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세계 각지를 돌며 활발한 연주활동을 펴고 있는 안트리오. 쌍둥이 마리아(35·첼로)와 루시아(35·피아노), 그리고 막내 안젤라(33·바이올린)로 이뤄진 안트리오는 파격적인 옷차림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대신 몸에 딱붙는 가죽바지, 탱크톱, 히피풍의 랩스커트 등 발랄한 평상복을 입고 무대에 오른다. 또 남다른 패션감각을 지녀 갭과 앤클라인, 보디숍의 모델로 활동했고, 세계적인 패션잡지 ‘보그’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들의 유명세가 튀는 옷차림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87년 미국 ‘타임’지가 커버스토리를 통해 ‘아시아의 새로운 신동들’로 소개하며 일찍이 음악성을 인정받았고, 98년에 EMI에서 발매한 첫 음반으로 독일 최고의 음반상인 ‘에코상’을 수상했다. 2000년에는 LA타임스가 선정한 ‘새천년 가장 주목할 연주자’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해 미국 대중문화잡지 ‘피플’이 뽑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 음악인 부문에 당당히 이름을 올려 다시 한번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같은 고전음악부터 난해하다고 평가받는 현대음악까지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는 연주실력으로 늘 청중들을 몰고다니는 안트리오는 음악성 못지않게 품성이 바르기로도 명성이 높다. 세 자매의 모교인 줄리어드음대에서는 실기만이 아니라 인성교육의 성공사례로 안트리오를 꼽는다고 한다. 또한 장영주의 어머니가 미국에서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을 때도 안트리오가 끝까지 남아 설거지를 했다는 이야기는 음악인들 사이에 유명한 일화로 통한다.
이렇듯 아름다운 세 자매 뒤에는 “세 딸을 연주자가 아니라 온전한 인간으로 키웠다”고 자부하는 어머니 이영주씨(59)가 있다. 현재 미국 뉴저지에 머물고 있는 이씨는 결혼 전까지 신문기자로 일했으며 90년 문학잡지 ‘한국수필’을 통해 뒤늦게 수필가로 등단했다. 최근 미국생활과 유럽여행, 세 딸에 대한 애정 등을 담은 세번째 수필집 ‘내 인생의 삼중주’를 펴낸 그가 딸들과 함께 고국을 방문했다.
지난 3월말에 만난 그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감히 ‘귀엽다’는 표현밖에 달리 적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해맑은 웃음과 톡톡 튀는 말투로 대화를 이끌어갔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고 하자 “내 동년배들과 비교하는 건 나를 두 번 죽이는 일이죠. 난 아직도 섹시하고 날씬해보이고 싶은데(웃음)” 하고 최신 유행어를 사용하며 말했다. 개성있는 패션과 연주로 사랑받는 안트리오의 톡톡 튀는 감각이 어머니의 열정과 활기에서 비롯됐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클래식 음악 들려주고 미술관 음악회 데리고 다녀
톡톡 튀는 감각이 꼭 닮은 안트리오와 어머니 이영주씨.
고등학생 때부터 문학적 감수성이 남달랐다는 그는 아이들을 소설 속 주인공처럼 사랑스러운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고 한다. 때문에 클래식 음악이 아이의 정서를 순화시키고 두뇌를 좋게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늘 집안에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았다. 그리고 신문이나 잡지에서 좋은 글을 발견하거나 책을 읽다가 아름다운 구절이 나오면 아이들에게 소리내어 읽어주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안트리오는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해 지금도 여행가방을 쌀 때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이 책이라고.
그는 또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음악회, 전시회 등에 데리고 다녔다.
“기저귀 찬 아이 셋을 데리고 미술 전시회며 음악회에 다녔어요. 물론 아이들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다양한 분야에 대한 소양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제가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더군다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 때라 아이들을 데리고 나간다고 해야 외출하는 게 수월했어요. 그래서 아이들을 줄줄이 데리고 다닐 수밖에 없었죠(웃음).”
