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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지금은 조연시대

주인공 못지않은 인기 누리는 안방극장의 빛나는 조연배우들

2002. 12. 11

주인공 못지않은 인기 누리는 안방극장의 빛나는 조연배우들

그는 부업 한번 가져본 없는 외곬수 연기자다.

“할아버지, 여기 사인해주세요!” 초등학생 2명이 초로의 연기자 신구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진다. 손바닥만한 수첩을 내밀며 아이들이 “게 맛을 알아 한번만 해주세요!”라고 보채는 한마디에 그가 다시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만다.
탤런트 신구(65·본명 신순기).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들어 부쩍 어린 아이들의 사인공세를 받는 일이 잦아졌다. “손주뻘인 초등학생에게 사인하게 될 줄 몰랐다”는 그에게, 신세대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비결을 물었다.
“햄버거 때문이지 뭐. 사실 난 광고 계약할 때 품목이 뭔지도 몰랐어요. 제주도에서 촬영했는데 바람이 너무 심해서 고생했던 기억밖에 안나요. 좀처럼 칭찬을 안하는 집사람이 광고를 보더니 잘 나왔다고 말하더군.”
62년 성균관대 국문과를 중퇴하고 연극무대에서 연기생활을 시작한 그는, 72년 KBS 드라마 <허생전>으로 데뷔한 이래 40년 연기생활 동안 지금처럼 코믹한 이미지를 가져본 기억이 별로 없다. 젊은 시절에는 개성이 강한 역할을 주로 해왔고 나이 들어서는 인자하고 자상한 아버지 역할 전문이었다.
그의 연기 인생에 큰 변화를 준 작품은 단연 SBS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이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 좀더 빨리 자신을 시트콤에 캐스팅했더라면 더 빨리 코믹해졌을 수도 있었다고 덧붙인다.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는 뜻이다.
“나이든 햄릿 역할 해보고 싶어요”
연륜 있는 연기자답게 그는 코믹한 이미지와 진지한 연기를 동시에 보여줄 줄 아는 탤런트다. 그는 SBS 시트콤이 한창 방영중일 때도 KBS 드라마 <부부 클리닉>에서 꾸준히 시청률을 이어나갔다. 마니아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MBC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서 아들을 사랑하는 ‘복수 아버지’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CF에서 ‘니들이 게 맛을 알아?’라고 익살스럽게 외쳐댔던 그였다. 오랜 연기생활 동안 그가 지켜온 철칙이 있다면 시간엄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시간만은 꼭 지켜요. 일단 연습시간이 정해지면 절대로 늦지 않으려고 하지요. 그리고 방송은 즐겁게 하자는 생각이에요. 이 나이에도 일거리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에요. 지금 나이에 내가 자랑할 것이라고는 한눈 팔지 않고 연기만 했다는 거예요.”
돈벌이를 위해 남들 다해보는 부업 한번 해본 적 없다는 그는 평생 연기밖에 모른 외곬수 연기자다. 요즘에는 강단에 서달라는 제의를 부지런히 거절하고 있다는 그는 언제나 ‘현장에서 뛰는 선수’로 남고 싶다고 한다.
“연기자로서의 보람이라면, 연기를 마치고 우연히 연출자와 눈길이 딱 마주칠 때가 있어요. 연출자와 나 사이에서 만족한다는 오케이 사인이 오갈 때, 그때 보람을 느끼지요.”
TV 드라마뿐 아니라 연극무대에도 익숙한 배우다. 그동안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불가불가> <살짜기 옵소예>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한 그는 TV 드라마로 지쳤을 때마다 재충전을 위해 연극무대에 오른다고 한다.
현재 그는 KBS <부부 클리닉>과 SBS 일일극 <해뜨는 집>에 출연중이다. 정년을 모른 채 오늘도 활기차게 활동하고 있는 탤런트 신구. 그의 두 가지 바람은 나이든 햄릿 역할을 해보는 것과 늦게 얻은 외아들이 빨리 장가가서 명랑한 며느리를 보는 것이다.

