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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집념에 산다

45년간 세계 60여개국 다니며 에디슨 발명품 수집해 전시회 열고 있는 손성목씨의 별난 수집 이야기

“에디슨 축음기 구하려다 노상강도 총에 맞아 죽을 위기도 겪었죠”

■ 기획·최호열 기자 ■ 글·박진숙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3.10.10 18:40:00

45년간 세계 60여개국 다니며 에디슨 발명품 수집해 전시회 열고 있는 손성목씨의 별난 수집 이야기

축음기와 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발명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디슨의 발명품들을 한자리에 모은 ‘에디슨 네버랜드’전이 현재 국립서울과학관에서 열리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전시되는 물건들은 모두 참소리박물관 관장인 손성목씨(61)의 개인 소장품들이다. 손씨는 에디슨 못지않은 집념으로 45년 동안 세계 60여개국을 돌아다니며 축음기를 비롯한 에디슨의 발명품을 수집, 이제는 ‘에디슨의 고향’ 미국보다도 더 많은 에디슨의 유물과 발명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축음기는 내 친구이고, 에디슨은 내 인생입니다. 축음기를 통해서 참된 소리를 알게 됐기 때문에 하나 둘씩 수집하게 됐죠. 축음기를 수집하다 보니 그것을 발명한 에디슨이 궁금해지더군요. 그래서 그의 발자취를 좇으며 20여년 전부터 에디슨의 발명품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손관장이 모은 수집품은 어마어마하다. 축음기가 6천여점, 음반이 15만점, 액세서리 등 관련 자료가 15만점에 달한다. 그는 93년에 이미 7백대의 축음기를 보유, 이 분야 최다 소장자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수집가는 집념보다 ‘욕심’이 있어야 이 일을 해낼 수 있어요. 내가 수백개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가진 한개마저 내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그래서 어딘가에 물건이 나왔다는 소문이 들리면 지금도 지구 끝에 있다 해도 달려갑니다. 그놈을 손에 넣을 때까지는 잠이 오지 않으니 도리가 없지요.”
손관장이 물건을 구입하는 경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말 그대로 ‘소문’을 따라 발품을 팔아가며 산 넘고 물 건너 찾아내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유명한 국제경매장을 통해서다. 그가 영국의 크리스티소더비 경매장에서 ‘외상’으로 물건을 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놀랍다. 그도 그럴 것이 손씨가 경매장에 들어서면 다른 수집가들은 모두 손사래를 칠 정도라고 한다. 에디슨의 이름이 붙은 물건은 가격이 아무리 올라가도 사겠다는 피켓을 내리지 않고 계속 들고 있는 그를 당해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진품을 싼 값에 사서 비싼 값에 팔 목적을 가진 다른 수집가들과 달리 손씨는 자신의 ‘득과 실’을 따지지 않기 때문에 가격 경쟁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젠 경매장에 가면 다른 수집가들이 내게 어떤 물건을 살 거냐고 먼저 묻죠. 이러이러한 물건들을 살 거라고 말하면 그 물건들은 아예 손도 대지 않아요. 오히려 경매 관계자나 수집가들이 새로운 축음기와 에디슨 발명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줄 정도니까요.”
경매장을 통해 물건을 구입하는 과정이 ‘돈’으로 해결되는 일이었다면, 발품을 팔아야 하는 일은 돈과 더불어 노력이 필요했다. 때론 목숨까지도 위협받는 위험한 일이다. 지구상에 딱 하나뿐인 축음기 ‘아메리칸 포노 그라프’를 손에 넣은 과정은 골동품계에서도 유명하다. 손관장이 이 축음기의 행방을 안 것은 82년. 당시 아르헨티나의 제일가는 부호에게 이 물건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 두번이나 아르헨티나를 방문했지만 만나지 못했다. 오히려 노상강도를 만나 돈을 다 뺏기고 총상까지 입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손관장이 아니었다. 85년 8월 이 물건이 국제경매장에 나오자 손관장은 남들이 상상 못할 고가를 불러 마침내 축음기를 손에 넣었다. 낙찰이 확정됐을 때 그는 너무나 기뻐 옆사람을 부둥켜안고 환호를 지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고 한다. 뒤늦게 그 축음기의 가치를 안 일본인이 몇배의 가격을 제시하며 팔라고 했지만 그는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다른 사람 손에 넘길 생각이 없다.
“우여곡절 끝에 원하던 물건을 얻게 되면 정말 가슴이 벅차요. 사실 총상이나 칼에 맞는 위험한 일을 겪고 나면 아무리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두번 다시 수집하고 싶지 않거든요. 이럴 때면 축음기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다’고 말하면 축음기들이 그래요. ‘이런 시련을 겪지 않고 어떻게 세계적인 박물관을 만들려고 하느냐’고. 축음기들의 격려에 다시 힘을 얻는 거죠.”

