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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궁금했어요

국가대표 코치돼 육상계로 돌아온 '아시아 스프린터' 장재근

“돈 때문에 떠났지만 육상에 대한 생각 한번도 잊은 적 없어요”

■글·최호열 기자(honeypapa@donga.com) ■ 사진·정경택 기자

2003. 04. 04

주부들에게 섹시한 에어로빅 강사, 홈쇼핑 호스트로 유명한 장재근씨. 그는 원래 82년과 86년 아시안게임 남자육상 200M를 2연패한 아시아 최고의 스프린터였다. 90년 은퇴후 육상계를 떠났던 그가 13년간의 외도를 마치고 다시 육상계에 복귀했다.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인터뷰에 응한다는 장씨가 털어놓은 ‘내가 육상을 떠난 이유’ & 국가대표 육상코치로서의 각오.

국가대표 코치돼 육상계로 돌아온 '아시아 스프린터' 장재근

82년과 86년 아시안게임에서 남자육상 200m를 2연패한 아시아 최고의 스프린터로 명성을 날리던 장재근씨(42). 그가 어느날 갑자기 에어로빅 강사로 변신, 몸에 쫙 달라붙는 야한(?) 복장을 한 채 아침마다 방송에 출연해 장안에 화제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남자가 에어로빅을 하는 게 흔치 않았을 뿐 아니라 유명 체육인의 그 같은 변신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훤칠한 키, 잘생긴 외모에다 등푸른 생선처럼 팔딱팔딱한 그의 건강미에 주부와 젊은 여성들은 넋을 잃었고, 주부들을 아침마다 텔레비전 앞으로 끌어들였다. 그후 홈쇼핑에서 러닝머신을 소개하는 쇼핑호스트로 변신해 또다시 화제를 일으켰던 그가 이번엔 국가대표 육상코치로 변신해 눈길을 끈다. 90년 은퇴와 함께 육상계를 떠난 지 13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 태릉선수촌을 찾았을 때 장씨는 두 명의 선수를 모아놓고 지도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의 현장 복귀라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특유의 생글거리는 얼굴로 선수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가르치는 품이 어색하지가 않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의 아늑함이 느껴진다”는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가 국가대표 코치를 맡기로 결심한 것은 지난해 10월, 아시안게임 때 모 방송국에서 해설을 하면서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단거리 선수들이 줄줄이 예선탈락 하는 것을 보며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 더구나 자신이 세운 한국신기록이 20년 가까이 지나도록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는 것에 대한 선배로서의 책임감도 한몫 했다.
“나이가 들면 고향을 찾아간다고 제 마음 속에도 언젠가는 고향인 육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 시기가 된 거죠. 90년에 은퇴한 후 10년 넘게 돈에 집착하며 살다보니까 자꾸 사는 게 삭막해지고 마음이 늙어버리는 것 같더라고요. 삶의 목표도 없고…. 아등바등 하면서 몇푼 더 버는 것보다 후배들과 함께 땀을 흘리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국가대표 코치돼 육상계로 돌아온 '아시아 스프린터' 장재근

침체된 단거리육상을 활성화하겠다며 국가대표 코치를 자청한 장재근씨가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다.


일부에선 그의 코치능력을 두고 의구심을 제기하기도 한다. 오랜 시간 육상 현장을 떠나 있었기에 요즘 신기술을 모르고 있다는 데 대한 우려다. 이에 대해 그는 “지금 중요한 것은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선수들이 내 기록에 도달하는 것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지금 우리 육상은 아시안게임에서도 예선탈락하는 수준이에요. 우선 급한 것은 우리 선수가 결승에 진출하고, 메달을 따는 거예요. 제 기록이면 지금도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입상이 가능해요. 86년에 세운 제 기록을 깨는데 무슨 신기술이 필요해요. 제가 해왔던 대로만 하면 되는 거죠. 전 선수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해요. ‘내 기록만큼만 세워라. 그러면 내가 스폰서를 잡아서라도 육상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내겠다’고.”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는 육상계를 떠난 후에도 해마다 미국으로 코치 연수를 다녀오곤 했다. 비록 2주 정도의 짧은 기간 종합적인 트레이닝 현장을 둘러보고 체험하는 견학에 가까운 수준이지만 선진 육상 트레이닝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 육상 현실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단거리 육상팀을 운영하는 기업이 한곳도 없기 때문이다. 전국체전을 위한 군·시청의 선수들은 있지만 이들 역시 별정직이라 안정적으로 훈련하기가 힘들다. 또한 80년대 그가 활동하던 때만 해도 아시안게임 우승 포상금이 5천만원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1천만원으로 줄었고, 한국신기록 수립 포상금도 5백만원에서 1백만원으로 줄었다. 이런 환경에서 좋은 성적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육상에 대해 넘치는 애정을 갖고 있는 그가 어떻게 그렇게 오랜 세월, 외도를 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화려한 선수생활을 했던 그였기에 육상지도자로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뜬금없이 에어로빅이라는 외도를 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돈 때문이었죠. 집이 그냥 가난한 게 아니라 찢어지게 가난했거든요(웃음).”
90년 은퇴하면서 한국전력 직원으로 입사를 했는데, 첫달 손에 쥔 월급이 70만원이 채 안되었다. 그런데 신설된 서울방송에서 색다른 제안을 해왔다. 아침 프로그램에 나와 에어로빅 강의를 하면 출연료로 하루에 10만원씩 주겠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까 한달에 20일만 잠깐 나와서 하면 2백만원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눈 딱 감고 하겠다고 했죠. 에어로빅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운동인데 못할 게 뭐가 있나’라고만 생각했어요. 사실 전 골프를 배우려고 했어요. 골프는 늙어서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처음엔 2년 동안만 에어로빅을 하면서 돈을 벌어 골프를 배울 생각이었죠.”
에어로빅의 기초도 모르던 그가 52일 동안 배우고 시작한 방송이었지만 그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그는 어느날 눈을 뜨니까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의 변신에 대해 주위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부모님은 하도 어이가 없어 말문을 닫았다. 육상 선배들은 돈 때문에 육상을 버렸다고 질책을 했다. 그것 때문에 마음의 상처도 많이 받았다.
“솔직히 에어로빅이 좋았던 것도 재미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제가 여성들에게 하나의 섹슈얼한 상품으로 비치는 것도 싫었고요. 하지만 중간에 포기하면 ‘딴 데 가더니 뻔하다’라는 말을 들을 것 같아 이를 악물고 뛰었죠.”
그는 그동안 한번도 밝히지 않았던 당시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때 그는 혼자 살면서 전화도 설치를 안하고 에어로빅 담당 PD가 사준 휴대전화만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휴대전화 번호를 아는 사람도 담당 PD 한명뿐이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마담뚜들에게 수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용건은 모두 똑같았다. ‘당신을 참 좋아하는 여자분이 있는데 한번만 만나줄 수 있느냐’는 것.
“쉽게 말해 묻지마 데이트를 하자는 것이었죠. 솔직히 고민 많이 했어요(웃음). 눈 딱 감고 열번만 만나도 수억원이 들어올 수 있었으니까요. 거절을 하니까 강남에선 ‘장재근은 얼마 이상은 주어야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죠. 마담뚜 전화뿐 아니라 밤무대에서도 얼마든지 줄 테니 출연해달라며 러브콜이 쏟아졌어요. 그런데 제가 밤무대에서 뭘 하겠어요. 쫄바지 입고 에어로빅을 할 수는 없잖아요. 지금 생각해도 그때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게 잘한 것 같아요.”

