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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한 여류 예술가의 초상

환갑 맞은 닥종이 인형작가 김영희

‘나의 사랑·예술 그리고 여자가 늙는다는 것에 대하여…’

■ 기획·최호열 기자 ■ 글·최희정 ■ 사진·정경택 기자

입력 2004.01.09 14:24:00

닥종이 인형작가 김영희씨가 종로 현대갤러리에서 ‘꿈을 가진 어린아이의 환상과 동심의 세계’라는
전시회를 열고 있다. 14세 연하 독일 청년과의 재혼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도 이제 환갑을 맞았다. 인생의 고비를 다 넘기고 “이제는 모든 것이 편안해졌다”고 말하는 김영희씨의 인생 이야기.
환갑 맞은 닥종이 인형작가 김영희

닥종이 인형작가 김영희씨(60)는 매우 분주한 모습이었다. 전시회 일정을 꼼꼼히 체크하랴, 인형 놓을 위치를 지시하랴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그의 얼굴은 약간 불그스름하게 상기되어 있다. 그 동안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수많은 전시회를 열었지만, 그에게 이번 전시회는 여느 때와 다르다. 환갑을 맞이하며 여는 전시회이므로.
“나이가 들면서 점점 한국의 기후, 꽃, 소박하고 은근한 멋이 그리웠어요. 지난 3년간 닥종이 인형에 이런 마음을 담아냈지요. 독일에서 힘들고 외로웠지만 닥종이 인형과 아이들이 있어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아요.”
1월25일까지 종로 현대갤러리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회에서 그는 ‘꿈을 가진 어린아이의 환상과 동심의 세계’를 보여줄 참이다. 그의 말처럼 60점이 넘는 닥종이 인형 표정 하나 하나에서는 소박하고 은근한 멋이 풍겨 나왔다. 마치 어린아이들을 달래고 어르듯 정성스레 빚은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것 같았다. 둥글고 넓적한 얼굴, 통통하고 짧은 다리, 실처럼 가는 눈과 쫑긋 오므린 입은 작가가 빚어낸 정겨운 우리네의 얼굴인 것이다.
“아무것도 없이 사랑 하나만 품고 독일로 갔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이 먹고사는 문제였어요. 남편의 학비를 대야 했고,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어요. 그때 닥종이 인형을 만들어서 살림을 꾸려나갔죠. 다행히 닥종이 인형은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든 것이어서 독일 사람들에게 금방 인기를 끌 수 있었어요. 독일에서 사는 것이 힘들고 외로울 때는 늘 행운을 꿈꿨는데 이번 전시회 때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닥종이 인형들은 저마다 눈덩이를 쥐고 있거나 꽃, 호박 등을 손에 꼭 쥐고 있다. 아이들이 손에 쥔 것은 바로 그가 표현하고 싶었던 행운이고 꿈인 셈이다.
그는 닥종이 인형 이외에도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담은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와 ‘뮌헨의 노란 민들레’ 등의 베스트셀러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회 때도 아이들을 위한 창작동화집인 ‘사과나무 꿈나들이’를 인형과 함께 들고 왔다.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서른세살이었고, 책임져야 할 자식들도 3명이나 됐다. 막막했지만 그렇다고 반평생 걸어온 예술가의 길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전시회에서 우연히 만난 14세 연하의 독일 청년과 열렬한 열애 끝에 재혼을 했고, 아이들을 데리고 무작정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당시 그의 재혼은 큰 화제가 됐다.

이국인과 혼혈이라 힘들어했지만 잘 커준 다섯 아이들에 감사해
“사랑을 찾아 독일에 갔지만 모든 것이 생소했어요. 사람들 사는 모습도 다르고 가치관이 달라 혼란스러웠어요.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곳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나 하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그는 독일로 건너간 뒤 10년 이상을 한해에 예닐곱번씩 유럽 전역을 돌며 전시회를 열었다. 먹고살려면 고정된 수입이 있어야 했기에 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닥종이 인형을 만들었다.

