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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황주리의 그림 에세이

겨울에 쓰는 편지

2003. 12. 03

겨울에 쓰는 편지

그녀에게, 2002. 캔버스에 아크릴. 46×53cm


디지털 카메라를 샀습니다. 필름 없이도 찰칵 하고 사진을 찍어내는 신기한 카메라로 겨울바람을 찍어봅니다. 우리집에 어느날 들개 한 마리가 들어오더니 새끼를 일곱 마리나 낳았습니다. 눈도 뜨지 못하고 꼬물거리는 강아지들도 새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우리집 터줏대감인 불독 ‘베티’는 어미 들개를 향해 왜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왔느냐고 으르렁댑니다. 사람에게는 한없이 순한 개가 같은 종족인 개들에게는 사납기 짝이 없습니다. 하느님에게는 선한 양처럼 열심히 기도하면서, 가난한 이웃에게는 아무것도 나누려 하지 않는 심술맞은 사람을 닮았습니다.
올해도 겨울은 거짓말처럼 빨리 찾아왔습니다. 늦은 밤 지하철역에서 잠드는 노숙자들의 시린 발가락 사이로 부는 바람, 이혼한 친구의 갈라진 마음 밭으로 부는 겨울바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포기한 학생들의 우울한 꿈들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봅니다. 수능 시험을 잘 못 보았다고 자살해버린 딱한 여학생의 마음도 찍어봅니다. 아주 오래 전 대학에 가지 못한 급우들이 대입 시험을 앞두고 애써 태연한 척하던 얼굴이 떠오릅니다. 지나고 생각하면 대학에 꼭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시험을 잘 봐야 하는 것도 아니고, 목숨을 걸 만큼 그렇게 중요한 일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이런저런 이유로 불행합니다. 겨울은 역시 봄을 기다리는 데 의의가 있는 시간입니다. 그까짓 봄은 오고 또 오고 수십번 가고 다시 또 오지만 내년 봄은 또 작년과 다른 봄이기에 언제나 가장 소중한 이름, 희망의 이름으로 씩씩하게 겨울을 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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