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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 시각장애, 母 정신지체, 아들은 청각장애 앓는 구문이네 딱한 사연

“구문이에게 한번만이라도 소리를 들려주고 싶어요”

■ 기획·최호열 기자(honeypapa@donga.com) ■ 글·안소희 ■ 사진·박해윤 기자

2003. 04. 15

선천적 청각장애로 소리를 듣지 못하는 구문이. 아버지는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가고 어머니는 정신지체 장애인이어서 생활은 더욱 어렵다. 더구나 구문이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 글도 모르고, 수화도 하지 못해 정상적인 의사소통조차 불가능하다. 수술만 하면 들을 수 있다는데 돈이 없어 소리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구문이의 안타까운 사연.

父 시각장애, 母 정신지체, 아들은 청각장애 앓는 구문이네 딱한 사연

“구문이가 언제부터 장애를 갖게 되었는지, 장애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방치되어 온 거죠.” 구문이를 담당하고 있는 병원 사회복지사의 말이다. 도대체 ‘왜 이런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하는 답답한 마음에 무거운 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구문이 담임선생님의 안내로 구불구불한 논밭길을 지나서 어렵사리 집에 도착했다. 작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뒤숭숭한 집안 모습이 어려운 살림형편을 짐작케 했다. 그나마 이 집도 집주인의 배려로 얻어 쓰고 있는 형편이다. 구문이네는 산에서 주워온 나무로 불을 지피고 마당 한켠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생활한다고 한다.

어떻게 알았는지 구문이가 뛰어나오며 밝게 인사를 한다. 선천성 청각장애. 태어나서 한번도 ‘소리’라는 것을 접해보지 못했고 ‘듣는다’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소년. 세상의 어지러운 소리를 듣지 않아서일까, 구문이는 하늘 아래 다시 없을 것만 같은 천진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구문인 태어나서 울지도 못했어요. 1주일 만에 울음소리를 겨우 냈는데, 그것도 다른 애들과는 전혀 달랐죠. ‘킹킹’거리는 가느다란 신음소리 같았어요. 그때 빨리 병원에 데리고 가봤어야 했는데….”

아버지 정병일씨(68)는 고개를 떨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구문이를 낳을 무렵 정씨는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잃었다. 그 충격으로 실의에 빠져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반미치광이처럼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어렵게 얻은 막내아들조차 잘 보살피지 못했다. 유난히 잔병치레가 많았던 구문이 뒷수발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구문이가 초등학생이 될 무렵 정씨도 정신을 차리고 일을 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평생 농사일과 막노동을 하느라 허리디스크를 얻은 데다가 백내장을 앓아 시력이 심하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벽돌 하나를 쌓으려고 해도 제대로 볼 수가 없으니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 이길순씨(63)는 정신지체장애가 있어 구문이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 그저 먹이고 입히는 뒷바라지만으로도 벅찼다. 세월이 흐를수록 구문이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확실해졌지만 어려운 형편에 병원 문턱은 넘을 수 없이 높게만 느껴졌다.
차 경적 소리 듣지 못해 교통사고 당하기도
구문이는 그렇게 제대로 된 검사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소리없는 세상에 유배된 채 중학생이 되었다. 소리를 모른 채 말을 익히고 그렇게 익힌 말로 글을 배우니 읽고 쓰는 것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또한 특수교육을 받지 못해 수화도 전혀 할 줄 모른다. 유일한 의사소통 방법은 손짓과 발짓. 아주 기초적인 의사소통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중학생이라고는 하나, 그저 학교에 ‘다닐’뿐 정상적인 교육이 이루어질 리 없었다. 그래도 구문이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아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에 간다.
학교에서 구문이는 친구들과 잘 지내고 친구들도 구문이에게 스스럼없이 대한다. 특히 전자오락 실력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게임하는 방법은 어깨너머로 친구들이 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익혔다. 친구들과 함께 전자오락을 하는 것이 구문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하지만 학교에 가려면 한참을 걸어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여간 위험한 것이 아니다. 한번은 덤프트럭에 치인 적도 있었다. 길을 걷다가 덤프트럭이 울리는 경적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당한 사고였다.
“작년 4월에도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구문이가 친구들과 장난을 치다가 치인 거예요. 차가 경적을 울렸지만 들을 수가 없으니까, 소용이 없었죠. 다행히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어요. 그런데 그때의 충격 때문인지 이상하게 그후로 가끔 대소변을 못 가려요. 애 엄마가 아침저녁으로 빨래를 해대기도 했죠.”



父 시각장애, 母 정신지체, 아들은 청각장애 앓는 구문이네 딱한 사연

구문이는 수술만 하면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구문이에게도 작은 희망이 찾아왔다. 담임선생님과 주변의 도움으로 병원에서 정식으로 검사를 받게 된 것이다. 결과는 인공와우이식을 하면 청력을 얻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이었다. 인공와우이식은 말 그대로 인공 달팽이관을 귓속에 넣어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2천5백만원에 이르는 수술비와 재활 훈련에 필요한 치료비가 2천만원 이상 필요하다고 하니 구문이네 형편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 이씨가 꽃집에 나가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있지만 그나마 일거리가 많지 않다. 어떨 때는 열흘에 한번꼴로 일이 생겨 생계가 막막할 때도 있다. 정기적인 수입은 다달이 정부에서 받는 보조금 23만원이 전부. 그 돈으로 어렵게 생활을 꾸려가고 있으니 구문이 수술비는 그들에게 천문학적인 액수가 아닐 수 없다.
“지금 당장이라도 돈만 있으면 애가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두고 볼 수밖에 없는 부모 심정이 어떻겠어요. 나야 죽으면 그만이지만 아들을 생각하면 잠이 안 와요. 못난 부모 만나서 저렇다고 생각하면….”
정씨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정씨의 백내장은 이미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진전이 되어서 왼쪽 눈은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오른쪽 눈 역시 1m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조차 흐릿할 정도다.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으니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더구나 오른쪽 눈마저 빠르게 시력이 떨어지고 있지만 전혀 치료를 받지 못 하고 있다.
“요즘엔 산에서 나무하기도 힘들어요. 그나마 손짓으로 구문이와 얘기를 나눴는데 눈을 완전히 볼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할지 걱정입니다.”
구문이네 집을 나서면서 여성동아 4월호를 보내주겠다고 정씨에게 말하자 “보내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소용이 없다”고 한다. 만물이 생명의 희망으로 넘실거리는 봄. 이 봄이 지나기 전에 구문이가 큰 목소리로 아버지께 자기 가족 이야기가 담긴 이 기사를 읽어주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의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 또다른 이에게 희망을 주는 울림이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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