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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황주리의 그림 에세이

“비 오는 날에는 삼청동에 가자”

2003. 07. 31

“비 오는 날에는 삼청동에 가자”

그녀에게, 2003, 캔버스에 아크릴릭, 91×73cm.


어릴 적 기억 속의 8월은 늘 주룩주룩 장대비가 쏟아지는 장마로 남아 있다. 대청마루에 엎드려 여름방학 그림일기를 쓰던 내가 어느새 마흔살하고도 중반을 넘기고 있는데도 그때의 비는 오늘의 비와 다르지 않다. 8월이면 늘 텔레비전에서 물난리를 겪는 장면들과 갈 곳 없는 수재민들의 슬픔을 본다. 세상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변했고, 아무리 컴퓨터라는 기상천외한 발명품이 탄생했다 해도 여전히 수재민의 실태를 방영하는 텔레비전 뉴스 속보는 변한 게 없다.
아무리 인간들이 잘난 척을 해도 그 작은 숨결 하나 거스를 수 없는 하늘의 뜻을 헤아려본다. 정말 하늘의 뜻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하늘 맘대로 쏟아지는 오늘 저 비는 무섭게 쏟아지지 않는 시원하고 기분 좋은 비다. 비는 늘 내게 휴가 같은 것이다.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소설책을 읽거나 비디오를 봐야 할 것 같은 비 오는 오후. 이런 날엔 삼청동엘 가고 싶다. 우산을 쓰고 화랑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길을 따라 계속 걷다가 수제비와 단팥죽을 먹고 쾌적한 찻집에 앉아 커피 한잔 마시는 기분. 그게 아니라면 스파게티에 와인을 한잔 곁들여도 좋으리라. 동행이 있으면 더욱 좋겠다.
삼청동 길은 내가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길이다. 그 옛날 대학 시절 삼청동 입구에 ‘미래향’이라는 찻집이 있었다. 그 이름이 좋아 자주 가던 그곳은 이제 사라져 없지만, 그 이름은 아직도 내게 향수로 남아 있다. 미래향, 미래를 향해 가는 곳이라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미래의 향기라는 뜻이었을까? 향기로운 각자의 미래를 향해, 이왕이면 향긋한 추억만을 더듬으며 비 오는 날엔 삼청동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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