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아이들과 아내를 미국으로 보낸 후 배동성씨는 현재 홀로 지내고 있다.
“빨래와 청소는 일주일에 한번씩 몰아서 하는 요령도 생겼어요”
홀아비 냄새가 폴폴 나지 않을까 내심 걱정을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가지런히 정돈된 현관을 보는 순간 예측이 빗나갔음을 직감했다. ‘아내가 없어도 향긋한 향기를 풍기며 깨끗하게 해놓고 사는구나’ 싶었는데 배동성(38)의 어머니 박순덕씨(64)가 주방에서 나와 인사를 건넨다.
“어머니가 목포에서 매달 한두 차례씩 올라오셔서 밑반찬도 해놓고 집안 청소도 도와주십니다. 아내의 성격이 워낙 깔끔해서 정리정돈도 잘하고 집안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었는데…. 어머니가 도와주시긴 하지만 아내가 살림하던 때와 비교하면 집안이 많이 망가진 상태죠(웃음). 춘천에 계신 장모님과 어머니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와서 도와줄 때마다 고맙기도 하지만 죄송스럽기도 해요.”
지난 90년 KBS 코미디탤런트로 출발한 배동성. KBS 2TV ‘폭소클럽‘, KBS 위성TV ‘유머 한반도 총집합‘에서는 개그맨으로, MBC 일요아침드라마 ‘기쁜 소식‘에서는 탤런트로 변신해 바쁘게 활동하는 그는 2년 전부터 ‘기러기 아빠’로 살고 있다.
“아내와 아이들이 미국으로 간 이후에는 밥하는 게 귀찮기도 하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는 것 자체가 번거롭게 느껴져서 거의 사 먹다시피했어요.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서 제때 먹지 못하고 그저 배가 고플 때마다 밥을 사 먹었더니 위가 나빠지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엔 어떻게든 끼니를 거르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쓰고 있어요. 어머니가 집에 내려가시는 날에는 오곡찰밥을 넉넉하게 해놓고 가시라고 부탁을 해요. 오곡찰밥은 식어도 맛있고 김치만 있어도 밥 한그릇을 뚝딱 비울 수 있거든요.”
아내가 떠난 이후 다른 사람들이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살림’은 전적으로 배동성의 몫이 됐다. ‘기러기 아빠’가 되는 순간부터 작심한 일이었지만 막상 청소와 빨래, 설거지 등을 하면서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빨래도 밀리지 않으려 애썼고 청소기도 자주 돌렸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귀찮아지더라고요. 이젠 요령이 생겨서 빨래와 청소 모두 일주일에 한번씩만 합니다. 외출복은 되도록 세탁소에 맡기지만 속옷이랑 양말, 수건, 티셔츠는 직접 빨아야 하잖아요. 언젠가는 세탁기를 돌려놓고 바빠서 깜빡 잊어버렸는데 이틀 뒤에 열어보니 물 냄새가 많이 나서 세탁기를 다시 돌린 적이 있어요(웃음).”
기러기 아빠가 되기 이전에도 시간나면 집안일을 종종 도와줬다는 그는 “속옷과 티셔츠를 세탁기에 같이 넣고 돌린다는 사실을 ‘깔끔한’ 아내가 알면 기겁을 하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며 배시시 웃는다.
“집안 살림하는 거 진짜로 힘들어요. 자질구레한 일도 많고 앉아 있을 새 없이 움직여야 할 일들이잖아요. 집안일은 해도해도 끝이 없고 표도 안 나게 힘든 일이라는 건 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보고 싶은 아이들과 떨어져 사는 것에 비하면 집안일이 내 몫이 된 건 힘든 축에도 못 끼죠.”
“아이들이 좀더 넓은 세상에서 큰 꿈을 키웠으면 좋겠어요”
배동성이 기러기 아빠로 살게 된 데는 여느 기러기 아빠와 다름없이 자녀교육을 우선순위에 뒀기 때문이다. 준태(11)와 수진(8)이가 미국으로 떠난 건 2001년 5월. 치밀하게 계획한 조기유학은 아니었다. 배동성·안현주(32) 부부는 아이들이 더 넓은 세상을 보고 큰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시간이 날 때마다 해외여행을 자주 다녔다고 한다.
