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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 춤으로 승화해낸 춤꾼 윤혜정

■ 글·조득진 기자 ■ 사진·최문갑 기자

입력 2003.07.09 16:03:00

최근 사그라지는 전통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공연이 펼쳐졌다.
바로 ‘윤혜정의 춤, 부리 푸리’가 그것. 관객들의 마음속에 애절함을 불러일으킨 그의 춤사위엔 남다른 사연이 있다.
사별의 한을 춤으로 승화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 춤으로 승화해낸 춤꾼 윤혜정

모두 숨죽인 무대 위, 그윽한 조명이 한 여인네의 몸을 비춘다. 구슬픈 국악 가락과 함께 시작되는 춤사위. 독특한 살풀이 장단에 맞추어 제 몸보다 긴 소맷자락을 허공에 던지는 가냘픈 여인의 모습이 관객을 사로잡는다.
지난 6월16일 저녁,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펼쳐진 는 오랜만에 맛보는 전통춤의 한마당이었다. 이어지는 태평무와 장고춤에선 전통의 흥과 멋을 담아내더니 이내 벽계수와 듀엣으로 춤을 추는 황진이로 변신, 사내들의 마음을 빼앗는 몸놀림을 보여준다.
“이날 단 한차례의 공연을 위해 지난 겨울부터 많은 땀을 흘렸어요. ‘부리’는 끼라는 뜻이고, ‘푸리’는 풀이를 늘여놓은 말이에요. 살풀이를 뜻하기도 하고, 자유로움을 의미하기도 하죠. 한마디로 이번 무대는 제 안에 담겨진 모든 끼를 내뿜은 자리였어요.”
갈수록 전통춤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고 있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전통을 계승하고, 현대화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차세대 전통춤의 주역으로 불리는 윤혜정(32). 그는 국립무용단에서, 대학 강단에서 익혀온 춤사위를 통해 전통춤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그가 전통춤을 시작한 것은 여섯살 무렵. 이후 26년 동안 승무 살풀이 바라춤 상고돌리기 등 전통춤의 모든 분야를 익힌 몇 안되는 ‘재원’으로 성장해왔다.
“전통춤을 배우고 싶었는데 마침 동네에 학원이 생겼어요. 바로 등록을 했는데 원생들이 생기지 않아 한동안 혼자 배웠죠. 학원 원장님한테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제겐 큰 행운이었던 셈이에요. 쌍둥이 원장님에게서 모든 분야의 전통춤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덕분에 대학 진학을 위해 입시 위주의 전통춤을 배우는 또래의 아이들과 달리 그는 전통춤의 다양함을 맛보았다. ‘어느 장르를 맡겨도 훌륭하게 소화해낸다’는 평을 들을 수 있는 것도 그때의 소중한 경험 때문이라고.
이날 공연중 관객들의 심금을 울린 것은 ‘애상’이라는 무대. 처음에는 진양조로 느리게 시작하다가 점차 급한 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로 바뀌어 가며 감미로움과 애절함을 한데 어우른 무대였다. 서른두살의 젊은 여자의 표현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는 평. 그의 예사롭지 않은 춤사위엔 아픈 사연이 담겨 있다.

‘남편은 잃었지만 춤만은 놓치지 않겠다’ 사별 후 다시 무대에 서며 다짐
“남편은 대학에 입학해 첫 미팅에서 만난 사람이었어요. 제겐 첫사랑이었죠. 무용하는 사람답지 않게 수수한 제 모습이 좋다고 하더군요. 저 또한 진지하고 착한 그에게 끌렸고요. 같은 학교라 늘 붙어다녔죠.”
그렇게 연애하기를 7년째인 지난 97년, 두 사람은 주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외국계 회사에서 튼튼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남편과 국립무용단에서 촉망받는 무용가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그는 신혼의 단꿈에 젖어들었다.
하지만 신혼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혼 1년 반 만인 98년 어느날, 남편에게 백혈병이라는 진단이 내려진 것이다.
“해외 공연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남편은 이미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어요. 제 공연에 방해가 될까봐 연락을 안했다고 하더군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죠. 잦은 공연 때문에 늘 함께 있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그 간절한 시간을 얼마 함께하지도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 춤으로 승화해낸 춤꾼 윤혜정

전통춤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서구적 외모.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내면에 담겨진 감성을 모두 끌어내 춤사위로 풀어내고 있다.


이후 1년 반의 투병생활. 남편이 시한부 판정을 받고 나자 그는 슬픔과 절망 속에서 허덕여야만 했다. 여섯살 때부터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학교와 학원, 개인레슨이 생활의 전부였던 그, 그러나 당시 그에게 춤은 더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국립무용단에 사표를 제출하고 남편의 병간호에 매달렸다. 연습복이며 슈즈, 각종 소품을 모두 불태우며 기도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렸으니 남편만은 살려주세요.’
그러나 2000년 겨울, 남편은 그를 남겨둔 채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결혼한 지 정확히 3년 만의 일. 7년간의 연애, 간절했던 사랑에 비하면 너무도 짧은 ‘동행’이었다.
“한동안 제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를 정도로 방황했어요. 무대에 오르는 것은 죽기보다 끔찍했고, 그러다 보니 동료들과도 멀어지게 됐죠. 그러나 다시 춤으로 돌아오게 되더군요. 제게 남은 것은 춤밖에 없으니까요. 다시 연습복을 장만하고 무대에 오르면서 마음을 모질게 먹었어요. ‘남편은 잃었지만 춤만은 놓치지 않겠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 춤으로 승화해낸 춤꾼 윤혜정

그는 고전무용계의 촉망받는 기대주다. 전통춤을 현대화, 젊은층에게도 인기가 있는 장르로 만들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있다.


이후 그의 춤사위는 커다란 전환을 맞게 된다. 그동안 다른 명인들의 춤사위를 흉내내며 곱고 아름다운 동작만을 생각했다면, 남편과 사별 이후 마음속의 슬픔과 한을 손짓과 발놀림에 실어낸 것.
“다시 무대에 오르자 마치 응달지던 뒤뜰에 햇빛이 든 느낌이었어요. 서럽게 떠났지만 무대 위에서 춤을 통해 다시 남편을 만나는 것 같은…. 어두운 관객석 어디에선가 남편이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해요.”
현재 경희대, 단국대, 국악예고 등에 출강하고 있는 그는 지난 1월엔 ‘윤혜정 푸리 춤 무용단’을 결성, 한국 전통춤의 계승과 현대화에도 힘쓰고 있다.
“우리 전통춤은 춤사위 하나 하나가 모두 다르고 또 저마다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그러나 관객에게는 재미없고 식상해 보이는 게 사실이죠. 동작의 의미와 색깔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춤꾼들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해요. 따분하지 않은, 감동과 재미가 있는 전통춤 창작에 노력할 거예요.”
긴 연애와 짧은 결혼생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 너무 커 힘겹지만 그는 남편의 빈자리에 아름다운 춤사위를 가져다 놓았다.

여성동아 2003년 7월 4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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