45년간 세계 60여개국 다니며 에디슨 발명품 수집해 전시회 열고 있는 손성목씨의 별난 수집 이야기

전시실(위 사진)과 전경에디슨이 직접 제작한 축음기(아래 사진).


그가 축음기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다섯살때. 이북이 고향인 손씨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안타깝게도 다섯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다. 실의에 빠진 그가 어머니 대신 정을 쏟은 대상이 바로 축음기였다. 그뒤 6·25전쟁 중에도, 1·4후퇴 때도 손관장이 어깨에 둘러멘 피난 보따리에는 장난감이나 먹을 것이 아닌 축음기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축음기는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가 ‘수집 열병’을 앓게 된 계기는 14세 때 찾아왔다. 당시 여러 대의 축음기를 가지고 있던 삼촌의 고장난 축음기를 밤새 뜯어내고 다시 조립해 고쳐낸 것. 그 순간 마치 에디슨이 된 것 같았고, 축음기로 음악을 들을 때와는 또다른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45년간 세계 60여개국 다니며 에디슨 발명품 수집해 전시회 열고 있는 손성목씨의 별난 수집 이야기

“이 맛에 ‘미쳤던 것’ 아닌가 싶어요. 지금도 축음기를 구입하면 재조립하는 버릇이 있어요. 고장난 축음기는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고쳐 소리를 듣곤 합니다. ‘미친 놈’ 소리도 참 많이 들었어요. 16세 때는 옆집에 불이 났는데 불길이 내 방까지 번졌어요. 전 목숨을 걸고 불길 속을 뚫고 들어가 방에 있는 축음기 5대를 모두 꺼내왔어요. 이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너 정말 미쳤구나’ 하셨을 정도죠.”
그뒤 전국 방방곡곡 축음기가 있다는 곳을 찾아다니던 손관장은 74년 현대건설 직원으로 중동 사막에서 근무하면서부터 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일이 끝나면 사우디아라비아의 부호들이 싸게 내놓은 축음기와 음반들을 사들여 한국으로 부치기 바빴다. 3년 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의 수집벽은 끝나지 않았다. 끝나기는커녕, 축음기 박물관을 세우겠다는 야망을 키워나갔다.
87년 사업에 뛰어든 그는 건설회사를 세워 아파트를 지으면서 모은 돈도 몽땅 축음기 수집에 쏟아부었다. 수집한 물건들은 92년부터 자신이 경영하던 건설 회사에서 지어 분양한 아파트 단지에 3층 건물을 따로 짓고 차곡차곡 수납해 ‘소리축음기 박물관’이라는 문패를 달고 일반인들에게 공개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참소리 박물관’의 효시다. 건물 공간이 비좁아 진열하지 못한 소장품들은 미분양 아파트 2채와 아파트 단지 공터에 들여놓은 콘테이너에 일부 보관하고, 그래도 남는 것은 차고 속에 들여놓았다.
45년 동안 수집한 물건들의 값을 묻자 “값을 말하면 그 순간부터 가격이 올라가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손관장은 “1백달러에 산 물건을 10년 뒤에 내놓으면 열배가 오르는 것이 아니라 백배가 오르는 게 골동품이다. 골동품은 부르는 게 값이어서 판다는 소식이 들리면 지체하지 않고 얼른 사는 것이 이익”이라고 한다. 그의 소장품 중엔 강남의 웬만한 아파트 한채 값을 웃도는 것도 있다고 하니 그의 소장품 전체를 값으로 환산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다행히 경제적인 어려움은 비교적 적었어요. 아버님이 물려주신 재산과 사업을 하면서 번 돈을 전부 수집에 쏟아부었죠. IMF가 왔을 때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가 나서 어려움이 따르긴 했지만 박물관 운영이나 수집에 들어가는 돈을 줄여본 적은 없었어요. 덕분에 우리 식구들은, 살던 집마저 경매로 넘어가서 지금은 임대아파트에서 전세로 살고 있지만요(웃음).”

