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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세태 르포

강남 ‘명품족’들로 호황 누리는 명품 전당포

■ 기획·최호열(honeypapa@donga.com ■ 글·박진숙 ■ 사진·박해윤 기자

2003. 03. 03

강남을 중심으로 명품 전당포가 뜨고 있다. 명품나을 담보로 돈을 대출해주는 이곳엔 돈 없는 명품족들뿐 아니라 ‘짝퉁’이 아닌 진짜 명품을 사기 위한 젊은이들로 북적거리다. 요즘 시대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그 현상을 취재했다.

강남 ‘명품족’들로 호황 누리는 명품 전당포

‘전당포’하면 우중충한 계단을 올라가 쇠창살이 가로막고 있고, 튼튼해 보이는 철문과 작은 창문 사이로 때묻은 장부를 내미는 나이 지긋한 주인 아저씨가 떠오른다. 음악다방 커피 값을 대신해 손목시계를 풀고, 자식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금가락지를 뽑아들고 찾았던 곳, 서민들의 애타는 마음을 풀어주던 곳이 바로 전당포였다.
사회가 그만큼 윤택해진 것일까, 언제부터인지 우리 주위에서 전당포란 간판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부모들의 애잔한 추억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강남 압구정동과 청담동을 중심으로 전당포가 다시 유행하고 있다. 명품족들이 자주 찾는 압구정동 일대에만 10여곳이 몰려있다.
‘아니, 부자 동네에 왠 전당포?’하고 고개를 갸웃거릴지 모르지만 다 이유가 있다. 이곳 전당포에선 흔히 말하는 명품들만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문으로만 듣던 명품 전당포에 찾아가보았다.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맞은편에 있는 한 명품 전당포에 들어서자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하는 친절한 여직원과 세련된 인테리어, 반짝이는 진열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진열대 안에는 가격이 매겨진 중고 지갑, 반지, 시계 등의 유명 명품들이 진열되어 있고, 벽에는 핸드백과 옷, 모피코트가 걸려있다. 언뜻 가격표를 보니 20만원부터 4천2백만원까지 천차만별이다. 실내는 은행 VIP고객 상담실이나 백화점 명품매장처럼 밝고 깔끔했고, 쾌적한 응접세트도 마련돼 있다.
한쪽 벽면에는 고객의 비밀보장을 위한 칸막이가 쳐져있고 ‘대출상담’이라는 푯말이 붙어있다.
“대출번호가 어떻게 되시죠? 296번이요? 18일이 이자 만기일이네요. 그때까지 내시면 됩니다.”
연신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전화로 대출상담을 해주고 있는 ‘전당포 주인아저씨’의 모습은 무척 낯설었다.
“급전이 필요하거나 중고물건을 팔 때 편리해서 이곳을 가끔 이용해요.”
창구에서 30대 초반의 한 여성이 커다란 비닐 가방에서 명품핸드백인 에트로 2점과 구찌 선글라스를 꺼냈다. 명품을 담보로 돈을 빌리러 왔다고 한다. 전당포 주인아저씨는 커다란 돋보기 대신 미세한 흠집까지 발견할 수 있는 현미경으로 물건을 감정하곤 현금 2백만원을 내주었다. 돈을 받은 여성은 함께 온 친구와 함께 경쾌한 발걸음으로 전당포를 나섰다. 명품을 들고 오기 때문일까? 그 옛날 전당포를 다녀가던 사람들의 고개 숙인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잠시후 “딸랑”하는 소리와 함께 30대 후반의 남자손님이 들어왔다. 그는 지난번 샀던 명품 시계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다시 “딸랑”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엔 20대 초반의 커플 손님이 들어왔다. 여자 손님은 이곳을 처음 찾은 듯 “엄마가 예전에 쓰시던 핸드백을 팔려고 왔어요. 장롱 속에 두는 것보다 팔아서 다른 명품 핸드백 사는 데 보태려고요” 하며 수줍은 웃음을 지었다. 전당포의 문턱이 낮아진 것일까. 찾아오는 손님들의 대부분은 20∼30대였다.
1시간 동안 5∼6명의 손님들이 들락거리며 돈을 빌리기도 하고, 맡긴 물건을 찾아가기도 했다.
일명 ‘폰뱅크(Pawn Bank·전당포와 은행의 기능이 결합된 소비자금융회사)’라 불리는 명품 전당포들은 물건의 ‘쓰임새’를 돈으로 환산해주었던 과거 전당포와는 달리 물건의 ‘명품 지명도’에 따라 대출을 해준다. 그래서 보석류와 구찌 핸드백, 루이비통 가방, 버버리 코트, 펜디 시계 같은 유명하고 값비싼 명품만을 담보로 받는다. 명품을 담보로 취급하는 만큼 제값을 매길 수 있는 전문 감정사와 수년간 명품매장에서 일한 직원들이 물건을 꼼꼼히 감정한다. 손님이 매장에서 감정을 받고 돈을 빌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분 정도.

