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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만에 영화감독에 재도전하는 개그맨 이경규

■ 글·김지영 기자 ■ 사진·지재만 기자

입력 2003.09.04 18:15:00

개그맨 이경규가 영화 ‘복수혈전’ 참패의 아픔을 딛고 다시 메가폰을 잡는다. 남파 간첩이 겪는 문화충돌과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풍자적으로 그린 블랙코미디 ‘우리가 몰랐던 세상’이 그것. 개그맨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시절, 영화 제작에 실패해 아픔을 겪은 그가 영화에 재도전하는 이유.
12년 만에 영화감독에 재도전하는 개그맨 이경규

인기 MC로 방송가를 누비고 있는 개그맨 이경규(43)가 다시 영화계에 출사표를 던졌다. 영화 ‘우리가 몰랐던 세상’(가제)을 제작, 연출하는 것. 그의 영화감독 복귀는 지난 91년 영화 ‘복수혈전’의 흥행 실패 이후 12년 만의 일. 햇살이 눈부신 오후 전망 좋은 카페에서 만난 그는 영화 준비로 몹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이번 영화에서 저의 역할은 제작자 겸 감독이에요. 처음에는 시나리오까지 직접 썼는데 전문가가 아니라 영 엉성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에피소드와 소재를 제공하고 ‘약속’ ‘와일드 카드’ ‘보리울의 여름’ 등을 쓴 이만희 작가가 시나리오 작업을 해왔어요. 지금 막판 수정 작업을 거치고 있으니 8월말이면 시나리오가 완성될 거예요.”
9월 초 제작발표회를 열고 촬영에 들어가는 ‘우리가 몰랐던 세상’은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남북의 이념적 갈등과 문화 차이를 한 남파 간첩의 이야기를 통해 풍자적으로 그린 블랙코미디. 이경규가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가장 염두에 둔 부분은 리얼리티다.
“북한문제가 세계적인 이슈가 돼서인지 최근 들어 북한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줄줄이 제작되고 있어요. 하지만 북한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은 거의 없어요. ‘공동경비구역 JSA’가 그나마 사실에 가장 근접한 영화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이번 영화를 한 간첩의 증언을 토대로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할 거예요. 지난해 우연히 북한 공작원 출신인 사람을 알게 됐는데 그 친구 얘기가 우리나라에서 만든 대부분의 북한 소재 영화들이 말도 안되는 코미디래요. 자기네들끼리는 너무 어이가 없어 웃고 만다면서요. 거기에 충격을 받고 이왕이면 북한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내 손으로 만들어보자고 마음먹었고, 그 각오가 12년 만에 다시 저를 영화판으로 이끌었어요.”
이경규가 들려준 북한 공작원들의 실상은 참으로 놀라웠다. 간첩이 되기 위해서는 김일성 정치군사대학과 분치소라는 훈련소를 거치며 무려 9년 동안 훈련을 받아야 하고, 그중에서 가장 성적이 우수한 사람이 남파된다는 것. 그들에게 애로 사항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현실이 교관에게 배운 남한의 실상과 많이 다른 점이라고 한다.

“이번에는 흥행에 성공해서 자랑스런 남편이자 아빠가 되고 싶어요”
“그 대학 지하벙커에 7km의 폭으로 서울 거리를 만들어놓았는데 다방, 퇴폐이발소, 호텔, 약국까지 죄다 똑같대요. 거기서 교육을 시키는 교관은 고기 잡다가 납치된 어부들, 월북한 사람들이고요. 경상도, 전라도 등 다양한 사투리부터 서울 지리, 남한의 문화, 욕설까지 배우는데 막상 와보면 너무 다르대요. 교관들은 80년대의 한국밖에 모르는데 우리나라가 너무 빠르게 발전해서 남파 간첩이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거죠. 그래서 문화충돌을 겪을 수밖에 없는데 그 에피소드가 너무 재미있어요. 우리 영화의 소재가 바로 그거죠. 하지만 마냥 웃기는 영화는 아니에요. 간첩의 눈으로 본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꼬집되 무거운 영화가 되지 않도록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로 엮었어요.”

12년 만에 영화감독에 재도전하는 개그맨 이경규

북한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이경규.


‘북한 전문가’가 된 듯 간첩 이야기를 마냥 늘어놓는 그를 보고 있자니 문득 이번 영화 제작에 대한 가족의 반응이 궁금했다. ‘복수혈전’의 참패로 정신적, 물질적 고통을 함께 겪은 아내의 입장에서 그의 영화 제작이 달가운 소식은 아닐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에 아내는 “절대 안된다”며 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영화 내용을 알고 나서는 스스로 입소문을 내고 다닐 정도로 적극 지지해주고 있다고.
“저한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번 영화가 잘못되면 얼굴도 들고 다닐 수 없으니 잘 만들어야 한다고 해요. 저도 이번에는 꼭 흥행에 성공해서 아내나 딸아이에게 자랑스러운 남편이자 아빠가 되고 싶어요. ‘복수혈전’을 만든 직후 저와 결혼해서 아내가 많이 힘들었거든요. 빚더미에 올라앉았는데, 출연해달라는 프로그램은 없고, ‘일요일 일요일 밤에’마저 세대교체를 해 MC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으니까요. 인기란 참 덧없는 것이더라고요. ‘일·밤’의 ‘몰래 카메라’ 코너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는데 영화 한편 잘못 만들었다고 세상이 저를 외면하더라고요. 그 때문에 2년간 정말 힘들었어요. 빚도 갚고, 먹고 살아야겠기에 밤무대를 전전했죠. 잘 나갈 때는 회당 수천 만원을 준다고 해도 밤무대는 안 뛰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좋은 인생 공부를 한 것 같아요.”
95년 이경규는 2년 만에 ‘일·밤’에 복귀해 교통법규 계도 코너인 ‘이경규가 간다’로 범국민적인 사랑을 받으며 재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인기에 연연하던 ‘철부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고, 선후배를 따뜻하게 챙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일까. 그의 영화 제작 소식을 들은 학교 동창들이 자진해서 도움을 주고 있다. 액수는 비록 소소하지만 “이번엔 잘해보라”며 격려해주는 그들의 푸근한 마음에 수백만 관객을 동원한 흥행 감독이 부럽지 않다는 이경규. 그가 이번 ‘복수혈전’을 통해 통쾌한 흥행펀치를 날리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여성동아 2003년 9월 4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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