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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아픔 딛고 법조인 꿈 이룬 사법고시 최고령 합격자 박춘희

■ 기획·이지은 기자(smiley@donga.com) ■ 글·조희숙 ■ 사진·박해윤 기자

입력 2003.02.07 16:00:00

“합격 소식을 듣고 축하전화를 걸어온 딸과 전화기를 잡고 한참 울었어요”
37세의 늦은 나이로 사법시험에 도전해 10년 만에 사법고시에 당당히 합격한 박춘희씨.
그가 이혼의 아픔과 경제적인 어려움, 고령 등의 핸디캡을 이기고 합격의 영광을 안을 수 있었던 것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부끄럽지 않은 법조인이 되고 싶다는 ‘9전10기’의 주인공 박춘희씨를 만났다.
이혼 아픔 딛고 법조인 꿈 이룬 사법고시 최고령 합격자 박춘희

박씨는 가족들의 따듯한 관심과 원조가 없었다면 10년간 공부를 지속할 수 없었을 거라며 고마워했다.


“저는 그동안 가족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존재였어요. 합격발표가 나자 동문회 명부에서조차 빠진 제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는지 친구들이 축하전화를 걸어오더라고요. 세상에 제 존재를 알린 것 같아 통쾌함 같은 게 느껴졌어요.”
제44회 사법시험에 당당히 합격한 박춘희씨(48). 그는 지난해 12월22일 9백98명의 최종 합격자 중 최고령으로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최종 합격자 발표 후 합격소감을 밝히긴 했지만 그가 합격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지난해 12월초. 이미 2차 시험에 합격한 그는 주변의 예상대로 무난히 3차 면접시험을 통과해 합격증을 거머쥘 수 있었다.
특히 이번 시험은 수석합격자를 비롯해 최연소, 최고령 합격자 모두 여성이 차지해 어느 때보다 ‘여풍’의 위력을 절감하게 했다. 하지만 그에게 이번 합격은 다른 어떤 누구보다 의미 있고 귀한 결실로 다가왔다. 그는 이미 슬하에 남매를 둔 주부. 37세의 늦은 나이에 사법시험에 도전한 그는 1차 시험에 4회, 2차 시험에 5회 등 모두 9회이나 고배의 쓴 잔을 마신 후 10여년 만에 합격의 영광을 안았기 때문이다.
박씨가 처음 사법고시를 준비한 것은 지난 90년 초반. 그가 시험을 준비하게 된 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부산대 의류학과 74학번인 그는 대학 졸업 후 결혼해 남매를 두었지만, 88년 남편과 헤어진 뒤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상경했다. 그리고 서울의 한 대학교 앞에서 작은 분식집을 열어 본격적으로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둘째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전남편으로부터 아이들을 데리고 가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하루 종일 식당에 매달려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럴 바에는 잘 보살펴줄 수 있는 환경으로 보내주는 게 나을 것 같았죠. 그런데 정작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까 제가 돈을 벌 이유가 없어지더라고요.”
이혼 후 아이들을 남편에게 보낸 뒤 고시 공부 시작해
한동안 아이들이 떠난 빈자리 때문에 방황했던 그는 어디엔가 몰두할 일이 필요했다. 그때 떠오른 것이 바로 사법고시였다. 대학시절에도 그는 전공인 의류학보다 행정학이나 법학 강의를 자주 청강했을 정도로 정치나 법조계에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인권 변호사로 활동중인 친오빠 박인제씨도 그가 사법고시를 준비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로 작용했다.
곧 분식집을 정리한 그는 신림동 고시촌으로 들어가 사법시험 준비에만 매달렸다. 10년 전만 해도 신림동 고시촌 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고시원은 험한 산동네에 위치해 있었고 그나마 여자 고시생은 고시원에서 잘 받아주지도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90년 5월 처음 1차 시험에 도전했지만 그는 내리 네번이나 낙방했다. 불과 한 문제 차이로 떨어지는 등 번번이 시험에 떨어지자 그는 다섯번째 시험을 앞두고 심한 슬럼프에 빠졌다.
“정신력도 많이 해이해지고 무엇보다 체력적으로 많이 지쳤어요. 그때 비로소 내 나이가 핸디캡이 되는구나 싶었죠. 솔직히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동안 해온 공부를 생각하면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습니다.”
다섯번 도전 끝에 어렵게 1차에 합격했지만 다시 2차에 낙방하면서 1차 시험 합격은 무효로 돌아갔다. 그는 그렇게 1차 시험만 세번 합격했고, 여섯번 만에 2차 시험까지 합격할 수 있었다. 신림동에 처음 들어갈 때 37세였던 그는 40대 후반이 되어서야 고시촌에서 ‘하산’하게 됐다.

