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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홀가분한 외출

MBC 라디오 〈여성시대〉‘주부나들이’ 동행취재

6백명의 주부들이 떠난 1박2일간의 특별한 여행

■ 글·구미화 기자 ■ 사진·김유미

입력 2003.10.31 17:55:00

전국 각지에서 모인 6백명의 주부들이 아이들과 남편을 두고 1박2일 여행을 떠났다.
매년 가을,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는 주부들의 마음을 달래온 ‘여성시대’가 올해도 ‘주부나들이’를 마련한 것. 두고 온 아이 생각에 울먹이는 신참부터 환갑을 넘긴 베테랑까지 주부들만 참가한 나들이에 동행했다.
MBC 라디오 〈여성시대〉‘주부나들이’ 동행취재

6백명의 주부들은 라디오 공개방송, 캠프파이어, 촛불의식, 체육대회 등에 참여하며 1박2일을 알차게 보냈다.


지난 9월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MBC방송국 앞에는 15대의 관광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소풍 떠나는 어린 아이들처럼 잔뜩 상기된 얼굴로, 수줍은 여고생들처럼 쉴새없이 재잘거리며 차창 밖을 내다보는 사람들은 모두 주부들이다.
매년 가을, ‘주부나들이’ 행사를 열어온 MBC 라디오 ‘여성시대’가 올해도 어김없이 주부들을 집 밖으로 끌어냈다. 9월27일과 28일, 이틀 동안 서울우유 후원으로 강원도 원주 오크밸리로 초대된 6백명의 주부들은‘건강한 주부의 행복찾기’라는 주제로 사연을 보낸 5천여명 중에서 선택된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가족들 도움 없이 내 힘으로 뭔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며 큰소리치고 떠나는 여행이다. 6백명의 평균 나이는 43세, 그러나 나이는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했다.
이날 낮 12시, MBC 사옥 앞에 모인 6백명의 참가자들은 원주로 향하기 위해 가나다순으로 15대의 버스에 나눠 탔다. 버스에 올라타는 순간 같은 차에 탄 사람들은 바로 동지가 됐다. 점심으로 주최측이 준비해놓은 도시락을 먹고,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흰색 중 한가지 색으로 통일해 티셔츠를 갈아입는 동안 처음의 어색함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에겐 굳이 똑같은 색깔의 티셔츠가 아니더라도 하나로 묶어주는 동질감이 있다. 세상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여자 혼자 집을 나와 여행을 떠나기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아이와 남편을 뒤로하고, 관광버스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생각들이 그들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을 것이 분명하다. 버스가 출발하자 한 사람씩 자기 소개를 했는데 세살짜리 아이를 둔 엄마나 시집 간 딸을 둔 엄마나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어린 아이 시집에 맡기고, 고3 딸 혼자 두고 어렵게 떠난 여행
“여기 오려니까 갑자기 일이 막 생기더라고요. 오늘 아침까지 고민 많이 했어요.”(강효순씨)
“20년 만에 이런 나들이는 처음이에요. 제가 종갓집 맏며느리라 서울 살면서도 제대로 나들이 한번 가본 적이 없어요.”(강미순씨)
“세살, 다섯살짜리 떼어놓고 오느라 좀 늦었어요. 그나마 시어머니가 좋은 분이라 이렇게 올 수 있었어요.”(강래선씨)
“이름 부를 때마다 왜이리 떨리나 몰라. 저는 늦둥이 딸이 고3인데요. 고3이기나 말기나 모른다카고 왔어요. 그랬드만 우리 딸이 ‘엄마는 내가 고3인지 아나? 다른 엄마는 숨도 안 쉰다카드만’ 하대요. 근데 우리 남편이 내 여기 온다고 웬일로 차도 태워다주고, 자기 파카(점퍼)도 둘둘 말아줬어요. 이거 입으면 안 얼어죽는다믄서(웃음). 그 카고 우리 남편은 낚시 갔부렀어요. 우리는 내외가 둘 다 바람났어요(웃음).”(강화선씨)
한 순간도 가족을 생각 밖으로 밀어내지 못하던 그들이다. 그런데 꼬박 이틀 동안, 그것도 아이들과 남편이 모두 집에 들어앉아 차려주는 밥상을 들이밀기만 기다리고 있는 주말에 홀로 집을 떠나온 것이다. 결국 아들 딸 자랑에 은근히 남편 흉도 보면서 가족들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남이 차려주는 밥상 앞에 앉아 먹기만 하면 된다는 것만으로도 절로 웃음이 나는 모양이었다.
장기자랑을 대비해 노래를 준비해온 주부도 있었다. 세 아이와 시누이까지 함께 산다는 부산의 강옥숙 주부는 남편과 시누이가 “단 하루 외박은 허락하겠다”고 해 결혼 15년 만에 첫 나들이가 성사됐는데 남편이 상품이라도 하나 타와야 하는 것 아니냐며 노래방에 데리고가 노래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그는 결국 버스 안에서 가수 이용의 신곡 ‘후회’를 간드러지게 불러 박수를 받았다.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쉴새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버스는 강원도 원주 깊숙이 자리잡은 오크밸리로 들어섰다. 경주 보문단지보다 넓다는 오크밸리의 자태가 드러나자 주부들이 탄성을 질러댔다. 잔디를 곱게 깎은 넓은 골프장과 외국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는 이국적인 숙박시설들이 그들을 매료시킨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을 가슴 벅차게 한 것은 돈걱정, 밥걱정 없이 그저 내 몸 하나 챙기며 즐기다 가면 된다는 해방감이었을 것이다.