주인공 못지않은 인기 누리는 안방극장의 빛나는 조연배우들

그는 여자의 일생을 모두 보여주는 작품의 여주인공 역할을 꼭 해보고 싶다고 한다.

“월요일은 지방촬영인데, 화요일은 세트촬영이고, 어떡하나 토요일도 어렵겠는데….”
인터뷰 약속을 잡기도 미안할 만큼 바쁘게 활동하고 있는 중견 탤런트 김지영(65).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연기자 김지영은 KBS 드라마 <인생화보> <고독> 경인방송 일일극 <해바라기 가족>까지 3개 드라마에 출연중이다.
그는 탤런트 전원주의 바통을 이어 뒤늦게 빛을 본 중견 여자 연기자다. 얼마전까지 그는 SBS 시트콤 <여고시절>에서 극중 이유진의 푼수끼 다분한 엄마로 출연해 인기를 모았다. 덕분에 그는 생전 처음 CF도 찍는 호사도 누렸지만 더 이상 시트콤 출연은 ‘노’라고 잘라 말한다.
“그전에도 몇번 시트콤 제의를 받았지만 사양했어요. 자꾸 오버하게 되고 애드리브로 넘기려고 하기 때문에 연기를 버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연기의 진중한 맛이 없어진다고 할까. 나는 연기를 하고 싶을 뿐이에요. 조연이면 어때요. 꽃을 받쳐주는 꽃받침 같은 역할도 멋지잖아요.”
올해로 연기경력 48년째. 여고를 졸업한 해 어느 극단에서 처음 연기를 시작했다. 특별히 연기 지도를 받지 않았어도 입단 후 첫 무대에서 주연을 맡을 만큼 재능이 있었지만, 방송국으로 터전을 옮기면서 연기인생의 35년을 단역배우로 보냈다.
그나마 대사도 많아지고 배역다운 배역을 맡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 전. 겨우 대사 몇 마디 때문에 지방 촬영도 숱하게 다녔고, 이른 새벽 빨리 내려오라는 연출자의 전화 한통에 강릉이며 목포를 한걸음에 달려가기도 했다.
능숙한 팔도 사투리에 아픈 사연 숨어 있어
“지금은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는 막내딸을 낳고 나서 남편이 다치는 바람에 내가 생활을 책임져야 했어요. 백일도 안된 아이를 두고 촬영장에 따라다녔죠. 3일쯤 촬영 마치고 돌아왔는데 갓난애가 아무것도 먹지 못해 아프리카 난민처럼 살이 빠져 있더라고요. 지금도 그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요. 그래서 손자들한테 많이 먹으라는 말이 입에 붙었어요.”
기라성 같은 감독과 배우들과도 많은 작업을 함께했다. 하지만 그가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이나 과거 트로이카로 불리던 남정임, 문희, 윤정희씨와 함께 <결혼교실>이라는 영화에 출연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표작을 꼽으라면 MBC 드라마 <우리는 중산층>이지요. 처음으로 주인공을 맡은 작품이거든. 그후 KBS <바람은 불어도> <사랑은 못말려> 같은 드라마에 연이어 출연하면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죠.”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능숙한 팔도 사투리. 서울 토박이인 그가 이처럼 사투리에 능숙한데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방송국과 연기자들이 전속계약을 맺던 시절, 아무 연줄 없던 그로서는 작은 배역조차 따내기가 쉽지 않았다. 연줄이 아니라면 남다른 ‘개인기’가 필요했다.
“방송국하고 계약하지 않은 조연급 연기자들은 불러 주기만을 기다려야 했어요.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연기자들이 취약한 것이 무엇인가 유심히 살폈죠. 나중에 사투리가 약하다는 것을 알았죠. 그때부터 지방 촬영장에 다닐 때마다 현지 사람들 열심히 쫓아다니면서 사투리를 적고 따라 하며 익혔더니 사투리 잘하는 연기자 하면 나를 찾더라고. PD들이 ‘선생님은 사투리 그냥 되잖아요’ 할 때가 제일 서운해요. 그게 어디 그냥 된 건가.”
다시 태어나도 연기를 하고 싶다는 탤런트 김지영. “그렇게 해보고도 아쉬움이 남느냐”고 묻자 “아직 못해본 것이 얼마나 많은데요. 늦게 알아주는 바람에 20~30대에 해볼 수 있는 연기를 못 해봤잖아요”라는 그는 기회가 된다면 여자의 일생을 모두 보여주는 여주인공 역할을 꼭 해보고 싶다고.