강남 ‘명품족’들로 호황 누리는 명품 전당포

명품전당포는 현미경으로 흠집 등을 꼼꼼이 체크해 값을 매긴다.


이들은 인터넷 홈페이지도 개설하여 다양한 저당정보와 쾌적한 최신시설, 출장감정 서비스를 자랑하고 있다. 가져오는 물건의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구입가격의 50% 미만(중고도매가의 70%)에 해당하는 돈을 빌려갈 수 있다. 이자율은 매우 높은 편인데 대출금에 따라 차등 적용된다. 대략 대출금 1천만원 이하인 경우 수수료는 월 5%(연 60%)며 선이자를 뗀다. 대출 기간은 최고 9개월까지.
명품 전당포 캐시캐시의 임종철 이사는 “카드 수수료보다 더 비싼 이자를 내고도 이곳을 이용하는 이유는 연체가 되어도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는다는 점, 대출 한도액이 없다는 점, 그리고 돈이 생기면 언제든지 맡긴 물건을 다시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며 고객들의 수가 많아지는 추세라고 덧붙였다.
지금까지 이뤄진 최고액 대출은 5천만원. 3.5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와 피아제 시계 등 5점을 맡고 내준 금액이다. 구입하는 데 2억6천만원이 들었다던 이 물건은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 급전이 필요해 찾아온 50대 주부가 맡겼는데 2개월 만에 다시 주인의 손으로 돌아갔다. 10억원을 주고 산 다이아몬드를 저당물로 1억원 대출을 요구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감정결과 원하는 금액만큼의 값어치가 되지 않아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 가장 소액대출은 남자 대학생이 버버리 손가방을 들고 와 대출해간 5만원이다. 이 물건도 3개월 후 되찾아갔다.
대체로 고객의 약 70%는 돈을 갚고 맡긴 물건을 찾아간다고 한다. 기한이 지났는데도 돈을 갚지 않으면 밀린 이자와 법인세를 붙여 물건을 내놓는다. 이런 물건들은 상태도 양호하고 값이 매우 저렴하기 때문에 이것만 노리는 단골 고객이 있을 정도다.
위탁판매와 중고매매를 함께하는 이들 명품 전당포는 ‘명품이라면 중고라도 좋다’는 명품족들의 성향에 맞게 다양한 물건을 구비하고 있다. 물건을 내놓는 사람들은 30대 후반에서 50대까지의 여유 있는 여성들이고, 그 물건을 사가는 사람들은 20, 30대 여성들이라고 한다. 보통 이들이 한번에 쓰는 돈은 2백50만원에서 5백만원 사이다.
“명품에는 거품이 많아요. 그래서 가격이 너무 높지요. 젊은층들 사이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은 중고품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요. 명품들의 디자인은 급속하게 변하지 않기 때문에 몇년 전 것을 다시 쓴다고 유행에 뒤처지지 않거든요. 백화점에 가야만 진짜 명품을 살 수 있다고 믿는데 그것은 아니에요.”
중고명품을 선호하는 사람들 중에는 ‘실속파’ 연예인들도 한 몫한다. 최근 드라마보다는 라디오 DJ, 텔레비전 MC로 맹활약하고 있는 걸쭉한 목소리의 여자탤런트 K씨는 얼마 전 “어머니에게 선물한다”며 금장시계를 사갔다. 뮤지컬 배우 L씨도 핸드백을 사기 위해 자주 들른다고 전당포 주인은 살짝 귀띔했다.
워낙 유통경로가 다양하게 명품이 들어오다 보니 진품 여부를 가리면서 웃지 못할 경우도 종종 생긴다.
“가끔 짝퉁(가짜 명품)을 들고 오는 손님도 있어요. 선물 받은 거라며 내미는 물건의 대부분은 짝퉁이죠. 한번은 여자손님이 명품 핸드백 4개를 한꺼번에 가져와 팔아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그런데 짝퉁 핸드백이 두개 섞여있었어요. 저희야 금세 알 수 있지만 손님에게 바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죠. 받아두었다가 안 팔린다며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가끔 그렇게 속이려고 하는 손님들이 있어요.”
그는 점점 가짜를 가져오는 비율은 줄고 있다고 했다.