누구를 위해서든 어려서부터 각종 예술작품에 노출된 안트리오는 어려서부터 음악 외에 미술과 문학 분야에서도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첫째 마리아는 그림솜씨가 뛰어나 엄마의 수필집 ‘내 인생의 삼중주’ 표지와 목차에 그림을 그려넣었을 정도. 둘째 루시아 역시 마리아와 함께 학창시절 교내 사생대회 1, 2 등을 다투곤 했는데 지금도 패션과 인테리어 디자인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막내 안젤라는 엄마를 닮았는지 글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그렇다고 그와 세 딸이 여유있게 문화생활을 즐길 만큼 넉넉한 생활만 한 것은 아니다. 안트리오가 연주복 대신 평상복을 입고 무대에 오르기 시작한 것도 사실 드레스를 구입할 형편이 못 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씨는 81년, 출판업계에 종사하는 남편과 헤어지고 혼자서 9세, 11세이던 딸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 이국땅에서 그는 혼자 세탁소를 운영하며 세 딸을 키웠다.
“전 희생이라는 말이 참 싫어요. 희생을 전혀 안 했다고 말하는 것도 어패가 있지만 어떤 남자도 그렇게 사랑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숨이 끊어질 것처럼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그래서 제가 흘린 눈물이 허드슨강을 흘러넘칠 정도라고 얘기하곤 하지만 그래도 전 정말 행복했어요. 아이들이 밝게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며 희열을 느꼈죠. 저 한 사람이 희생하면 그 3배의 보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힘든 시간을 이겨냈답니다.”
기름 때묻은 작업복은 물론 남의 양말과 속옷을 빨며 하루에도 열두 번 비참함을 느끼고 눈물을 삼켜야 했지만 그는 그때마다 ‘제가 이 옷을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게 빨 테니 하나님은 제 영혼을 깨끗하게 씻어주세요. 제 아이들이 연습하기 싫어할 때마다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렇게 비참한 기분을 떨쳐내고는 예술작품을 만드는 듯한 기분으로 일을 했다고.
“옷들을 깨끗하게 빨아서 주름 하나 없이 다린 뒤에 색깔별로 차곡차곡 선반에 개켜두면 손님들이 와서 깜짝 놀라요. 제가 손질해놓은 옷을 가져다입는 게 죄를 짓는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어요(웃음).”
무미건조하지 않고 맛있게, 아기자기하고 재미있게 살고 싶었던 그는 사소한 일까지도 예쁘고 아름답게 처리했는데 그런 점이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했다.
“지금껏 과일 하나를 사더라도 찌그러진 것을 산 적이 없어요. 돈이 없어 하나를 사더라도 가장 예쁜 거, 색깔이 고운 것으로 골랐죠.”
“과일 하나를 사도 가장 예쁘고 색깔이 고운 걸로 골랐어요”
안트리오와 그의 어머니 이영주씨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소재가 바로 음식이다. 이씨는 음식솜씨가 뛰어난 것으로 소문이 자자한데 그에겐 음식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 있다.
“저는 엄마가 해준 음식을 먹고 자란 아이는 절대로 문제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에게 음식을 해준다는 것은 엄마가 아이들에게 시간과 정성을 쏟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엄마가 늘 사랑으로 그렇게 보살펴주는 아이는 문제아가 될 수 없거든요.”
때문에 그의 집엔 늘 케이크와 과자굽는 냄새가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식사를 직접 만들어먹인 것은 물론 딸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인스턴트 식품이나 패스트푸드를 먹여본 적이 없다고. 혼자서 밤늦은 시각까지 가게 일을 하고도 새벽 3시면 눈을 떠 김밥을 싸고 과일을 예쁘게 담아 공연연습 때문에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는 아이들에게 갖다주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는 또 먹는 일도 교육의 연장이라고 생각해 영양소는 물론 음식 색깔까지 조화를 맞춰 식탁을 차리고, 과일도 모양껏 예쁘게 깎아 내놓았다고. 생활 속의 작은 일 하나도 음악을 하는 딸들의 예술적 안목을 키우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음악을 공부한 적이 없는 그가 세 딸을 과외 레슨 한번 시키지 않고 줄리어드 대학원까지 보낼 수 있었던 건 음악을 하는 세 딸들을 음악이 아닌 음식으로 다뤘기 때문이다. 지금은 누구였는지도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 한 음악가로부터 “하루 3시간만 집중해서 악기를 연습하면 세계적인 연주자가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이 3시간동안 집중해서 연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법을 고심하던 그가 내린 결론은 맛있고 예쁜 음식으로 아이들을 기분좋게 만드는 것이었다.
