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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유인경의 Happy Talk

배짱이 가져온 평화

입력 2004.04.02 10:46:00

신문기자라는 본업에다 방송, 강의, 잡지 기고 등 부업까지 하다보니 사람들은 으레 내가 바쁘리라 생각한다. 때문에 각종 친목 모임이나 행사 등에 초대받지 못할 때도 많다. 하긴 그동안 내가 먼저 호들갑스럽게 ‘바쁘다’ ‘힘들어 죽겠다’ 엄살을 떨고 비명을 질러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루 스케줄이 적힌 수첩만 펴봐도 마음이 답답했다. 그런데 이젠 마냥 평화롭다. 일상이 단순해지거나 신변 정리를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마음 하나 바꾸었을 뿐이다. 일단 하루를 시작하기 전, 수첩에 그 날 해야 할 일을 시간 순서대로 적고, 시간 순서대로 일을 처리하면서 그 순간의 일, 그 일에 관련된 사람에게만 집중하고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모든 문제나 일을 다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인간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 약속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면 편히 잠들 수 있다.
배짱이 가져온 평화

“바쁘시죠? 아휴, 체력이 대단한가봐요. 그 나이에 그렇게 많은 일을 하는걸 보면.”
요즘 내가 많이 듣는 인사말 중의 하나다. 신문기자라는 본업에다 방송, 강의, 잡지 칼럼 기고 등 부업까지, 거기에 엉망이긴 해도 명색이 살림하는 아줌마니까 무척 바쁠 거라고 생각하나보다.
그런데 거기에 대고 내가 “이 치마, 동대문 시장에서 산 거야” “‘황혼유성군’이란 만화책을 보니까 말야…” “어제는 아무개씨랑 저녁을 먹었는데…”라고 이야기하면 마냥 신기해한다. 골다공증이나 관절염을 걱정할 중년 아줌마가, 유난히 짧은 다리로 여기저기 다니며 만화책도 보고, 딸과도 잘 노는 것이 경이로운가보다.
물론 나는 ‘느림의 미학’을 예찬할 만큼 여유 있는 팔자는 아니지만 일상이 숨막힐 만큼 분주하지도 않다. 그저 하는 일의 종류가 다양한데다 모두 신문·방송·잡지 등 매스컴을 통해 사람들에게 내보여지는 일이어서 남들 눈에 잘 띌 뿐 절대 많은 일을 하거나 진짜 바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전업주부인 친구들이 나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분주하며 알뜰살뜰 하루를 요리하며 산다.
괜히 겉으로만 바빠 보이는 까닭에 사람들은 나만 보면 숨차하고, 으레 내가 바쁘리라 예상하고 모임이나 행사 등에도 부르지 않고 전화연락조차 하지 않아 불이익, 심지어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너무 바쁠 것 같아서 연락을 안 했지. 그냥 우리끼리 만났어” “너야 뭐 항상 공사다망 정신 없이 사니까 친구들 만날 시간이 있겠니?” 하며 말이다. 하긴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싸다. 그동안 호들갑스럽게 ‘바쁘다’ ‘힘들어 죽겠다’ 엄살을 떨고 비명을 질러댔으니까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고 다짐한 뒤로 불안과 초조 말끔히 사라져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첩에 적힌 스케줄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할 때가 있었다. 신문사 회의, 취재, 인터뷰, 원고 쓰기는 물론 방송 출연, 강의, 점심과 저녁 약속, 은행업무 등등 하루 스케줄이 빼곡이 채워져 있는 걸 보면 시험 칠 과목은 많은데 공부는 하나도 하지 못한 학생처럼 초조하고 불안했다. 수학 책 펴들면 암기과목을 해둬야 할 것 같고, 연습문제를 풀다 보면 교과서에 충실해야 할 것 같아 밤새 이 책 저 책 폈다 덮었다만 반복하는 학생처럼 어쩔 줄 몰라했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머리 속으로는 다음 스케줄을 걱정하고 있고, 10분이라도 지체되면 다음 약속장소까지 가는 길이 막히지나 않을까 입이 바짝바짝 말라서 유난히 말을 천천히 하거나 음식을 느릿느릿 먹는 사람과 있을 때는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니 늘 딴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성의 없어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젠 마냥 평화롭다. 일상이 단순해지거나 신변 정리를 한 것도 아니다. 그저 마음 하나 바꾸었을 뿐이다. 우아하게 말하면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고 다짐했고, 쉽게 표현하면 ‘배째라’ 정신으로 배짱을 키웠다는 뜻이다.

배짱이 가져온 평화

일단 하루를 시작하기 전, 수첩에 그 날 해야 할 일을 시간 순서대로 적는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법칙’이라는 책을 쓴 스티븐 코비 등 성공학 전문가들은 ‘우선 순위를 정해 중요한 일부터 하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내 경우엔 발생순서나 약속 순서대로 한다. 어떤 사람이 내 인생에 더 필요한지, 어떤 일이 더 중요한지를 단정짓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 부담 없이 웃고 떠들자고 만난 사람에게서 매우 소중한 정보를 얻거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잔머리를 굴려 뭔가 기대하고 만난 사람에게서는 허탈감만 느낀 경우도 많다. 또 대단한 일인 것 같아 몰두했는데 ‘꽝!’ 소리와 함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는 반면 히히덕 거리며 대충 한 일이 놀라운 성과를 거둘 때도 있다.

완벽하게 모든 걸 해내겠다는 욕심보다는 적당히 양해를 구하고, 거절할 줄 알아야
그래서 시간 순서대로 일을 처리하다보면 그 순간의 일, 그 일에 관련된 사람에게만 집중하고 충실할 수 있다. 첫 약속에서 시간이 지체되면 다음 약속한 사람에게 미리 연락해 양해를 구하고, 다시 시간을 조절하면 된다. 이동하는 도중에 차가 막혀도 속을 부글부글 끓이기보다 책을 보거나 쪽잠을 잔다.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밥을 먹자고 하면 함께 만나 공동의 관심사를 이야기한다. 어쩌다 스케줄이 펑크나서 자투리 시간이 생기면 서점이나 시장에 가고, 간혹 시간이 넉넉하게 비면 극장에도 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모든 문제나 일을 다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예전엔 누가 부탁하면 반드시 들어주려 했고, 온갖 청탁을 다 받아놓고 낑낑대며 “아이고, 이런 걸 왜 한다고 해서 이 고생이냐”며 내 머리를 쥐어뜯고, 내 입을 쥐어박았다. 하지만 이젠 “안되겠습니다” “그건 아무개씨에게 부탁하세요”하고 거절할 줄도 알게 됐다. 또한 실수를 하거나 약속을 못 지켰어도 자책감에 사로잡히기보다 “인간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 약속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편히 잠든다.
그런 힘은 모두 다 배짱에서 나온 것이다. 그 배짱은 그동안 내가 먹은 밥, 내가 쉰 한숨, 내가 흘린 땀, 그리고 내가 먹은 욕이 쌓여서 생긴 결과물이다. 아, 이 나이에 벌써 이 정도 배짱이면 시력도 약해져 눈에 보이는 것 없는 할머니가 되면 어떤 모습일까.


여성동아 2004년 4월 4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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