명품 전당포를 바라보는 시선이 고운 것만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안 그래도 과도하게 중독되고 있는 명품족들의 소비 성향을 명품 전당포가 더욱 부추긴다고 말했다. 명품을 카드로 구입하고, 카드 값을 갚기 위해 그 명품을 저당잡히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S명품전당포의 관계자는 “돈을 빌려가는 사람들은 20대 학생들과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대부분입니다. 모두 카드 빚 때문에 돈을 빌려가요”라며 카드 빚을 지게된 이유가 자신의 명품을 ‘업그레이드’ 시키기 위해 무리하게 구입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명품에도 ‘급’이 있다는 것. 명품족들이 선호하는 1등급은 ‘샤넬, 루이비통, 카르티에’이며, 2등급은 ‘페라가모, 구찌, 프라다’, 하위급에 해당하는 것은 ‘에트로’ 정도라고. 그러므로 명품족들은 정기적으로 자신의 명품등급을 올리기 위해서 전당포를 찾거나 아예 샀던 물건을 되팔게 된다는 것이다.
“명품의 급이 올라가면 자신의 가치도 올라간다고 생각해요. 명품이라는 이름의 껍데기만 쫓는 사람들이 많아요. 인터넷 판매가 많아지다 보니까 중고명품을 찾는 고객들의 연령이 갈수록 낮아지고, 그 범위도 넓어지고 있어요. 중학생들이 물건을 사가기도 하고, 지방고객이 전체판매의 50%를 차지할 정도예요. 나라 전체가 명품 중독에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명품은 더 이상 ‘소장하기 위해서’ 사는 물건이 아니다. 우리나라 대학생 3명 중 1명이 명품을 가지고 있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로 유명 외제 브랜드는 연일 불황을 모르고 팔려나간다. 1백35개 브랜드가 한곳에 모여있는 갤러리아백화점의 압구정 명품관에는 지난해만 휴고 보스, 피아제 등 15개 명품매장이 새로 생겼으며 매출액이 2천억원에 이른다고 했다. 세계적인 명품회사들은 우리나라를 주요 시장으로 인식하고 앞다퉈 매장을 내고 있다.
명품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다. 의류, 액세서리, 핸드백에 이어 한달에 80만원짜리 유아식과 생후 5개월된 아기용으로 34만원짜리 이유식이 등장했다. 그런가 하면 12만원짜리 순은 딸랑이는 명품족들의 출산 준비물 1호다. 태어나면서부터 명품과 함께 자라는 것이다.
“요즘 명품 없는 아이들이 어디 있어요? 명품이 하나라도 없으면 왕따 당해요. 전 주로 중고품을 사는데 친구들도 모두 명품 마니아들이에요.”
명품 전당포에서 만난 대학생 김모양(22)은 명품을 사기 위해 지난 겨울방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그는 원하는 물건을 사려고 쓸 것 안 쓰고 돈을 모아 사는 것인데 뭐가 나쁘냐며 “좋은 물건 쓰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똑같지 않은가요?”라고 오히려 되물었다. 명품이란 원래 ‘장인의 혼이 들어간 뛰어난 물건’을 일컫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명품과 럭셔리(고가 사치재)를 혼동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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