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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유인경의 Happy Talk

새로운 도전 즐기는 그레이스 리 할머니

입력 2003.10.31 14:20:00

그레이스 리는 70∼80년대 멋쟁이들 사이에서 ‘헤어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그는 이제 칠순을 넘긴 나이가 됐지만 여전히 그의 손길만을 고집하는 단골들이 있다. 그런데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의 요리솜씨에 더 감탄한다. 그에겐 음식 재료의 특성과 맛을 감별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감각을 살려 새로운 도전을 했다.
혼자 통영에 내려가 중국 음식점을 연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이미 또 다른 도전을 구상중이라고 한다. 20년 넘게 알고 지낸 그는 결코 늙어간다는 이유로 자신의 호기심과 재미를 거부하는 일이 없다.
나도 그처럼 늙어가고 싶다. 성공해야겠다는 강박관념 없이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는 사명감 없이 늘 재미있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나이를 먹고 싶다.
새로운 도전 즐기는 그레이스 리 할머니

“인경씨, 언제라도 놀러와. 맛있는 음식 잔뜩 만들어줄게.”
전화기를 통해 전해지는 목소리가 활어처럼 펄펄 뛴다. 전화를 건 주인공은 그레이스 리. 일흔두살의 나이에 연고도 없는 경남 통영에 내려가 중국식당을 열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개업하자마자 식당에 손님이 몰려들어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 모양이다.
솔직히 지난 여름, 통영에 식당을 열겠다고 처음 이야기했을 때만 해도 과연 이 불경기에 장사가 될까 싶었다. 게다가 ‘매미’란 무서운 태풍이 한바탕 휩쓸고 갔기에 당연히 계획을 포기할 줄 알았다. 그런데 도무지 겁이 없는 건지 철이 없는 건지 이 할머니는 홀연히 통영으로 내려가 손수 장소를 물색해 계약하고, 인테리어 컨셉트를 정하고, 광고 전단지까지 만들었다.
그는 얼마 전 유방암 수술을 받아 수시로 각종 검사를 받아야 하고, 과로는 절대적으로 피해야 하는 상태다. 그런데도 늘 새로운 일을 꿈꾸고, 결심이 서면 당장 행동에 옮기며 젊은이들도 해내지 못할 일을 척척 해낸다. 식당 일이 좀 복잡한가. 재료를 구하기 위한 장보기부터 종업원 관리까지 머리가 터질 것 같을 텐데…..
그레이스 리는 70∼80년대 멋쟁이들 사이에서 ‘헤어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렸다. 72년 미국에서 귀국해 단발머리 선풍을 일으키고, 집에서 직접 머리를 손질할 수 있는 헤어드라이어를 소개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세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로 생활하다 나이 서른일곱에 이혼을 하고 미국으로 떠나 그곳에서 미용 기술을 배웠다. 마흔을 앞둔 나이에 미용실 청소와 머리 감기기부터 시작한 것이다. 훗날 그는 폴 미첼 등 세계적인 헤어디자이너와 교우하며 최고의 헤어디자이너로 인정받았다. 미국의 유명 패션잡지 ‘보그’에 소개되기도 했다. 지금도 그가 만져주지 않으면 머리를 하염없이 기르고 말겠다는 단골들이 있어 그는 종종 후배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들러 가위를 든다.

전업주부에서 헤어디자이너로 변신 미국의 유명 패션잡지 ‘보그’에 소개되기도
그런데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의 미용솜씨보다 미각과 요리솜씨에 더욱 감탄한다. 그에겐 마치 예민한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재료의 특성과 음식의 맛을 감별해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타고난 재능도 있겠지만 그는 지금껏 번 돈의 70%를 먹는 데 썼다고 고백한다. 한국은 물론 세계의 유명 음식점을 다니며 음식을 맛보고 다양한 경험을 한 덕분에 조금이라도 흠이 있는 재료는 단번에 그에게 걸려들고 만다.
한번은 일류식당에서 그가 “이봐요, 이거 좀 오래 된 것 아니에요?” 하고 지적했더니 바로 주방장이 나타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했다. 그 주방장은 시효가 지나긴 했지만 일반인들의 미각으론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라고 생각해 오래 된 재료를 그대로 썼다며 그레이스 리의 미각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는 덕분(?)에 그레이스 리 선생과 식당에 가면 공짜로 식사를 하게 될 때가 있다.

