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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이 여자의 삶

70년대 톱스타 우연정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생

”골수암으로 다리 절단 후 세딸 출산, 이혼 후 홀로 서기...”

■ 기획·최미선 기자(tiger@donga.com) ■ 글·김순희 ■ 사진·정경택 기자

입력 2003.04.03 09:36:00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이 있을까 싶을 만큼 갖은 풍상을 겪은 영화배우 우연정.
세상에 둘도 없는 버팀목이자 든든한 ‘산’과 같았던 남편과 이혼한 그는 세딸을 키우며 한쪽 다리로 힘겹게 ‘홀로 서기’를 했다.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우연정의 근황을 들어봤다.
70년대 톱스타 우연정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생

영화 ‘그대 앞에 서리라‘의 주인공 우연정(54). 70년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던 남정임·윤정희·문희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빼어난 각선미와 미모로 많은 사랑을 독차지하던 그의 삶은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다. 80년 골수암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후 사랑하는 남편과 이혼한 그에게 남겨진 것은 세 딸뿐.
그의 집 현관에 들어서자 구두 ‘한짝’이 눈에 띈다. 주인을 잃은 오른쪽 구두는 거실 한켠에 놓여 있었다. “나이는 들었지만 미모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며 인사말을 건네자 “에∼이. 농담인 줄 다 알아요. 그래도 그런 소릴 들으니 기분은 좋네요. 예쁘다는 얘기 한번만 더 해 줄래요?”라며 밝게 웃는다.
발레리나를 꿈꾸며 숙명여대 무용과에 다니다 우연한 기회에 영화배우가 된 그는 당시 우리나라 영화배우로는 드물게 팔등신에 빼어난 미모를 소유,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온 톱스타인 그에게 불행이 다가온 것은 목욕중에 다리의 종기를 발견하면서부터. 그것은 알고보니 단순한 종기가 아닌 암세포였다. 골수암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결혼을 강행한 남편은 그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다.
“다리를 절단하던 날(80년 9월8일) 이후로 제게 오른쪽 신발이 영원히 필요치 않게 됐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절단 수술을 받고 회복실에서 입원실로 옮겨갈 때 수술 전에 신었던 양말과 신발을 챙기다 말고 오른쪽 다리에 필요한 것들이 더는 소용없게 된 것을 알았을 때의 심정을 누가 알겠어요.”
임신 6개월 만에 받은 다리 절단선고는 그에게 너무나도 받아들이기 힘든 엄청난 현실이었다. 더욱이 임신중절 수술이 바람직하다는 의사의 처방은 그의 숨을 멎게 했다. 마취 직전 그는 의사에게 매달리며 애원했다. “유산만은 안된다”고. 다리절단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태어난 첫 딸 민들레(22).
제왕절개 수술로 민들레를 낳은 그는 간호사에게 “아이의 손가락과 발가락이 제대로 달려 있는지 세어봐 달라”고 부탁했다. “모든 게 정상이다”라는 말에 한숨을 내쉰 그에게 민들레는 고통스런 삶 속에서도 희망을 안겨준 유일한 존재였다.
“민들레가 건강하게 태어난 게 저에게는 커다란 희망이었죠. 한쪽 다리가 없어 불편하지만 그때 초라하다는 생각은 안했어요. 세상살이에 완패당했다고 생각하는 저에게 재생의 길이 주어진 겁니다. 민들레는 구겨져 있던 저를 펴지게 만들어주었어요.”
민들레를 낳은 이후 ‘항암제의 보충치료로 인해 임신이 불가능하다. 여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았지만 그는 기적처럼 둘째아이(민나리·20)를 임신했고 연년생으로 셋째딸(민비·19)을 출산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나리의 탄생과 저의 건강회복을 축하해줬어요. 하지만 솔직히 궁금하다며 ‘한쪽 다리가 없어도 부부생활이 가능하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어 참 야속하기도 했어요. 아무튼 둘째딸 나리의 출산은 제가 ‘여성의 기능’을 잃지 않았음을 증명해주었고, 건강이 회복되었음을 알리는 청신호였던 거죠. 그런데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다고…. 둘째아이가 ‘아들이면 더 좋았을 걸’하는 아쉬움이 들더라고요. 나리를 낳고 두달 만에 몸이 예민한 반응을 보여서 병원에 가봤더니 아 글쎄, 임신 3개월 째라고 합디다. 둘째딸이 첫돌을 맞기도 전에 셋째딸이 태어났다니까요(웃음).”
70년대 톱스타 우연정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생

러시아에서 발레를 전공한 후 엄마의 뒤를 이어 연기자 수업을 하며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큰딸 민들레.