이혼 아픔 딛고 법조인 꿈 이룬 사법고시 최고령 합격자 박춘희

합격 발표 후 부모님의 노인대학 졸업식에서 가족과 함께(왼쪽). 지난해 언니, 여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오른쪽).


그는 시험을 준비하는 10여년 동안 철저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해왔다. 매일 아침 4시30분에 기상해서 새벽기도를 마치고 1시간 동안 관악산에 오르는 아침운동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밤 10시30분이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드는 대신 점심과 저녁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책상 앞을 지켰다. 그가 이처럼 철저히 계획된 생활을 고집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법고시는 정신력 싸움인 동시에 막강한 체력전이라는 것을 오랜 고시 준비 생활을 통해 체득했기 때문. 하지만 선천적으로 체력이 약한 그는 한달에 한번씩 영양제를 맞으며 근근이 버텨나갔다.
체력도 문제였지만 경제적인 문제도 극복대상이었다. 시험을 준비한 이후 일체 수입이 없던 그는 “가족들의 따뜻한 관심과 원조 덕분에 10년간 공부를 지속할 수 있었다”며 고마워했다. 그의 어머니는 10년을 하루같이 그를 위해 새벽기도를 나섰고, 매달 70만~80만원 이상이 드는 생활비는 친오빠가 부담했다. 언니와 동생은 철마다 옷이며 생필품을 대줬다. 공부하는 틈틈이 그도 고시원 상담 아르바이트나 고시학원 종합반 조교를 하며 생활비를 보탰고 1차 시험 합격 후에는 법학 강의를 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고시원 생활을 하다 보니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다. 신림동 고시생들의 대부분은 그보다 나이 어린 학생들이다. 하지만 늘 청바지 차림에 생머리를 질끈 묶고 다니는 그를 대학생으로 오해한 몇몇 남학생들이 그에게 은근히 프러포즈를 해온 것.
“몇년 전에는 31세인 고시생이 오더니 진지하게 제 나이가 서른 다섯인가 여섯인가 묻더라고요. 자기는 10세 연상까지 괜찮다면서요. 아무리 제 나이를 말해줘도 믿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노래방에 데리고 가서 조용필, 패티 김 노래를 불러주니까 그제서야 믿는 눈치였어요.”
“나이는 결코 장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공부를 시작하면서 그는 모질게 마음 먹은 것이 있었다. 아이들이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로 아이들과 연락하지 않겠다는 것. 그 대신 그는 사법시험에 합격해 아이들에게 당당하게 나타날 생각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전화가 올 때마다 일부러 전화를 끊어버리거나 피했다.
“그때는 아이들이 어렸으니까 제가 얼마나 야속했겠어요. 나중에 둘째아이가 대학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큰딸한테 전화를 했더니 제 목소리를 듣고는 끊어버리더라고요. 2차 시험 발표를 앞두고 딸아이한테 제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그제서야 이해해주더군요. 사실 아들한테는 아직 무서워서 전화 못하고 있어요(웃음).”
합격 발표가 나고 그는 제일 먼저 딸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곧바로 축하 전화를 걸어온 딸과 전화기를 붙잡고 하염없이 울었다는 박씨. 그의 합격 소식에 맞춰 대학 졸업반인 딸도 모 대기업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알려줘 박씨는 가장 큰 축하선물을 받게 됐다.
그는 올 3월3일 정식으로 사법연수원에 들어갈 예정이다. 앞으로의 진로는 연수를 받으면서 천천히 결정할 생각이라고 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오빠처럼 소외된 계층을 위해 일할 생각을 했고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는 박씨. 마지막으로 그는 지금 무엇인가를 시작하려는 주부들을 위해 이런 조언을 했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70세에 그림을 시작했지만 인도 근대 회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고 해요. 어떤 일을 하는 데 나이는 결코 장애가 될 수 없으니까 지금 당장 용기를 내세요!”

여성동아 2003년 2월 4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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