“2001년 봄에 탤런트 선우재덕씨 가족과 우리 네 식구가 함께 미국 여행을 떠났어요. 남자 둘은 돈 벌어서 가족들 먹여 살려야 하니까(웃음) 일찍 귀국했고, 나머지 식구들은 미국에 남아서 여행을 더 다녔어요. 그런데 하루는 아내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이곳(미국)에서 살면 안되겠냐. 맘에 드는 예쁜 집도 있는데 아이들도 좋아한다’면서 조기유학에 대한 뜻을 내비치더라고요.”
배동성은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아내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지만 각종 학원을 순례하고 살아야 하는 한국의 교육현실을 비춰볼 때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기러기 아빠가 되는 불편을 감수하기로 했다.
“우리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그때는 세계가 ‘한 동네’나 다름없을 겁니다. 살아가는 데 영어와 외국어 한두 개 정도는 필수라는 생각도 했죠.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는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앞으로 10년만 고생하자’는 아내의 말에 일리가 있다 싶어서 조기유학을 어렵게 결정했어요.”
배동성의 어머니는 아들 부부가 내린 결정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이 ‘혼자’ 살아가는 것이 여러모로 불편하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지만 며느리의 빈 자리는 당신이 채우겠다고 발벗고 나섰다.
“나도 자식 키울 때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거든요. 옛말에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고 했잖아요. 예전엔 공부하기 위해 자녀를 서울로 떠나보냈는데 그 영역이 외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들 며느리가 어렵게 결정을 내린 터라 틈만 나면 아들 집에 와서 집안일을 도와주려고 애를 써요.”
배동성은 초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 미국으로 건너간 준태보다는 유치원에 다니던 수진이가 미국생활에 더 빨리 적응할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예측은 빗나갔다고. 한국말을 완벽하게 이해하던 준태가 영어를 빨리 익혔고 생활에도 쉽게 적응하더라는 것.
“조기유학을 가려면 초등학교 3∼4학년 때가 적당하다는 전문가의 지적이 딱 맞는 것 같아요. 한국말을 제대로 알아야 영어를 빨리 익힌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으니까요. 수진이는 처음엔 고생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잘 적응해서 즐겁게 학교를 다니고 있어요. 우리나라는 아침에 등교하자마자 교실에서 수업이 시작되지만 그곳에선 아침에 두시간 정도 운동장에서 뛰어놀다가 교실로 들어가더라고요. 아이들이 학교에 놀러 가는 기분으로 가는 것 같았어요. 학교에서 많이 뛰노는 대신 숙제가 좀 많긴 하더라고요.”
배동성 부부가 자녀교육에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자립심’이다. 자녀에게 유산을 남겨주는 대신 힘든 세상을 지혜롭게 헤치고 살아가는 방법을 일깨워주는 게 값진 유산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조기유학을 보낸 것도 아이들 손에 물고기를 쥐어주기보다는 낚시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군에서 제대한 이후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정신적으로 독립을 했거든요. 요즘도 결혼한 성인이 부모의 그늘 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댄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그것은 부모의 잘못된 교육관 때문이라고 봐요. 그래서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 성인이 되면 스스로 알아서 앞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면서 키우고 있어요.”
그는 남달리 영특한 준태가 학자의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지만 아들에게 강요하고 싶진 않다고 한다. 부모는 자녀가 무엇이 되기를 원하기 이전에 자녀의 재능을 파악하고 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 역할을 충실히하는 게 자녀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배동성씨는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언제나 곁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간직하기 위해 집안 곳곳에 가족사진을 진열해 놓았다.
