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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연쇄살인사건’ 취재기자가 본 ‘살인의 추억’ 진실과 허구

■ 글·김동준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03.06.03 17:34:00

실제 있었던 끔찍한 사건을 소재로 다룬 ‘살인의 추억’은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꾸며낸 이야기일까.
화성 연쇄살인사건 당시 직접 사건을 취재한 일선 취재기자가말하는 영화 속 진실과 거짓.
‘화성 연쇄살인사건’ 취재기자가 본 ‘살인의 추억’ 진실과 허구

영화 ‘살인의 추억’이 영구미제로 남을 가능성이 큰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아픈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물론 영화에선 경기도 화성이란 지명이 나오지 않는다. 지명도 ‘하선군 태령읍’으로 비켜가고 있다. 그러나 86년부터 91년까지 6년여 동안 화성군 태안읍 일대에서 일어난 10차례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몸서리쳐지는 쓰라린 기억을 지우지 못한 화성 주민들과 생사람 잡는 어설픈 수사로 여론의 호된 질타를 받았던 당시 수사경찰로서는 절대 다시 떠올리기 싫은 사건이다.
이 사건의 정식 명칭은 화성부녀자 연쇄폭행 살해사건. 봉준호 감독은 이런 ‘뼈저린 기억’을 되살린 데 대해 “기억 자체가 응징의 시작”이라고 밝혔다. 9·10차 사건을 현장에서 맞닥뜨렸던 기자는 오래된 취재수첩을 들추며 ‘취재의 추억’을 되살려 영화 속 진실과 허구를 살펴봤다.

범인은 누구일까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 대부분은 ‘손이 부드러운’ 박현규가 범인이기를 바란다. 생존자인 언덕집 여자의 “여자처럼 보드라운 손”이라는 진술이 강한 연상을 하게 한다. 박현규의 실제 모델은 90년 11월 여중생 김모양 살해사건(9차 사건)이 일어난 지 한달 만에 경찰이 범인이라고 발표한 윤모군(당시 19세)으로 곱상한 외모가 영화 속 인물과 거의 비슷하다. 윤군은 기자들 앞에서 자신이 범인이라고 진술했지만 현장검증 도중 번복해 강압수사 파문이 일어났다. 결국 유전자 감식결과에서도 동일인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윤군은 이 사건과 별건으로 구속돼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현재 범인에 대한 유일한 단서는 혈액형이 B형이란 사실뿐이다.

10차례 사건 모두 동일범일까
아니다. 경찰은 범죄수법이 비슷한 3∼4건 정도를 동일범 소행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머지는 개별범죄, 모방범죄로 보고 있다. 영화에는 수법이 비슷한 6건이 등장한다. 농수로에서 발견된 박보희 사건(86년 10월23일), 볏짚단이 쌓인 겨울 논에서 발견된 이향숙 사건(86년 12월21일), 서울형사가 예측한 실종자 독고현순 사건(87년 4월23일)은 입에 재갈을 물리고 팬티나 거들로 피해자 얼굴을 씌운 뒤 손발을 뒤로 결박하는 등 수법이 일치한다. 또 영화 속에서는 사건 6개가 모두 5공 말기에 발생한 것으로 돼 있지만, 복숭아 조각이 나온 안미순 사건과 여중생 사건은 6공 때 일어난 일들이다.

빨간 옷에 비 오는 날, 또 신청음악이 방송된 날 범행이 일어났나
초기 사건은 피해자가 빨간 옷을 입었고 사건 발생일의 날씨는 가랑비, 진눈깨비가 내리거나 흐린 날이었다. 이후 연쇄살인사건이란 이름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됐다. 그러나 반드시 빨간 옷을 입은 여성만 희생된 것은 아니다. 영화 속 남편을 마중나가다 희생된 박명자는 빨간 옷을 입었다가 꺼림칙해 다른 옷으로 바꿔 입는 장면이 나와 이같은 사실을 암시한다. 박명자 사건 당시 홍모씨(당시 42세)는 다방종업원에게 “너도 빨간 옷을 입으면 죽는다”고 말했다가 용의자로 몰려 곤욕을 치렀다. 여중생이 살해되던 날도 영화에선 비가 왔으나 실제는 비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요절가수 유재하가 부른 ‘우울한 편지’와 범행의 연관성은 전혀 없다.

