저야 그렇게 불편해하는 모습 보면 고소하죠.”
요즘 유행하는 대중가요 가운데는 ‘우리가 정말 사랑하긴 했을까?’하고 의문을 던지는 내용의 노래가 많다. 누구나 옛사랑을 떠올리면 이런 류의 몽환적인 감상에 빠져들게 마련인데 ‘성에’는 이 질문에 대한 답과 새로운 고민, 대안을 던져 준다. 특히 여성들은 자기가 만들어놓은 환상에 빠져 사랑에 속지 말라는 것. 남녀가 똑같이 사랑과 섹스를 해도 대부분의 여성들은 평생 가슴에 안고 가야 할 ‘불후의 명작’이라 착각하고, 남성들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폐기처분해야 할 ‘주간지’ ‘월간지’ 쯤으로 여기는 데다 ‘동시구독’까지 한다는 점을 연희와 세중을 통해 보여준다.
소설 말미에 다시 현재로 돌아온 연희는 세중과의 재회를 통해 그동안 품어온 사랑이 ‘환상’이었음을 깨닫고 마음속으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환상없이 살 수 있는가?’
작가는 ‘생의 모든 국면이 환상임을 알았을 때 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를 독자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환상 주제로 한 장편소설 펴낸 작가 김형경

‘성에’는 독특하게 새, 나무 등이 화자로 등장해 주요 사건을 풀어간다.


“가부장제도 환상이고 일부일처제도 환상이잖아요. 여성들이 남성들한테 의존하지 않는 자신들만의 주체적인 삶을 향유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 여성들은 자기 존중감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자기가치’는 남이 아니라 자기가 결정하는 거니까 여성들이 스스로 존중감을 많이 가졌으면 해요.”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 이 세상에서 자신을 최고로 사랑해주는 존재 역시 자신이다. 따라서 사랑, 섹스, 결혼도 자기가치를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통제하고 조절하라는 것이 그의 주문이다.
“정말 똑똑하고 괜찮은 여자친구가 남자 때문에 ‘폐인’이 되다시피한 경우를 많이 봤어요. 남자가 사랑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그 속성을 알면 그럴 필요가 없는데 자기 환상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는 거죠.”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물아홉 살에 누군가를 아주 좋아했는데 석달 만에 깨졌어요. 하루도 안 빼고 거의 매일 만났는데 제가 채였어요. 꼬박 3년을 괴로워했죠. 왜 채였나 생각해보니 ‘스킨십’ 때문이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여성성에 대해 부정하고 남성이 되고 싶었으니까 스킨십에 대한 거부반응이 있었나봐요. 등산할 때 남자친구가 손을 잡자고 해도 거절했거든요.”
그는 30대부터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했고 ‘제2의 사춘기’를 정신분석과 여행을 통해 잘 극복하면서 40대 중반에 다다른 지금은 “아주 편안한 상태에서 사랑을 잘 통제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인다. ‘사랑은 한 사람에게 목매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성 원리에 따라 감정을 잘 통제하는 것’이라는 그의 말끝에 결혼에 대한 생각을 물어 보았다.
“혼자여서 좋은 게 너무 많죠(웃음). 30대 후반 무렵 결혼하는 것은 싫고 아기만 갖고 싶어서 ‘싱글 마더’가 되어볼 생각도 했어요. 외국에는 자발적인 싱글 마더가 많잖아요.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호주제를 비롯해서 여러가지가 힘들다며 주변사람들이 말리더군요. 태어날 아이에게 좋지 않다고. 우리나라에서는 독신이 아이 입양하는 것도 힘들어요. 이제 출산은 포기했고 쉰 살 넘어서나 친구 같은 남편을 만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해요.”



쉰 살 넘어 친구 같은 남편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중
요즘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즐거움에 빠지도록 한 연애 대상이 있다. ‘달리기’다. 그 스스로 ‘운동 전도사’라고 칭할 만큼 운동에 매료된 상태다.
“예전에는 매일 1만보씩 걷기 운동을 했는데 요즘은 달리기를 해요. 걷기도 건강에 좋았는데 달리기도 정말 몸에 좋더군요. 운동한 다음날 작업능률이 팍팍 오르니까 매일 거르지 않고 달리게 돼요. 체력에서 글이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운동하라’고 말해요.”
달리기도 단순히 몸을 위해서가 아니라 글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그를 보니 천상 작가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는 30대 무렵만 해도 하루 15시간씩 꼬박 책상 앞에 앉아 글쓰기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를 확실한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이자 제 1회 국민일보 문학상을 받게 한 장편소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를 불과 석 달만에 탈고했다고 하니 글쓰기에 대한 그의 집념과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가 30대 후반에 큰 병이 난 이유도 불과 석 달, 넉 달만에 장편소설을 탈고하던 작업방식과 무관하지 않은 듯했다.
“병이 나보니까 몸이 소중한 줄 알겠어요. 군것질을 좋아했는데 꾹 참고 집에서 직접 요리해서 하루 세끼 꼬박꼬박 챙겨먹고 글쓰기도 하루 6시간 정도만 해요.”
마지막으로 그에게 장편소설 ‘성에’ 등장인물 가운데 누구처럼 살고 싶은지 질문해보았다.
“탈속한 ‘바람’처럼 살고 싶기도 하지만 ‘여자’처럼 살고 싶어요. 그 여자가 ‘사내’ ‘남자’와 실험한 ‘일처다부제’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여자 자체가 하나의 ‘산’이고 ‘자연’이기 때문이죠.”
일곱살에서 천살의 나이를 넘나드는 것 같은 작가 김형경. 그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자의 몸과 정신에 나이테가 늘어가는 것이 꽤 멋지다는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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