“금리가 높은 은행의 적금상품을 이용해 목돈을 마련했어요”
배동성의 주머니는 텅 비어있을 때도 있지만 그의 아내 주머니는 좀체 마르는 법이 없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하고 사는 게 몸에 밴 아내의 생활습관 때문이다. 92년 결혼할 당시 배동성은 자신의 전재산이 들어있는 통장을 아내에게 건넸다. 통장을 받아쥔 아내는 함박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통장 잔고가 1천3백만원이었는데 그걸 받아쥔 집사람은 결혼식을 준비하는 데 쓰라는 돈인 줄 알고 웃었던 모양이에요. 통장째 건네면서 ‘이 돈으로 우리가 살 집도 얻어야 해’라고 말했더니 할말을 잃었는지 저를 멀뚱히 쳐다보더라고요. 당시 가진 돈이 없어서 은행에서 5천만원을 대출받아 전셋집을 마련해 신혼살림을 꾸렸어요. 총각 땐 돈을 벌어도 쓸 줄만 알았지 모으지 않아서 거액의 빚더미에 앉은 채 신혼살림을 시작한 거죠(웃음).”
그의 아내는 빌린 돈의 원금과 이자를 내기에도 빠듯한 상황에서 생활비를 아껴 적금을 들었고, 사치와는 담 쌓고 살면서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없어서는 안될 물건인가를 꼼꼼히 따져서 구입했다고 한다.
“수입에 비해서 적금을 드는 비율이 아주 높았어요. 아내는 은행 문턱을 넘나들며 적금이 불어나는 재미에 살더라고요. 제가 벌어온 돈을 아내는 아주 소중히 여겼어요. 알뜰한 아내 덕분에 결혼 4년 만에 누구의 도움 없이 내집 마련을 할 수 있었어요. 이미 집값이 오른 지역의 아파트를 구입해서 그랬는지, 입지여건이 좋지 않아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팔 때 시세차익이 크진 않았어요.”
그가 현재 살고 있는 서울 대방동의 아파트(61평)는 방송국이 있는 여의도가 가깝고 교통이 편리해 3년 전에 구입했다고 한다. 투자의 목적보다는 ‘살기 편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망설임 없이 매입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투자에 성공한 셈이 됐다.
“이 집에 이사 온 이후에 아내는 동대문·남대문시장과 고속버스터미널 등을 여러 차례 드나들었어요.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싼 값에 커튼과 침구를 마련하느라 애를 쓰더라고요. 백화점에 들러서 예쁜 디자인의 제품을 눈에 익힌 다음 시장에 가서 백화점 제품처럼 만들어 달라고 했던 것 같아요.”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 살림하느라 힘든 아내에게 배동성은 몇년 전 처제와 함께 해외여행을 다녀오라고 권했다. 머뭇거리며 결정을 못하고 있는 아내에게 그는 “이번만큼은 돈 아끼지 말고 당신이 사고 싶은 물건도 사고 즐겁게 여행을 하라”면서 등을 떠밀다시피해서 해외여행을 보냈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내는 자기 것이라곤 싸구려 티셔츠 한장만 달랑 사가지고 왔지 뭡니까. ‘이건 당신 옷이야’ 하고 내게 옷을 건네기에 ‘왜 당신 것은 안 샀냐’고 물었더니 아내 대답이 걸작입디다. ‘내가 연예인이야? 우리집에 연예인은 당신이지 내가 아니잖아. 나까지 연예인처럼 입고 다닐 이유는 없어’라고 대답하더라고요.”
그의 아내는 아이들이 미국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하자 소규모의 무역회사를 차렸다. 가정경제에 보탬이 되고 싶었고 가족 부양의 짐을 남편과 나눠 지기 위함이었다. 한국의 물건을 미국에 가져가 파는 일을 하고 있는 안현주씨는 남자들도 하기 어려운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남다른 수완으로 잘 해내고 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아내는 경제적인 감각이 발달한 거 같아요. 미국에서 1년3개월 전에 시작한 사업이 아직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전망은 밝은 편이에요. 낯선 나라에서 사업을 한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씩씩하게 잘 해내고 있어요.”
아내가 떠난후 집안살림을 직접 하다보니 주부들의 고충을 알겠다는 배동성씨.