환갑 맞은 닥종이 인형작가 김영희

김영희씨는 독일에서 사는 것이 외롭고 힘들 때는 늘 행운을 꿈꿨는데 이번 전시회 때 그런 꿈과 희망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독일에서 보낸 처음 몇년간은 인형으로 표현한 그의 예술 세계가 서양문화와 부딪치면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을 벌인 절박한 시간이기도 했다. 행여 향수병이 생길까 고국을 떠난 10년 동안은 한국에 오지 않고 악착같이 일만 했고, 아이 키우는 데 매달렸다.
“처음 독일 땅을 밟을 때부터 독일 화단에서 제가 예술가로 큰 대접을 받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한때는 60회가 넘는 전시회를 열었고 많은 작품을 팔았던 내가 평론가들의 폭넓은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을 두고 부끄러워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본래의 내 것을, 나의 개성을 그들에게 펼쳐 보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어요.”
2001년에는 딸이 작곡한 음악과 자신이 직접 쓴 ‘여자의 일생’이란 작품을 갖고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퍼포먼스에서 그는 자신의 ‘센 팔자’를 표현했다. 여자 관객뿐만 아니라 남자 관객들마저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적이었고 무대는 연일 대 성황을 이루었다.
또한 작품활동을 하지 않을 때면 사람들이 붐비지 않고 자연이 그대로 남아 있는 지역을 찾아 장시간 여행을 다녔다. 한번은 터키의 보드륨이라는 작은 촌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그곳이 너무 아름답고 고요해 그냥 둥지를 틀고 싶은 마음도 슬그머니 일었다고 한다.
“그곳은 1월인데도 따뜻하고 귤과 오렌지가 많이 열리는 곳이었어요. 어두컴컴한 밤에 길을 잃고 당황할 때 친절히 자기 집으로 데려가 식사를 대접한 잘생긴 남자와 그의 부인 얼굴이 아직도 떠올라요. 사람에게서 받은 따뜻한 인상이 제 예술 활동에 영감을 줍니다.”
지금은 시간이 나면 작품에 매달리거나 여행을 하면서 재중천의 시간을 갖는 그이지만 몇해 전까지만 해도 자식들 키우기에 진땀을 빼야 했다. 한국에서 유년기를 보낸 세 아이와 독일인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를 키우면서 그는 적잖이 가슴앓이를 했다.
셋째 장수가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혼자 앉아 풍선만 불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재혼한 것을 후회했다. 또 넷째인 봄누리가 사춘기 때 자신이 혼혈아라는 사실에 괴로워할 때는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다섯 아이를 부둥켜안았다. ‘몸 성하고 거짓말 안하면 밥벌이는 하고 산다’는 것이 그의 교육관. 아이들 스스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또 그 일에 따른 책임도 질 수 있도록 가르쳤다.
“지금은 아이들이 커서 막내만 빼고 모두 성인이에요. 큰딸은 변호사이고 둘째는 화가 겸 교사, 셋째는 의상디자이너, 넷째는 음대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있어요. 그 중에는 똑똑하게 자기 일을 알아선 한 아이도 있고 학창시절을 반항하며 보낸 문제아도 있어요. 지금은 모두 제 갈 길을 찾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이런 아이들을 보는 것이 제게 큰 즐거움입니다.”

그는 자신이 독일 청년과 재혼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자신을 예술가가 아닌 뜨거운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으로 보는 시선이 이제는 부담스럽다고 했다. 독일 이웃들도 남편이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젊은 남편에게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이는 동서양을 초월해 ‘여성은 무조건 젊고 섹시해야 한다’는 편견 탓이라고 김씨는 말한다.
“온통 젊고 예쁜 여성들만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잡지나 TV 등 대중매체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직장에서도 여성들은 실력보다는 미모로 인정받잖아요. 나이 먹은 여자는 여자 취급도 하지 않죠.”
나이든 여성이 초라한 노파로 인정받기는 독일도 마찬가지. 특히 젊은 시절에 미모로 인정받던 여성은 자신이 늙어간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심한 우울증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 한국엔 여자들끼리 수다떠는 아줌마 문화가 있지만 부부 중심의 쌍쌍문화인 서구에서는 여성들이 노후에 더 고독해한다고 한다.
“지금에서야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얼마나 우리나라의 정서가 위로가 되는 줄 몰라요. 늙는 것을 자연의 순환으로 여기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거든요. 환갑이 된 지금에야 비로소 국적으로부터, 외모로부터, 남자로부터 자유스러워졌어요. 그렇다고 사랑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고요. 지나온 내 인생에 연연해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인생을 기대하는 거지요.”
흔히들, 그가 두번 결혼해서 아버지가 다른 아이들을 키우며 고생하는 것을 보고 ‘팔자가 세다’ 는 말을 한다.
“사람들 저마다 제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팔자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은 이 팔자를 어떻게 바꿔나가느냐 하는 거지요. 제가 만약 팔자 탓만 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예요. 바꾸어 나가려고 무던히 애를 썼고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그래서 요즈음에는 마음이 참 편안해요.”
20여년간 독일에 살면서도 독일어에 서툴고 아직까지 마늘냄새를 풍기면서 다섯 아이들의 어머니로, 한 남자의 아내로, 예술가로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는 김영희씨. 활짝 웃을 때 잡히는 눈가의 주름이 그가 만든 닥종이 인형마냥 참 편안해 보였다.

여성동아 2004년 1월 4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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