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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가슴 아픈 고백

북파공작원 월북 안내하며 겪은 고통 30년 만에 털어놓은 시인 신대철

“군사분계선 넘을 때 두려움에 떨던 그들의 눈빛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 글·최호열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4.03.10 13:55:00

영화 ‘실미도’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그동안 베일 속에 가려졌던 북파공작원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중견 시인 신대철씨가 자신이 과거 북파공작원과 관련된 일을 했음을 고백해 눈길을 끌고 있다. 북파공작원을 죽음의 길로 안내했다는 자책감으로 방황했다는 그를 만났다.
북파공작원 월북 안내하며 겪은 고통 30년 만에 털어놓은 시인 신대철

71년 서울 유한양행 앞에서 집단자살한 북파공작원을 소재로 한 영화 ‘실미도’가 관객 1천만명 돌파라는 흥행 기록을 세우면서 사회적으로 북파공작원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있다. 그동안 그 존재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견 시인이자 국민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장인 신대철씨(59)가 문학계간지 ‘창작과비평’을 통해 자신이 그들을 북한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30년 만에 고백해 화제가 되고 있다. 더구나 그의 특별한 체험이 시인으로서의 인생과 궤도를 같이해 눈길을 끈다.
“68년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는데, 바로 그 달에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발생했어요. 그리고 한달 뒤에 학사장교로 입대하고, 비무장지대에 배치되었어요. 김신조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초긴장 상태였으니 전방 분위기가 어땠겠어요.”
그는 비무장지대 GP(감시초소) 책임자로 배치되었다. 그런데 현장에 부임하는 첫날부터 충격적인 사건을 접해야 했다. 중사가 그에게 주변 지형을 설명하면서 “이곳이 지뢰 위험 지대입니다” 하는 순간 “꽝” 하는 폭발음과 함께 중사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발목지뢰를 밟은 것이다. 중사는 이내 다시 지뢰밭으로 떨어졌다. 이어지는 격렬한 폭발음….
“어떻게 되었겠어요. 끔찍했죠. 그런데 더 황당했던 건 중대장이 별스럽지 않다는 듯 저에게 ‘어이 신소위 뭐해, 시체 가지고 나와야지’ 하는 거예요. 대검 하나로 지뢰들을 제거하고 들어가 시체를 들쳐 업었죠. 아직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더라고요. 처음부터 그런 극한 상황을 맞으니까 사람이 이성을 잃게 되더군요.”
그후로도 남쪽에서는 발목지뢰를 밟아 죽은 사람들의 사지가 굴러다니고 북쪽에서는 불이 나서 수백 발의 지뢰가 터지고 불을 끄기 위해 아우성을 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났다. 그로서는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전시상황 같은 현실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무척 혼란스러웠다.

성공하고 돌아와 작은 선물꾸러미 들고 고향 찾는 게 꿈이었던 사람들
더구나 북파공작원이 북한으로 넘어가도록 도와주고,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마중하는 일이 그에게 맡겨졌다. 이를 위해 그는 북쪽의 지뢰 매설 상황과 경계근무 상황을 시시각각 체크해야 했다. 그는 이 일을 1년여 동안 했다고 한다.
“처음 북파공작원을 보았을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군대 오기 전에 소문으로만 듣던 사람을 실제 보았으니까요. 북파간첩이나 남파간첩은 왠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보니까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 거예요. 기분이 묘하더군요. 더구나 그들은 죽으러 가는 사람이고, 또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제가 그들을 죽음의 길로 안내해야 한다는 사실이 고통으로 다가왔어요. 물론 제가 하는 일은 안전하게 군사분계선을 넘게 하는 것이지만 결국 죽음의 길로 이끄는 거잖아요.”
북파공작원들은 짧게는 3∼4일, 길게는 일주일씩 그와 함께 머물렀다. 그러면서 낮에는 자신들이 넘어갈 길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밤에는 직접 매복하면서 자연의 소리와 움직임을 파악했다. 그리고 천둥이 치고 장대비가 내리는 새벽을 틈타 죽음의 길을 떠났다.

북파공작원 월북 안내하며 겪은 고통 30년 만에 털어놓은 시인 신대철

분단의 현장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그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는 신대철 시인.


“군사분계선까지 안내를 한 후 포옹을 하고 헤어져요. 그 순간 두려움으로 초점을 잃은 그들의 눈빛이 아직도 제 기억 속에 선명해요. 혹독한 훈련으로 단련된 인간병기라고 하지만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니까요.”

