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미(이하 박) (오디션) 당시 뮤지컬 ‘넌센스 잼버리’에 출연중이었는데 동료 배우들이 등을 떠밀어 오디션에 참가했어요. 그런데 1차 오디션을 끝내고 목이 완전히 망가져버렸어요. ‘넌센스 잼버리’를 하며 쉬는 날 없이 하루 두탕씩 힘껏 소리를 질러대고, 집에 돌아가면 아들이 워낙에 천방지축이라 정리가 안되거든요(웃음). 그러니 아이하고 씨름하다 보면 잠도 못 자고…. 하루 종일 이쪽저쪽에서 전쟁을 치르니 급성 후두염까지 걸렸어요. 2차 오디션을 봐야 하는데 목이 쉬어서 말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죠.
전수경(이하 전) 정말 고민했겠네요.
박 (끄덕이며) 포기할 생각도 했어요. ‘하지 말라’는 하늘의 계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되든지 말든지 마음 편하게 하자’ 하고 담담하게 임했어요. 그랬더니 오디션에 통과하더라고요. 막바지로 갈수록 정말 하고 싶어지더군요. 뮤지컬 배우 인생에서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번쩍 들고요. 최종 오디션에서 어려운 노래를 부르게 됐는데 눈물까지 보이면서 정말 열정적으로 불렀죠.
이경미(이하 이) 저는 오디션을 보기 전부터 주위에서 ‘로지 역이랑 잘 어울린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사실 저는 도나와 상황이 비슷해요. 극중 도나는 스무살 난 딸을 둔 싱글맘인데 저 역시 올해로 스무살이 되는 딸이 있어 도나의 처지를 잘 이해할 수 있고, 연기를 하면 너무 잘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죠. 결국 로지를 맡게 돼 약간의 아쉬움은 있지만 만족해요. 독신으로 살고 있는 로지는 페미니스트인데 코미디적인 요소가 많아 극중에서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하거든요.
박 수경씨도 아마 도나를 탐냈을 걸… 자타가 알아주는 뮤지컬 톱스타니까.
전 (웃으며) 도나든 타냐든 둘 중 하나는 제가 하게 될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주변에 ‘난 맘마미아 해’ 하며 다녔어요. 워낙 하고 싶었던 작품이고, 주최측에서도 함께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거든요. 그런데 오디션에서 도나는 시켜보지도 않고 타냐 역만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좀 럭셔리하게 생기긴 했지만(웃음). 타냐는 세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한 여자인데 매번 부자들과 결혼을 하거든요.
박 그래도 두 사람은 영국에서 공연한 ‘맘마미아’를 본 적이 있으니까 오디션을 볼 때 도움이 됐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맘마미아’에 대해 전혀 몰랐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라 대본대로만 연기를 했어요. 이경미씨가 도나 역을 하고 싶다고 했는데 저 역시 도나의 드라마틱한 사랑이 남의 일 같지 않아요. 대학 3학년 때부터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다 졸업하고 바로 결혼하면서 잠시 무대를 떠났어요. 2년 만에 이혼하고, 다시 대학로로 돌아왔는데 만일 이혼 전에 아이를 가졌다면 저 역시 도나처럼 장성한 딸을 키우는 엄마가 됐겠지요.
이 파란만장한 삶을 보낸 중년 여인, 도나를 중심으로 사랑과 청춘을 향한 동경 등 삶의 진솔한 가치들이 군데군데 녹아 있는 작품이어서 연습할 때 종종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스치고 지나가기도 했어요. 전 젊었을 때 데이트를 원없이 해봤어요. 전 해미씨보다도 빠른 대학 4학년 때 결혼을 했어요. 결혼이 뭔지, 엄마가 뭔지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딸을 낳았고 대학교를 졸업한 후 성격 차이로 이혼을 했어요. 그리고 연극을 시작했죠. 내가 상처를 준 적도, 상처를 받은 적도 있지만 이제는 추억일 뿐이지요.