MBC 라디오 〈여성시대〉‘주부나들이’ 동행취재

야외에서 진행된 공개방송 때 그룹 ‘사랑과 평화’의 열창에 주부들이 환호하고 있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아이들과 남편에 대한 걱정들을 완전히 뒤덮어버리자 영원히 사라진 줄만 알았던 소녀시절의 감성과 끼를 자극하는 불꽃이 터져 올랐다. 드디어 주부들의 사연을 대신 전해주는 ‘여성시대’ 진행자 양희은과 전유성이 무대에 올라 큰맘 먹고 집을 떠나온 주부들을 반갑게 맞았다. 6백명의 주부들을 위한 ‘여성시대’ 공개방송이 야외에서 시작된 것이다. 민해경 이광조 한동준 권진원 여행스케치 자두 사랑과 평화 등 여러 가수들이 나와 주부들의 흥을 돋우었다.
그러나 이번 나들이의 절정은 뭐니 뭐니 해도 공개방송 뒤에 이어진 장기자랑. 15개조로 나뉜 주부들은 각 조별로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장기자랑을 준비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저 많은 재주와 끼를 그동안 어떻게 억누르고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노래와 춤, 성대모사까지 다들 수준급이었다. 몸을 아끼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티셔츠를 배꼽 위까지 말아올리고 무대 위에 올라 화려한 율동으로 관중을 사로잡은 주부들도 있었다. 어느새 공연장 주변은 주부들의 용기와 열정에 박수를 보내는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배꼽티 만들어 입고 무대에 오른 주부들, 장기자랑 시간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어
그리고 이어진 건 단체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캠프파이어. 저마다 하나씩 손에 든 초에 불을 켜고, 지난날을 돌아보며 가슴에 묻어둔 응어리들을 모두 쏟아냈다.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그리고 딸로서 참고 포기해야 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주부들이 대부분이었다.
서로 가슴에 남은 상처를 눈빛으로, 마음으로 어루만지며 후련해진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오니 시계 바늘은 어느새 자정을 가리켰다. 계속된 일정에 피곤할 만도 한데 학창시절 수학여행을 떠올리며 밤새 이야기를 나누는 주부들이 있는가 하면 가방 속 깊숙이 넣어 온 술을 꺼내 회포를 푸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처음 만났지만 닮은 구석이 많은 이들과 함께 하룻밤을 보낸 뒤 맞은 아침, 식구들 끼니 챙기느라 분주할 필요없이 오크밸리 이곳 저곳을 돌며 산책하는 여유도 부릴 수 있었다. 아침식사로 나온 북엇국을 먹으며 주부들은 이구동성으로 “내가 어젯밤 술 먹은 것까지 어떻게 알고 이렇게 북엇국을 끓여놓았냐”며 놀라움과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번 나들이의 마지막 행사인 체육대회는 6백명을 4개 팀으로 나눠 장애물달리기, 줄다리기 등으로 승부를 가렸다. 그물을 통과하고, 손을 뒤로 한 채 밀가루 속에 감춰진 사탕을 먹고, 줄에 매달린 과자를 따먹고, 우유 한 팩을 마시고….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를 연상시키는 장애물달리기는 릴레이로 진행됐는데 양희은과 전유성, 여행스케치의 두 멤버가 각각의 팀을 대표한 마지막 주자로 나섰다. 전유성은 맨발로 달리는 투혼을 발휘해 주부들의 환호을 자아냈으나 승리는 양희은의 팀으로 돌아갔다. 우승한 팀은 어릴 적 운동회를 회상하며 상품으로 연필과 공책을 받았다.
이것으로 모든 일정이 끝났다. 이제 돌아가는 것만 남았다. 주부들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한층 생기 있어 보였다. 5백99명의 동지가 생겼는데 왜 안 그렇겠는가. 점심을 먹고 집으로 향하는 차안에서는 ‘관광버스춤’으로 마지막 불꽃을 태운 뒤 ‘언니’ ‘동생’ 하며 못다한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며 서울로 향했다. 조용해진 차안엔 처음 떠날 때와 달리 휴대전화 벨소리가 부쩍 자주 울렸다. 하나 둘씩 가족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였다. 어디쯤 왔느냐는 확인 전화서부터 기대치 않은 마중에 대한 예고까지 이틀간의 화려한 외출을 접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주부들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주었다.
가족을 두고 주부 혼자 떠나는 여행이 본인에게만 낯선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단 이틀 동안이지만 엄마의 빈자리, 아내의 빈자리는 아마도 하염없이 커져갔을 것이다. 주부들에게 혼자 떠나는 여행을 권하고 싶다. 누구 엄마가 아닌 내 이름 석자를 찾고, 나를 닮은 친구를 만나고, 사라져버린 줄만 알았던 젊음과 열정을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여성동아 2003년 11월 4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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