항간에는 북파공작원들이 사형수나 무기수, 혹은 죄수들 중에서 발탁된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과 친해지기는 쉽지 않아요. 웬만해선 다른 사람과 말을 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저와는 지형 정찰을 같이 다니다 보니까 정이 들어 말을 나누지요. 물론 사회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안하죠. 그래도 몇마디 나눠보면 대충 짐작이 가잖아요.”
그가 만난 북파공작원들은 대부분 구두닦이, 부랑자 등 밑바닥 생활을 해온 이들이었다. 이 사회에서 더는 버틸 수 없어 인생을 바꿔보려는 사람들이었다.
“가난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어 어린 시절부터 거리로 나왔지만 가정을 이루고 농사를 짓고 싶은 소박한 꿈을 간직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물색요원(그들은 브로커라 불렀다)을 만나게 되어 절망을 애국심으로 바꾸고 인생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자신의 운명과 마주선 것이죠. 임무를 수행하면 당시 돈으로 3백만원에서 5백만원을 준다고 하니까 그걸로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려는 사람들이었어요.”
그중에는 새벽에 고향 마을의 우물물 한 바가지를 마시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도망치듯 떠나온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와 작은 선물꾸러미 하나 들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가슴이 더욱 미어지죠. 차라리 그들에 대해 몰랐으면 덜 힘들었을 텐데…. 알면 알수록 더욱 힘들었어요.”
북파공작원들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군사분계선까지 무사히 안내한 후 마음속으로 살아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서 죽어간 경우도 있었다. 군사분계선에서 헤어지고 돌아서서 몇 발자국 걸어가는 순간, 북쪽에서 연이어 지뢰가 터지는 소리가 들린 것. 북파공작원이 밟았는지 아니면 노루 같은 산짐승이 밟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일대의 지뢰가 연이어 터졌으니 살 리가 없었다.
“제가 보낸 사람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약속된 시각에 약속된 장소로 돌아온 경우가 거의 없으니까요.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밝은 얼굴이 아니에요.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흐느적거리며 걸어오는데 그때의 그 사람의 표정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죠.”
그는 자신의 손으로 북으로 보낸 북파공작원의 숫자가 몇 명이냐는 물음에 미소만 머금었다. 아직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는 것이다.

북파공작원 월북 안내하며 겪은 고통 30년 만에 털어놓은 시인 신대철

신시인은 실미도의 진상이 소상히 밝혀지길 바란다고 했다.


당시의 충격과 고통은 제대한 뒤에도 쉽게 가시지 않았던 모양이다. 몇년 사이 서울에서만 20번 넘게 이사를 할 정도로 마음이 불안정했다. 지금은 틈나는 대로 백두대간을 종주할 정도로 산을 좋아하는 그이지만 한동안 산에 갈 수 없었다. 산길을 걸으면 자꾸 지뢰를 밟을 것 같은 공포감 때문이었다. 또한 사람들을 죽음의 길로 보냈다는 죄의식에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기막힌 우연인 게 제대 후 맨 처음 교편을 잡은 곳이 바로 실미도 북파공작원들이 최후를 맞은 유한양행 뒤편에 있는 학교였어요.”
처음엔 이런 공포심과 죄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유년시절의 추억 등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정서를 시에 담았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훌훌 길을 떠나 무인도 같은 낯선 곳을 떠돌아다녔다. 사람들이 곁에 있어도 그는 혼자 동떨어져 비무장지대의 GP 안에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77년 첫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가 만들어졌다. 이 시집은 80년대 문학청년들의 필독서가 되었고, 문단에서 그의 위상을 확립시켜 주었지만 마음속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진짜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시대 분위기 때문에 그걸 못 쓰니까 답답했죠. ‘왜 글을 쓰는가’ 하는 회의도 들고…. 아침에는 의욕이 생겼다가 밤이 되면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어요. 그래서 한동안 시를 멀리 했어요.”
그의 인생에 변화가 온 것은 89년 가을, 우연히 실미도를 방문하면서였다. 주문도나 덕적도 일대의 작은 무인도를 떠돌다가 우연히 들른 섬이었다. 그곳이 실미도라는 것을 아는 순간 잊으려고 몸부림쳤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며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돌아설까 하다가 그냥 들어갔어요. 수평선을 보고 있으면 북파공작원들과 마지막으로 포옹을 할 때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고, 제가 마치 그때 그 현장으로 되돌아가 공포와 굶주림과 불안 속에서 더듬거리며 돌아오고 있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후 한두달에 한번씩 실미도를 찾았다. 또한 알래스카, 북극, 고비사막, 몽골 초원 등을 여행하면서 서서히 마음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긴 방황을 통해 자신의 고통이 개인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것이라는 답을 얻은 것이다. 그는 긴 침묵을 깨고 2000년 시집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를 통해 30년 동안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의 일부를 털어놓았다.
“그동안 써놓았지만 발표하지 못했던 당시의 마음을 담은 시들이 3권 분량이 돼요. 이제 때가 된 것 같으니 발표를 해야죠.”
그가 본 영화 ‘실미도’는 어땠을까.
“전 실화를 보고 싶었는데 영화는 사실을 바탕으로 했으면서도 사실과 너무 다르게 드라마로 만들었더라고요. 등장인물도 살인병기로만 다뤄져 실제인물 같은 느낌이 없고, 무엇보다 당시 사건을 마치 단순한 폭도들의 감상적인 자살극처럼 묘사해 아쉬웠어요. 하지만 이 영화가 묻힐 뻔했던, 국가폭력과 분단상황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건에 사회적 관심을 갖게 했고, 그늘 속에 살았던 북파공작원들을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합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과 같은 희생자가 더는 나오지 않도록 비무장지대에 평화가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여성동아 2004년 3월 4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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