45년간 세계 60여개국 다니며 에디슨 발명품 수집해 전시회 열고 있는 손성목씨의 별난 수집 이야기

‘에디슨 네버랜드’전을 관람하는 어린이들에게 에디슨 발명품에 대해 설명하는 손성목 관장.


손관장의 으뜸 후원자는 역시 가족이다. 현대무용을 전공한 부인 우종숙씨(54)는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지녀 결혼 초부터 남편의 일을 지지해주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공수하는 소장품들을 받아 정리하고 관리해준 사람도 아내고, 찜통 같은 더위에 박물관 매표소에서 표를 팔았던 사람도 아내다. 어디 그뿐인가. 뉴욕 한복판에서 칼을 든 강도를 만났을 때도 손관장의 옆에는 아내가 있었고, 그 뒤로 이 일을 말리기보다 그의 건강을 염려하며 매일 기도하는 사람도 아내다.
“아내가 없었다면 이 일을 끝까지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정말 고마운 사람이죠. 하지만 요즘은 아이들 결혼도 시켜야 하고, 우리 부부 노후도 걱정된다면서 불만을 표시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제가 수집하는 일에 미쳐있는데…. 이 병은 도저히 고칠 수가 없는 걸요(웃음).”
다행스럽게도 손관장의 두 자녀 모두 아버지의 일을 자랑스러워한다. 큰딸 소리씨(27)는 최근 영국에서 박물관 큐레이터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아버지를 돕고 있다. 그녀는 “아버지는 음악을 정말 좋아하셨어요. 집에서도 텔레비전을 보지 못하게 하고 음악을 들으라고 하셨죠. 그래서 아버지가 외국에 나가시면 못 보던 텔레비전을 실컷 볼 수 있어서 어린 마음에 좋아했었어요(웃음). 그때는 아버지가 늘 바쁘기만 해 섭섭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 이해해요. 저도 아버지의 뜻을 이어 앞으로 박물관과 결혼할 생각이에요” 하며 당찬 포부를 밝혔다.
‘참소리박물관’은 새로운 터전으로 곧 이사할 예정이다. 장소도 비좁고, 전시물에 치명적인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강릉 해안에 자리잡고 있어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열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잖아요? 수집품들도 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똑같이 소중하지요. 가슴 아픈 점은 아직까지 세상 구경 못한 자식들이 창고에 그득하다는 겁니다. 그 아이들에게 세상 빛을 보여주고 싶어요. 세계적으로 손색없는 ‘축음기 에디슨 박물관’을 강릉뿐만 아니라 서울, 제주도에 세워 후세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제 마지막 꿈이랍니다.”
에디슨에게는 발명을 위한 책상과 발명 공장을 운영하기 위한 책상, 이렇게 두개의 책상이 있었다고 한다. 손관장은 자신도 에디슨처럼 두개의 책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하나는 수집을 위한 책상, 또 다른 하나는 박물관을 운영하는 책상이라고. 이처럼 에디슨과 닮은 삶을 살아가는 그의 ‘욕심’은 발명을 위해 3백년을 살고 싶어했던 에디슨만큼이나 끝이 없어 보였다.


여성동아 2003년 10월 4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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