전 처음 만난 남자와 뜨거운 하룻밤을 보내는 극중 도나가 부럽기도 해요. 제가 어렸을 때는 생각도 못해본 일이에요. 학창 시절에 공부에만 파묻혀 산 까닭에 사랑을 많이 못해 봤어요. 그 점이 아쉬움으로 남죠. 스물다섯살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2년반 동안 연애하고 결혼했는데 만일 청춘이 다시 돌아온다면 이 남자 저 남자 많이 만나보고 싶어요. 도나를 보며 대리만족과 위안을 느끼죠.
박 저는 말은 거칠게 해도 학창시절엔 진짜 순진한 소녀였어요. 인기가 대단했지만 나름대로 조신한 소녀였답니다.
이 제 나이가 어느새 40대 초반이 됐는데 20대 30대 40대, 각각의 사랑이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20대의 사랑이 불 같은 사랑, 멋모르고 하는 사랑이라면 30대에는 뭔가 알아가는 것 같다고 할까, 밀고 당기는 조절이 가능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40대에 사랑을 해보니…(2년 전까지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편하게 사랑을 할 수 있더군요. 그전에는 뭔가 있는 ‘척’하려 했는데 40대가 되니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편한 사랑을 추구하게 되더라고요.
전 언니 또래의 많은 여자들이 가정에 매여 사는데 싱글이어서 좋은 점도 있을 것 같아요.
이 (끄덕이며) 지금 내 모습이 주부들이 원하는 삶일 수도 있죠. 아, 이 자유로움! 반대로 내가 주부들을 볼 때면 그들에게는 내게 없는 편안함이 있어요. 함께 늙어갈 수 있는 동반자가 있어 든든하잖아요. 그건 싱글인 내가 가질 수 없는 부분이지요. 그래서 남자친구가 한명 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도 해요. 손 잡고 공원에도 가고 영화도 보러 가고 할 수 있는.
<b>박해미</b><br>40세. 이혼 후 아홉살 연하의 남자와 결혼해 네살짜리 아이를 키우고 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아가씨와 건달들’ ‘내 생애 최고의 날’ 등에 출연. 약간 덜렁거리는 성격의 주인공 ‘도나’ 역을 맡았다.
박 결혼은 싫고요?
이 ‘결혼은 절대 안된다’ 하는 건 아니지만 하고 싶지 않아요. 적당한 구속은 좋다고 생각하는데 결혼은 좀 자신이 없어요. 연기하면서 시집 식구며 집안 대소사 챙길 자신이 없거든요.
박 난 사랑에 대해선 무식한 편이에요. 필이 꽂히면 그냥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섹스어필한 사람에게 필이 꽂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불 같은 사랑을 좋아하죠. 그런데 그렇게 필이 꽂히는 게 쉽지 않아요.
전 그럼 지금의 남편은 섹시남인가요?
박 (웃으며) 그런 편이지요. 남편을 만난 지 햇수로 9년 됐는데 ‘각시 품바’ 공연을 할 때 처음 만났어요. 관객으로 객석에 앉아 있었는데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굉장히 섹시했어요. 오프닝하고 객석에 조명이 들어오는데 눈에 확 띄는 거예요. 마치 강렬한 헤드라이트가 나를 향해 ‘쫙’ 비추는 것처럼 나를 뚫어버릴 것 같더라고요. ‘우와, 저 사람 괜찮다’ 싶었지요. ‘각시 품바’ 공연이 원래 혼자서 ‘허벌나게’ ‘오방난장’을 치는 작품이라 ‘저 사람을 어떻게 요리할까’ 생각했죠. 관객들과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쇼를 하다가 그중 한명을 데리고 나와 결혼식을 하는 구성이었거든요.
전 그래서 아홉살 연하의 남자와 연애를 시작한 거예요?