혼자서 세 딸을 키운 안씨는 남은 인생을 보석 다듬듯 소중하게 쓰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때때로 연습을 소홀히 하는 아이들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아이들에게서 악기를 빼앗고 그만두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와 자식간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화해와 칭찬”이라고 강조한다. 사소한 일도 크게 과장해서 칭찬해주고, ‘이 다음에 크면 무지무지 훌륭한 어른이 될 것’이라고, ‘이 세상에서 최고가 될 것’이라고 띄워주었다고. 그 뒤로 세 자매는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굳게 믿기 시작했다. 지금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넘치는 개성과 자신감은 어머니의 끊임없는 칭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릴 때는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어요. 세계 이곳저곳으로 연주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팩스를 통해 늘 연락을 주고받았고, 지금은 휴대전화로 이야기를 나눠요. 그래서 우리 모녀 사이엔 지금도 비밀이 없죠.”
세 자매는 엄마와 비밀 하나없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누구보다 개성이 강한 독립적인 개인으로 성장했다. 세 자매는 엄마 이영주씨가 스스로 보고 느끼고, 체험하도록 자유를 주고 믿어준 것이 자신들의 성공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존중해주고, ‘절대로 안 된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는 엄마 덕분에 자신들이 각자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독립적인 사람이 됐다고. 안트리오는 줄리어드 음대에 입학하던 87년 독립해 현재 같은 뉴욕에 있으면서도 따로 살고 있다.
안트리오는 클래식 음악을 대중화할 수 있다면 공연규모를 가리지 않고 무대에 올라 최고의 연주를 들려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들은 미국에서 초·중·고교 오케스트라 단원들이나 밴드부원들과도 잦은 만남을 갖고 워크숍을 하는데 클래식 음악을 살리겠다는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때문에 정통 클래식을 연주하는 안트리오 공연엔 늘 젊은 관객들이 몰린다.
아이를 시대에 맞는 사람으로 키우려면 엄마도 끊임없이 공부해야
“제가 아이들에게 음악을 시킨 건 콩쿠르에 나가 1등을 하라는 뜻이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였죠. 그래서인지 우리 아이들은 남에 대해 나쁘게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세상엔 천재적인 연주자들도 많고, 예쁜 사람들도 많고, 그들과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할텐데 매번 상대를 의식하다간 자신들이 견뎌내지 못할 거라며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처음 미국으로 건너갈 때 초등학생이었던 안트리오도 나이 서른을 훌쩍 넘겼다. 그는 딸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수다떠는 것을 즐기지만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드물다고 말한다. 네 사람이 좋아하는 영화나 책 이야기로도 시간이 모자란다고. 또한 그는 딸들이 결혼에 얽매이기보다 지금 모습 그대로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이야기했다.
“우리 아이들의 연주를 듣고 병이 나았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 정말 감사하고 행복하죠. 앞으로도 딸들의 음악과 제 글을 통해 사람들이 사랑과 힘을 얻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세 딸을 뒷바라지하느라 소홀하긴 했지만 문학과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은 것이 딸들이 모두 독립한 지금 너무나 다행스럽다고 한다. 아이들의 명성과 별도로 커리어를 쌓아온 것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할 뿐 아니라 딸들에게도 자부심을 심어주는 것 같다고. 때문에 그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현실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며 자기를 계발할 것을 충고했다.
“인생은 도전이고 탐험이라고 생각해요. 목숨이 있는 한 끊임없이 도전해야죠. 현재에 안주하면 뱃살만 늘어나잖아요. 전 산을 참 좋아하는데 산에 오를 때마다 꽃이며 풀이며 그 모습이 달라요. 아파트 20층에서 바라보는 일몰도 매번 다른 모습이지요.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잖아요. 아이는 부모를 보고 자라는데 내 아이를 이 시대에 맞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키우려면 엄마가 시시각각 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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