그의 결혼식(80년 8월)은 당시 세인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다리절단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 입원을 하루 앞둔 그가 눈물의 웨딩드레스를 입었던 것. 신혼여행은 감히 엄두도 못 냈고 신혼생활은 투병생활의 연속이었다.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통증 속에서 꽃처럼 피어난 세 딸과 함께 두 사람의 사랑은 신조차도 시샘할 만큼 견고해 보였고 행복이 넘쳤다.
싸구려 ‘월남치마’를 입어도 당당했고 목발을 짚고 걷는 모습을 흘깃흘깃 쳐다보는 사람이 있어도 부끄럽지 않았던 건 남편의 따뜻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사랑이 있었기에 아이를 셋이나 낳을 수 있었고, 애정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세상의 모든 남자가 한눈을 팔아도 남편만은 그러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어쩌면 제가 목발을 짚고 다니는 여자였기에 그이가 한눈을 팔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리라는 확신 속에서 날마다 자신만만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어쨌건 사람을 믿고 좋아하는 감정은 즐거운 일이잖아요. 남편이 자는 모습, 하품하는 모습, 밥 먹는 모습, 심지어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조차 좋아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느낌이 흔들리기 시작합디다. 그리고 그 느낌이 구체화되는 사건이 터졌고요.”

70년대 톱스타 우연정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생

연기자로서 한참 인기를 얻고 있을 당시 노주현씨와 함께 출연했던 모습.


그러나 남편을 향한 신앙 같은 사랑과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85년부터.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은 알고 있었지만 우씨에게 귀띔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직감적으로 남편에게 ‘뭔가’ 변화가 있음을 눈치챘지만 알아낼 재간이 없던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의 한 손님으로부터 “남편 간수를 잘 하세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 몰라요?” 라는 얘기를 듣게 된 이후 그의 생활은 하루아침에 천당에서 지옥으로 바뀌었다.
“사실, 제 결혼생활은 어떤 의미에서 ‘공인(公人)’의 생활과도 같았습니다. 제 투병기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남편을 두고 ‘살아있는 예수’라고까지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그 일(남편이 바람을 피운 것)은 제 마음 깊숙한 곳까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습니다. ‘남자는 누구나 바람을 피우는데 그런 일로 가정을 소홀히 하는 법은 없다. 아이가 셋이나 있는데 이제 와서 헤어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타이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에게 그는 혼잣말로 ‘저도 당신네들처럼 두 다리가 있고 몸이 온전하면 참을 수가 있답니다. 그러나 제 입장은 다릅니다. 불구이기에 남편이 한눈 파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가 없어요. 사람들은 저의 오만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해받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도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른쪽 다리가 없는 민들레 엄마의 유일한 자존심이랍니다’ 하고 되뇌었다.
그는 이혼을 결심하면서 자신과 남편을 격려해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연예인 출신이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지만 그런 각오들을 뒤로한 채 그는 이혼을 선택했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억지로 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람 심리가 참 묘해요. 남편에게 이혼을 하자고 말하면서도 그 이면에는(남편이) ‘절대로 이혼할 수 없다’며 버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꺼냈을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남편이 이혼을 덤덤하게 받아들이자 ‘갈라설 수밖에 없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은 남남이 된 지 오래지만 남편과 함께했던 6년의 세월은 잘 익은 포도주처럼 진하디 진했다”고 회상한다.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나간 자리는 금세 눈에 띈다. 한때는 그의 모든 것이었던 사람. 세상살이에서 그를 철저하게 보호해준 방패막이었던 남편과 헤어졌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고, 뇌리에 확실하게 각인된 사람은 남편이라고 한다.
‘물보라로 피어났던 / 찬란했던 지난 세월 / 머물러 돌아보니 / 강이 되어 흐르네 / 그 기슭 양지쪽에 / 별처럼 핀 민들레 / 아, 사랑은 아름다운 고통 / 아름다운 슬픔 / 나, 이제 그대 앞에 / 그대 앞에 다시 서리라.’
우씨는 술에 취하면 ‘그대 앞에 다시 서리라‘의 주제곡을 부르곤 했다. 그리고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목이 메었다. 이혼이라는 ‘강’을 건넌 그는 더는 영화 주제곡을 부르지 않는다. 목이 메어서가 아니라 아름다웠던 사랑을 떠올리는 게 고통스러웠고 ‘그대’가 자신의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혼 후 세딸을 데리고 ‘한쪽’ 다리로 ‘홀로 서기’를 한다는 것. 그것은 다리를 절단하는 고통에 버금갔다고 한다. 혼자서는 살아내기 힘든 불구의 몸으로 기댈 언덕도 없이 사는 게 힘에 부쳤다. 그에게 신앙 같았던 남편이 떠나고 난 뒤 세딸을 위해서 이를 악물었고 강해지려 애썼다. 우씨는 주위의 동정 어린 시선과 슬픔을 잊기 위해 열정적으로 일에 빠져들었다. 경양식 집으로 시작한 사업이 승승장구해 임대업, 건설업, 유흥업까지 사업을 확대한 그는 IMF를 통해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라도, 장애인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또 다른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돈은 노력한 만큼 수중에 들어왔죠.”
큰딸 민들레는 그의 뒤를 이어 발레리나의 꿈을 키웠다. 민들레는 중학교 2학년 때 낯선 땅인 러시아로 발레 유학을 떠났다. 그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지만 겉으로는 덤덤한 척 웃음을 잃지 않았다.