<b>이경미</b><br>43세. 대학 4학년 때 결혼해 딸 하나를 낳고 이혼, 지금은 독신으로 산다. ‘유린타운’ ‘그리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에 출연. 겉으로는 자신감이 넘쳐 보이지만 사실 수줍음 많은 도나의 친구, ‘로지’ 역을 맡았다.
박 느낌이 왔는데 알고 보니 너무 어리더라고요. 그때 내가 30대 초반이었는데 그는 20대 초반이었으니 한창 풋풋할 때잖아요. 반면 난 무르익을 나이고요. 그때까지 난 어린애는 남자로 안 봤어요. 나이 든 사람을 좋아했지요. 처음엔 출국을 앞두고 공연을 보러 온 캐나다 교포라고 하길래 외국에서 고생했겠다 싶어 잘해줬어요. 저 역시 가족들이 모두 캐나다에 있고 저만 한국에 남아 있거든요. 그런데 그가 캐나다로 돌아간 지 1주일 만에 짐을 싸들고 저를 찾아온 거예요.
이 어쩜!
박 밀어내기로 했죠. ‘나, 나이 많아, 아줌마야’ 하며 떠밀어도 떠나질 않는 거예요. 완전히 스토커 같았어요. 경찰에 신고도 해보고 온갖 방법을 다 써봤지만 끝없이 구애를 하는데 어쩌면 진정한 사랑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불같이 끌려 동거를 시작했는데 그러면서도 ‘이러다 끝나겠지. 이러다 끝나 그가 캐나다로 돌아가버린다 해도 별 혼란이 없겠지’ 생각했어요. 그런데 불 같은 사랑이 온돌같이 은근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사랑으로 오래 유지됐고, 임신을 하면서 결혼식을 하게 됐지요.
전 동거는 여자에게 불리하다는 고정관념이 있는데 경험자로서 정말 그런가요?
박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결혼하고 나서 헤어지는 것보다는 동거를 해보고 결혼하는 것이 좋아요. 성적 궁합까지도 다 맞춰볼 수 있으니. 다만 아이문제는 확실히 해야 하죠. 책임지지 못할 거라면 피임을 철저히 하는 것이 좋고요.
<b>전수경</b><br>38세. 두살 위인 뮤지컬 배우 주원성과 93년 결혼, 18개월 된 쌍둥이 딸을 키우고 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코러스 라인’ ‘넌센스’ 등에 출연. 도나의 친구로 우아하고 세련되면서도 말을 거침없이 하는 ‘타냐’ 역을 맡았다.
전 전 뮤지컬을 하면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어요. 나이 스물다섯이 되도록 연애를 못해봐 ‘누군가 나타나기만 하면 사귀고 말 테야’ 하던 때였지요. 그전에는 남자랑 단둘이 있으면 소름이 돋고 해서 연애를 못했는데 드디어 섹시하게 춤도 잘 추고 유머감각도 풍부한 남자가 나타난 거예요. 그는 여럿이 함께 있을 때 즐거움을 주고, 단둘이 있어도 징그럽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이 주원성씨가 워낙 재미있고 친절하고 성격이 좋아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어요.
전 바로 그거예요. 결혼 전에는 그런 점이 좋아 보였는데 결혼하고 나니 그런 모습이 꼴보기 싫어지더라고요. 신혼 초에는 함께 있는 게 너무 좋아서 떨어져서 생활하는 걸 상상도 못했는데 차츰 부딪치면서 많이 싸웠어요. 이를테면 ‘깐죽’ 거리는 식으로, 남편이 내가 듣고 싶어하지 않는 말로 나를 자극시키는 버릇이 있어서 열을 받곤 했지요. 하지만 이제는 그런 데 자극 안 받기로 마음먹었어요.
이 그러기 쉽지 않을 텐데….