“자고 일어나면 아내의 빈 자리 때문에 옆구리가 정말 허전해요”
안방과 식탁 위, 거실 장식장, 냉장고 벽면, 콘솔 위… 그의 집안 곳곳엔 아이들의 웃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놓여있다. 그가 가족사진으로 집안을 장식한 이유는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언제나 곁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간직하기 위해서다.
“하루에 두세 번은 전화통화를 해요. 많게는 대여섯번씩도 하고요. 그러다보니 이동통신 요금이 한달에 40만~50만원씩 나오지만 전화비는 아끼고 싶지 않아요. 몸은 떨어져 있어도 목소리만큼은 날마다 들어야 살 것 같더라고요. 처음엔 반겨줄 가족도 없는 불꺼진 집에 들어온다는 게 끔찍하게 싫더라고요. 지금은 많이 적응이 됐지만 몸이 아프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땐 가족들 생각이 더 간절해요.”
일년에 두세 번 미국으로 건너가 가족들의 얼굴을 보고 온다는 그는 아내에게 “보고 싶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잘하지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우린 두 사람 다 닭살 돋는 얘기는 잘 못해요. 왠지 쑥스럽기도 하고 민망해서요. 아내가 애틋한 마음을 담아서 이메일을 보내면 전 곧바로 전화를 걸어서 ‘어, 메일 잘 봤어’라고 ‘입’으로 답장을 해요. 아내도 답장 없는 메일을 매번 보내는 게 재미가 없어졌는지 이제는 저처럼 전화로 할 얘기를 다 해요(웃음).”
팬과 연예인으로 만나 1년 동안 교제한 끝에 장인어른으로부터 ‘어렵게’ 결혼 승낙을 받아 11년째 부부의 연을 맺고 사는 이들 부부는 몸은 멀리 있지만 서로에 대한 소중함과 애틋함이 더해져 또다른 부부애를 키우면서 산다.
“얼마전 발렌타인데이 때 아내와 아이들이 선물을 보내왔더라고요. 저도 화이트데이에 맞춰 사탕을 한 보따리 싸서 편지와 함께 아는 사람 편에 미국으로 보냈어요. 곁에 있을 때보다 기념일이나 크리스마스 등은 각별하게 챙기게 되더라고요. 자녀교육 때문에 각오하고 기러기 아빠가 되었지만 곁에 아내가 없으니 늘 옆구리가 허전하죠. 두달 전쯤에는 이렇게 사는 게 뭔가 싶어 아내에게 다 정리하고 들어오라면서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니까요.”
그는 집안에서 혼자 있는 적막감을 없애기 위해 컴퓨터 게임을 즐기고 거실에 설치해놓은 골프 퍼팅 연습장에서 시간을 보낸다. 가족을 멀리 떠나보내고 매니저와 단둘이서 넓은 집을 지키면서 사는 배동성은 “앞으로 8년 정도 기러기 아빠로 살아야 할 것 같다”고 한다.
“명절 때가 가장 견디기 힘들어요. 방송일 때문에 본가가 있는 목포까지 내려갈 수 도 없고, 명절이라 식당들도 죄다 문을 닫아서 밥해 먹기 싫어도 꼬박 집에서 끓여 먹어야 하고…. 언젠가 명절날 혼자서 라면을 끓여 먹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아침마다 내 품에 파고들어 ‘아빠 빨리 일어나’라고 애교부리는 딸과 듬직한 아들도 보고 싶고. 아 물론, 아내도 많이 보고 싶죠. 그래서 명절에는 하루종일 전화기를 붙잡고 살아요.”
“조기유학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에 대해 우리나라의 교육현실만을 탓 할 수도 없다”는 그는 “가족끼리 얼굴을 맞대는 날이 일년에 며칠밖에 안돼 그게 가장 안타깝다”고 고백한다. “조만간 미국으로 건너가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을 보고 올 꿈에 부풀어 있다”는 배동성은 식탁 위에 놓은 가족사진에서 오랫동안 눈길을 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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