새로운 도전 즐기는 그레이스 리 할머니

그런 뛰어난 감각을 살려 그는 나이 칠순에 새 인생에 도전한 것이다. 요리사 겸 음식점 주인. 일생에 가장 많은 돈과 시간을 들인 음식에 투자해 또 한번 실험을 해보고 싶어서라고 한다. 그는 사실 3년 전에도 서울 청담동에 ‘시즌’이란 이름의 퓨전음식점을 열었었다. 물론 손님이 들끓었지만 흑자를 낼 수는 없었다. 워낙 고급 재료를 쓰다 보니 남는 게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 가게를 가수 싸이의 어머니가 인수해 성업중이다. 가게를 남의 손에 넘기고는 돌연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을 찾아야겠다더니 통영에서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너무 흥분되고 즐거워. 맛있는 음식을 이웃과 함께 맛볼 수 있는 것처럼 보람 있고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어? ‘바로 이런 게 제대로 된 중국음식이다’ 하는 걸 알려주는 걸로도 충분히 즐거워.”

고급 음식점 주방장도 놀라는 탁월한 입맛, 그의 도전은 쭈~욱 계속된다
그의 넘치는 에너지는 끝없는 호기심과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 같다. 새로 시작하는 영화나 연극, 뮤지컬 등을 거의 빼놓지 않고 보고, 베스트셀러 책들을 꼭 챙겨 읽는다. 전시회를 찾아다니는 것도 그의 취미 중 하나. 덕분에 그는 젊은이들과 어떤 대화를 해도 전혀 세대차이를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흥이 나면 새벽까지 음주가무를 즐겨 젊은이들이 백기를 들 정도다.
20년 넘게 알고 지낸 그분 곁에 있으면 나이 드는 것이 별로 걱정스럽지 않다. 성형수술로 주름을 펴거나 안 늙겠다고 각종 보약을 지어 먹을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자연스럽게 노화를 받아들이되 늙어간다는 이유로 자신의 호기심과 재미를 거부하지 않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함께 오노 요코와 피카소의 에로틱한 그림 전시회를 보러갔는데 야릇한 성애 장면을 보고선 “어머, 피카소가 팔순 가까운 나이에 그린 거로군. 충분히 공감해”하며 미소를 지었다.
나도 이렇게 늙어가고 싶다. 성공해야겠다는 강박관념 없이,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는 사명감 없이 늘 재미있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나이를 먹는 것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다니고, 슬픈 영화를 보면서 펑펑 울고, 로맨스 소설을 읽으며 가슴이 뛰는 소리를 확인하면서 신나게 살고 싶다. 무슨 일이건 결과보다 과정을 즐기며 여행하듯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이 들어 얼굴에 주름살은 가득하고 머리는 하얗게 바래도 항상 잘 웃고 마음을 열고 사람들을 대한다면 결코 외롭지 않을 것 같다.
그 흔한 보석 하나, 밍크 코트 한벌 없는 그레이스 리 할머니가 참 근사해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못 말리는 할머니는 벌써 또 다른 일을 구상중이라고 한다. 중국음식점은 무사히 개업했으니 이젠 다른 일을 시도하고 싶다는 것이다.
“다음 주에 서울 가면 나랑 상의 좀 하자고. 새로 문 연 맛있는 식당이 있으면 알아놓아. 오래간만에 파스타를 먹을까?”
나는 “일이 힘들어 못해먹겠다”고 징징대다가도 그분의 전화를 받으면 정신이 번쩍 난다. 그래, 맛있는 것 먹고 힘내자!


여성동아 2003년 11월 4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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