전 사랑은 유통기한이 2년이라고 하는데 93년에 결혼했으니 유통기간이 지났다고 할 수 있지요. 열정보다는 정, 의무, 인내심, 가족애, 이런 걸로 산다고 해야 할까요. 남편이 미워지거나 권태로워지면 나름대로 해소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 넘기는 편이에요. 친구들과 만나 얘기를 하거나 영화를 본다거나 정신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죠.
막바지 연습이 한창인 배우들. ‘맘마미아’는 영국 제작진의 지휘하에 혹독하지만 즐겁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박 정신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란 게 어떤 거죠?
전 정신적으로 매력남을 찾는 거예요. 동네 슈퍼 아저씨나 쌀집 아저씨 등 그날그날 보이는 남자들에게서 매력을 발견하고 느끼는 거죠. 예전엔 남편이 여자 후배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저 사람이 왜 저러나’ 싶어 기분이 상했는데 이제는 저도 까마득한 남자 후배들을 보면 ‘아유 귀여워’ 하며 어깨를 쳐주기도 해요. 길을 가다가도 ‘저 남자는 히프가 올라붙었네’ ‘저 남자는 팔 힘이 세네’ 하는 식으로 장점을 찾아 혼자 즐기죠(웃음). 때론 미니스커트나 눈에 띄는 옷차림을 하고 밖에 나가 남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즐기기도 하고요.
이 남편이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한다?
전 (신나서)그렇죠.
“때로는 못되고 이기적인 여자가 매력 있어요”
이 이혼하고 난 뒤에 연극을 시작하면서 딸아이를 친정 부모님이 키워주셨어요. 일하는 엄마들이 다 그렇겠지만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해 아이에게 늘 미안했어요. 그래서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됐을 때 붙잡고 물었어요. ‘엄마가 집에 있으면서 학교 공부도 도와주고, 너만 바라보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처럼 밖에서 연극을 할까?’ 하고요. 아이한테 제 운명을 맡긴 거죠. 아이가 연극 그만두고 집에만 있으라고 하면 그럴 참이었어요. 그런데 ‘엄마 집에 있는 거 싫어, 연극해’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힘을 얻어 지금껏 줄기차게 연극을 할 수 있는 거죠.
박 대체로 싱글맘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일찍 철이 들더라고요.
이 나이에 비해 일찍 철이 든 딸을 보면 가슴이 아팠는데 우려했던 것과 달리 밝고 씩씩하게 잘 자라줬어요.
전 언니는 한창 잘나갈 때 돌연 유학도 갔다왔잖아요.
이 사는 게 지루하고 권태로워서 서른여섯살에 집을 팔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지금 생각해도 정말 잘한 일이에요. 삶이 한결 활기차졌죠. 처음엔 일년 정도 어학연수를 하고 돌아오려 했는데 연극 시설이나 공연 문화가 워낙 잘돼 있어 대학에 들어갔어요. 일년 뒤에 딸을 불러들여 함께 유학을 했지요.
박 우리나라 주부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내가 지금껏 가족들에게 어떻게 했는데 너희들이 이럴 수 있냐’ 하는 배신감인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주부들도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남편에게 잘해주지 않아요. 그런데 남자들은 오히려 잘해주지 않으면 더 안 떠나요. 아홉살 연상에 이혼경력까지 핸디캡이 많은 여자가 고분고분하지도 않고, 밥 한번 제대로 안 차려주면서 ‘불편하면 언제든지 떠나라’ 하니까 오히려 남자 입장에서는 ‘이 여자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하는 생각이 드나 봐요. 그래서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거죠. 어쩌다 제가 밥 한번 차려주면 남편이 엄청 감격해요(웃음).
이 맞아요. 날 희생시킬 필요는 없다고 봐요. 주부들도 얼마든지 소질을 개발하고 봉사를 하면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요. 찾아보면 보람 있는 삶은 주변에 얼마든지 있어요.
전 그런 의미에서 ‘맘마미아’를 많이 보셔야 할 것 같아요(웃음). 틀림없이 진한 감동의 무대가 될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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