국가대표 코치돼 육상계로 돌아온 '아시아 스프린터' 장재근

장재근씨는 국가대표 코치를 맡자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편하다고 한다.


결국 그는 93년경 에어로빅을 그만두었다. 당시 방송 수입 외에도 오픈하는 에어로빅 학원에 가서 얼굴 한번 보여주고 5백만원씩 받는 등 고수입이 보장되었지만 그는 과감하게 그만두었다. 더 이상 여성들의 노리개로 보여지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대신 94년부터 홈쇼핑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수입은 줄었지만 마음은 편했다. 그때도 주위에선 “하다하다 별 걸 다한다”고 말이 많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시청자들에게 운동기구를 소개하고, 올바른 운동 정보를 전달해준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위기도 있었어요. 숙대 근처에서 운영하던 에어로빅 체육관이 경영미숙으로 남의 손으로 넘어가고, 또 IMF가 터지면서 제가 보증을 섰던 사람이 부도를 내면서 6억8천만원 정도를 손해 봤거든요. 살던 집이 경매에 넘어가는 등 그동안 벌어놓았던 돈의 대부분을 그때 잃어버렸죠. 그래서 사실 이번에 코치를 하겠다고 한 것도 큰 결단이었어요. 아직 가족들을 위해 더 돈을 벌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안하면 앞으로 다시 육상계에 돌아올 기회가 10년 후에나 생길 것 같더라고요. 생활이 좀 어렵더라도 한살이라도 젊을 때 후배들과 함께 뛰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장씨의 부인은 탤런트 출신인 박광영씨. MBC 탤런트 16기로 황신혜, 김주승과 동기다. 아내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집사람이 탤런트 공채 때 황신혜를 제치고 1등으로 선발되었다”며 은근히 자랑을 한다.
“지금도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해요. 사실 제가 재혼이거든요. 지금이야 재혼이 별거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용납이 안되는 시절이었잖아요. 당시 마음 고생이 심했을 텐데, 잘 참아주었죠.”
그는 숨기고 싶은 자신의 아픈 과거도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첫 결혼 상대는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후 만난 그림 그리는 여성이었다고 한다. 처음엔 운동선수인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 신비감에 끌려 사귀게 되었는데, 막상 결혼해 살다보니 성격차이로 인한 갈등을 많이 겪었다는 것.
그래서 93년 두번째 결혼을 할 때는 무척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더구나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라 결심하는 데 더욱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씨는 그의 모든 상황을 안 상태에서도 기꺼이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집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IMF 후 경제적으로 어려울 땐 아내에게 방송에 출연해 돈을 벌어오라고 다그치기도 했죠. 공채 기수가 높아 단역을 맡아도 출연료가 세거든요(웃음). 그런데 절대 안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아내가 현명했던 것 같아요. 만약 아내가 돈을 벌었으면 제가 그렇게 열심히 살지 못했을 거예요.”
“아내가 처음엔 친구들이 모두 검사들과 결혼했다며 농담처럼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더니 이제는 친구들이 모두 이혼했다며 자기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그는 올해가 결혼 10주년이라며 아내에게 어떤 선물을 주어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육상연맹과의 껄끄러운 관계, 재혼 등 꺼내기 힘든 이야기까지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그를 보며 왜 과거 주부들이 그에게 열광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인터뷰를 마친 후 이내 선수들과 함께 땀을 흘리는 그의 열정이 꽃을 피우기를 바라며 태릉선수촌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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