70년대 톱스타 우연정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생

앞으로 재단을 설립해 자신과 같은 장애여성을 돕고 싶다는 우연정씨.


“아는 사람을 통해 러시아에서 유학중인 영화배우 박신양씨를 소개받았어요. 박신양씨가 민들레를 많이 보살펴줬어요. 참 고마웠죠. 6년 동안 볼쇼이발레단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발레를 전공한 딸이 귀국해서 느닷없이 연기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어렵게 공부해놓고 연기는 무슨 연기냐’며 반대를 했는데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합디다. 그래서 더는 말리지 않았어요.”
그는 “광고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민들레의 몸매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킬 만큼 빼어나다”고 자랑하면서 살포시 웃는다. 수원대학교 영화연극과 2학년에 재학중인 셋째딸 민비도 엄마의 뒤를 이어 연기자를 꿈꾸고 있다.
“둘째가 저를 참 많이 힘들게 했어요. 불구의 몸으로 연년생을 키우기가 너무 힘이 들어서 둘째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제 품에서 자란 두딸에 비해서 둘째와는 많이 부딪히고 갈등도 많은 편이에요. 저를 이해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춘기를 보내며 맘 고생을 시키더니 이제는 공부에 빠져서 살고 있어요. 둘째아이도 시간이 지나면 엄마를 이해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혼한 이후 그에게 “또 다른 사랑이 찾아왔었느냐”고 물었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시행착오요?”라고 대답한다. 그는 “이만큼 살아보니 사랑은 일종의 시행착오라는 생각이 듭디다. 하지만 시행착오로 끝나지 않고 지속되는 게 사랑인 것 같아요. 그 동안 몇번의 시행착오가 있긴 있었죠”라고 말하며 씁쓸한 미소와 함께 잠시 말문을 닫았다.
그는 요즘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장애인에게 도움이 될만한 일을 찾아 추진하고 있다. 장애인 중에서도 여성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마련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그의 목표다.
“비장애인은 장애인의 고통을 모릅니다. 제가 식당엘 가면 가장 먼저 화장실이 좌변기인가 아닌가를 알아봅니다. 좌변기가 아니면 식당 문을 나설 수밖에 없어요. 가끔 아이들이 ‘찜질방이나 목욕탕에 같이 가자’고 졸라요. 대중목욕탕에도 몇차례 가 봤지만 사람들의 시선도 싫고 한쪽 다리로 목욕탕을 이용하는 게 힘들어서 ‘너희들끼리 갔다 와’라고 말하지만 속으론 ‘너흰 좋겠다. 목욕탕도 가고…’라고 되뇌이곤 해요.”
그와 함께 영화와 드라마 출연을 했던 탤런트 이정길은 우씨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석과도 같은 존재’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가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바쁜 일정을 뒤로 한 채 가장 먼저 달려와서 격려와 위로를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제가 다리를 절단했을 때도, 아이를 낳았을 때도, 이정길씨가 많은 도움을 줬어요. 그 넉넉한 마음씀씀이가 20년이 넘도록 변함이 없네요. 항상 고맙게 생각하죠.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고마워요.”
그의 집 거실에는 그의 전성기를 엿볼 수 있는 ‘멋진’ 사진이 놓여 있다. 163㎝의 키에 몸무게 43㎏. 당시로서는 큰 키에 속했던 그의 ‘쫙’ 빠진 몸매는 뭇 여성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늘씬한 ‘두 다리’ 중 하나가 자취를 감춘 지 어언 22년의 세월이 흘렀다.
“살면서 자살을 하려고 맘먹은 적도 여러 번 있었죠. 좌절감도 숱하게 들었고요. 아직도 불면증에 시달려서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고통스럽지만 전 세딸의 엄마로서, 지체부자유자로서, 현실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싶어요. 제 삶의 무대에 다른 사람이 대신 설 순 없잖아요.”
얼마전 사업에서 손을 뗀 그는 그동안 장애인을 위한 일을 벌였던 것이 ‘겉치레’에 지나지 않은 행동이었음을 고백하며 “장애인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사재를 털어 재단을 설립해 저와 ‘동류’인 장애인들이 좀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작은 주춧돌이 되고 싶다”는 꿈을 내비치며 밝게 웃었다.

여성동아 2003년 4월 4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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