영화 내용은 어디까지 진실일까
영화는 완벽하게 제작됐다. 진짜 범인이 영화를 본다면 호흡이 멈춰질 정도다. 송강호가 용의자를 대할 때마다, “밥은 먹고 다니냐?”고 읖조릴 때마다 범인은 경기를 일으킬 것이다. 범행현장에 ‘자수하지 않으면 사지가 썩을 것’이란 격문이 씌어진 허수아비, 잔혹한 범행수법, 여형사에게 빨간 옷을 입혀 비오는 날 배회하게 한 일, 무당집 찾아간 일, 화성경찰서 정문을 옮긴 일 등은 모두 사실에 근거했다. 9차 사건의 수사가 진행되는 중에는 용의자로 지목됐던 차모씨(당시 38세)가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하기도 했다. 영화 속 백광호의 모델이다. 그러나 송재호 반장이 신청음악을 듣고 경비병력을 요구했으나 시위진압 관계로 병력이 부족해 막을 수 있는 범행을 못 막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단지 당시 시대 상황이 그랬다는 것뿐이다.



‘화성 연쇄살인사건’ 취재기자가 본 ‘살인의 추억’ 진실과 허구

‘화성 부녀자 연쇄폭행 살해사건’으로 이름 붙여진 10건 가운데 8차 사건(88년 9월16일)은 범인이 검거됐다. 당시 범인은 체모를 현장에 흘렸고 경찰은 이 체모에서 중금속 성분을 추출, 인근 용의자의 체모와 비교분석해 범인 윤모씨를 검거하는 개가를 올렸다. 현재 윤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다. 이 사건은 수법상 연쇄살인과는 거리가 멀지만 경찰은 유일하게 해결한 사건이라 화성사건에 포함시킨다. 오히려 89년 7월9일 일어난 정모양 사건(당시 고2)이 화성사건에 가깝지만 발생지역이 수원이라 경찰은 연쇄살인사건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을 포함해 3개의 사건이 공소시효 만료(15년)까지 1∼3년이 남아 있다.

취재의 추억
8차 사건 이후 화성 인근에 사는 남성들은 수난을 당했다. 모든 남자들의 체모가 뽑혔고, 범인 윤모씨의 체모를 뽑아낸 경찰관은 일계급이 특진되기도 했다. 당시 기자실에서 나온 유머 한가지. 범행과 관련돼 조사를 받지 않은 그룹은 경찰과 기자뿐이었다. 그런데 경찰과 기자 두 그룹에 동시에 속하는 한명이 있었다. 당시 경기도경 기자실에 근무하던 의경이다. 고향도 화성이다. 전혀 그럴 리가 없었지만 범인이 오리무중이라 답답한 심정에서 나온 우스갯소리다. 주한미군일 것이란 이야기도 있었지만 설득력이 없었다.

영화를 직접 봄
극장 안에서는 영화 도입부터 관객들이 송강호의 연기를 보면서 웃기 시작했지만 기자는 절대 웃을 수가 없었다. 정말 취재의 추억이 생생히 기억났기 때문이다. 이 영화와 관련해 극중 인물인 김소현과 박현규를 절대 잊을 수 없다. 중학생이던 김소현이 사체로 발견된 날에 형사들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장에서 본 상태는 글로 표현하기가 무섭다. 영화 속에서 보여준 까만색 도루코 연필깎기용 칼로 가슴을 18차례 정도 살짝살짝 그었고, 모나미 볼펜과 포크 겸용 숟가락으로 은밀한 부위를 훼손했다. 그날은 맨정신으로 일할 수 없어 많은 양의 소주를 먹은 기억이 있다.
박현규는 한달 뒤 경찰이 범인이라고 발표한 윤모군이다. 윤군은 모 악기회사 공원으로 잘생겼다. 근데 그게 탈이었을까, 여자들에게 추근댔던 모양이다. 경찰은 일단 추행 건으로 윤군을 잡아 조사했다(미뤄 짐작건대 매우 험하게 다뤘을 것이다). 결국 본인이 범인이라고 자백했다고 발표됐다. 그러나 당시 기자들은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증거가 별로 없었다. 그날 저녁 화성경찰서에 수감돼 있는 윤군과 10여명 기자와 인터뷰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지금이라도 범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살 수 있다”고 채근해봤지만 윤군은 고개만 숙인 채 자신이 범인이라고 고집했다. 결국 현장검증에서 범행을 부인했고 그 다음부터 기사 방향이 강압수사 쪽으로 흘렀다.

여성동아 2003년 6월 4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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