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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유인경의 Happy Talk

사랑스러운 중년

2004. 03. 04

나보다 나이도 많고, 날씬하지도 않은 한 전문직 여성은 남자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올해로 쉰살이 된 한 여성사업가도 중년 남성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다. 남자들의 사랑을 받아야 여성성을 인정받는 건 아니지만 그 나이가 되도록 여성이라는 성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남을 수 있다는 건 참 부러운 일이다. 사랑받기 위해 꼭 젊음과 미모가 필요한 건 아닌 모양이다. 주름과 뱃살 때문에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이 드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나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수시로 되뇌어야겠다.

사랑스러운 중년

대한민국 나이로 마흔여섯살이 된 나. 염색으로 흰머리를 감추고 점점 값비싼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몸매를 다져가는 내가 봄을 맞아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있다. 로또 복권에 당첨되거나 남몰래 공부해 학위를 받았거나 딸아이가 명문대학에 조기입학을 했다거나 남편이 갑자기 철이 들었다거나 한 건 아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이 나와 같은 중년 아줌마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몸짱’이 아니더라도 봄날은 온다는 것을 증명하는 희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한 전문직 여성이 있다. 나보다 나이도 많고, 날씬하지도 않다. 평소 그를 보면서 섹시하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오히려 나이에 안 어울리는 소녀 같은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을 뿐이다.
그런데 한 모임에서 들은 바에 따르면 그는 중년 남성들에게 인기 만점이고 그 여성 때문에 눈물을 흘린 아저씨들도 수두룩하다고 한다. 그 아저씨들 명단에 내가 아는 남자들도 있었다. 한결같이‘잘 나가는’비즈니스맨들이다. 그를 잘 아는 지인의 증언은 이렇다.
“얼마나 애교가 많은지 몰라요. 여럿이 만날 때도 꼭 남자 옆에 앉고 밥 먹을 때도 수시로 반찬을 얹어주고, 심지어 남자들 무릎 위에 앉을 때도 있는 걸요. 처음엔 당황하던 남자들도 나중엔 그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요.”
수시로 남자 무릎 위에 앉는다고? 다섯살 난 깜찍한 꼬마나 날렵한 몸매의 20대 아가씨도 아닌 갱년기 아줌마가? 나는 상대방 무릎 인대가 파열되어 평생 치료비 물어줄 걱정이 앞서 처녀시절에도 절대 남자 무릎을 활용해본 적이 없는데….

쉰살 아줌마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줄을 서는 중년 남성들
한 여성 사업가가 있다. 무식하지만 솔직하다. 끝까지 읽은 책이 단 한권도 없다고 하고,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며 식당에서 메뉴판도 보지 않는다. 현대 의학의 도움으로 약간의 성형수술을 했으나 깜짝 놀랄 만큼 젊어지거나 예뻐진 건 아니다. 그의 나이는 올해 쉰살이다. 그런데 그를 만나는 모든 남성들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선물을 사다 안기며, 작은 일부터 큰 사업자금까지 무엇이든 도와주지 못해 안달이다. 그가 내숭을 떠는 것도 아니고, 젊은 척하는 것도 아니며 툭하면 장성한 아이들 이야기까지 늘어놓는데 말이다.
이건 세계 7대 불가사의보다 더 신기한 일이다. 피라미드의 비밀보다 훨씬 궁금한 일이다. 어째서 내 나이 또래의 아줌마들이 20, 30대의 파릇파릇한 젊은 여성들을 제치고 사랑받는 데 있어 경쟁력 우위를 자랑하는 것일까. ‘남녀상열지사’에 정통한 한 여성이 이런 견해를 피력했다.
“린다 김, 기억나지? 그와 비슷한 상황이야. 우리나라 중년 남자들, 40∼50대 아저씨들은 말야, 로맨스를 잘 몰라. 60∼70년대에 학교 다니며 그저 명문대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느라 정신없었고, 그 다음엔 번듯한 직업 구하려고 기를 썼지. 결혼해서도 아내와 아기자기하게 사랑을 나누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그저 출세하고 돈 벌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다고. 그런데 이제 어느 정도 지위에 오르고 재산도 모으고 나서 자신을 돌아보니 너무 허망한 거지.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았나, 마누라는 내가 번 돈으로 사치하고 애들은 외국유학가 하고 싶은 공부하는데 난 뭔가’ 하고 말야. 물론 성매매도 할 수 있고 젊은 여자들도 만날 수 있지. 하지만 젊은 여자들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믿겠어? 돈이나 지위에 혹해서 따른다고 생각하지. 그때 그 시점에 어느 정도 지위를 갖춘 중년의 여성이 나타난 거야. 동시대를 살아 공감대도 넓고 추억거리도 많고 무엇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좋아해준다고 생각하니 묻어두었던 로맨틱한 감정이 살아나는 거지. 젊은 여자들처럼 명품 핸드백 사달라고 앵앵거리거나 이혼하라고 매달리지도 않고, 웃으면 잔주름도 정겹게 지고. 그러니 그 나이에 ‘사랑하는 린다’ 하고 연애편지를 쓸 수 있는 거라고.”

사랑스러운 중년

참으로 공감할 만한 인생 강의였다. 얼마 전 내 친구도 하염없이 돈이 많은 부자 아저씨와 재혼했다. 그 재혼 상대는 “마누라 미모는 한달도 못가지만 지혜는 3대가 간다”며 똑똑하고 야무진 내 친구를 선택했다. 나는 결혼식장에서 그 남편에게 “참신한 신입사원(처녀)들을 마다하고 유능한 경력사원을 뽑아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젊음과 미모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신감이 매력
잭 니콜슨과 다이앤 키튼 주연의 영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역시 ‘아줌마 만만세’를 부르짖는다. ‘영계 킬러’ 경력 40년의 63세 음반사 사장(잭 니콜슨)과 이혼 후 남자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56세의 희곡작가(다이앤 키튼)의 사랑 이야기다. 여주인공 다이앤 키튼은 한지를 구겨놓은 듯 주름이 자글자글한데 그 주름은 지성과 연륜과 성숙미를 보여준다. 절대 추하다는 생각이 들거나 ‘쭈글탱이 할머니’란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모처럼 평화로운 대화가 통하는 여자를 만났다며 구애하는 영감과 “당신은 정말 섹시해요” 하며 달려드는 36세 젊은 의사(키아누 리브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여주인공은 아줌마들을 대리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사랑받는 데 필요한 조건은 미모와 젊음만이 아니라고, 나이가 들어도 자신을 잘 가꾸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면 언제 어디서나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남자의 사랑을 받아야 여성성을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주제 파악도 못하고 남자들에게 고양이처럼 교태만 부리는 건 오히려 추태다. 그러나 중요한 건 절대 나이 때문에, 주름 때문에, 뱃살 때문에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거나 여성이란 성 정체성조차 포기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나이 드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자신을 사랑스럽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자기확신이 그 여성을 나이에 상관없이 사랑스럽게 보이게 한다.
일단 수시로 ‘난 사랑스럽다’ 하고 주문을 외워야겠다. 그 다음 남편 무릎 위에 앉아볼까? 그런데 남편의 무릎뼈에 금이 가거나 심장마비를 일으키면 어떡하지? 보험도 안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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