주인공 못지않은 인기 누리는 안방극장의 빛나는 조연배우들

그동안 그는 주방장, 뱃사람, 분식집 주인 등 서민적 체취가 짙은 배역들을 맡아왔다.

투덕투덕 사람 좋아 보이는 탤런트 맹상훈(42). 82년 MBC 공채 출신인 그는 조형기, 정성모, 박찬환, 이영범 등과 함께 방송국에 입성했다.
데뷔 초기 맡은 배역은 주로 ‘산적 3’이나 ‘간첩 3’ 등 대사 한마디 없는 단역. 그나마 한 마디 대사라도 있는 산적 1, 2는 선배 몫이었으니 주연은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후에도 그의 역할은 주방장, 뱃사람, 분식집 주인 등 주로 서민적인 체취가 짙은 배역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중 그에게도 ‘폼 나는’ 배역이 찾아왔다. 84년 MBC <베스트셀러극장> ‘낮보다 밝은 밤’편에서 동기생인 정성모와 함께 첫 주연을 맡은 것.
“감독님이 머리를 빡빡 깎을 수 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1초도 안 기다리고 그렇다고 했죠. 그래서 하게 된 작품인데 한국판 <내일을 향해 쏴라>와 같은 작품이었어요. 방송국에서 그 작품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는데 밖에 나가면 여전히 내가 누군지 모르더군요.”
탤런트 맹상훈이란 이름을 확실하게 알려준 드라마는 따로 있다. 86년 방영된 MBC 어린이 연속극 <꾸러기>다. 그는 극중에서 만두가게 털보아저씨로 나와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 탤런트로 대접받았다.
“노총각이었는데 상대역이 누군지 아세요? 양희경 누나였어요. 그때 이민우와 김민희가 아역으로 같이 출연했는데 지금 어엿한 성인 연기자들이 다 됐죠. 그 드라마 때문에 가끔 ‘아직도 결혼 안했냐’고 묻는 분들이 많아요.”
매력적인 악역 꼭 해보고 싶어
그동안 드라마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착하고 어눌한 서민역이 대부분이었다. 굳이 악역이라고 꼽아본다면 SBS 드라마 <산다는 것>에서 누나로 나오는 탤런트 원미경을 내내 속썩인 역할 정도라고 할까.
“방송에서 불쌍한 역할로 나오면 아이들도 덩달아 어깨에 힘이 없어요. 예전에 <허준>에서 허준을 돕는 정의로운 역할을 했을 때는 아이들이 어깨에 힘주고 다니더라고요. 아들 녀석은 아빠 사인을 받아야 한다며 종이 한 뭉치를 내놓기도 했어요.”
데뷔 이후 지금까지 그는 방송국을 여느 회사처럼 생각하고 꾸준히 드라마에 출연했다. 많을 때는 1주일에 4편 정도까지 드라마 촬영으로 바쁘게 보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빠 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 과감히 2∼3편으로 제한하고 있다.
“어느날 딸이랑 나란히 섰는데 얼마전까지 내려다 본 아이가 나랑 어깨가 나란해진 거예요. 아이들 한창 자라는 것을 지켜볼 새도 없이 바빴구나 싶어서 일을 줄이고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을 많이 갖기로 했죠.”
고등학교 시절 연극으로 연기에 입문한 그는 한때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연극계 유망주였다. 당시 그는 청소년 대상 최고의 연극제였던 전국학생연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았다. MBC 드라마 <전원일기>의 일용역으로 유명한 박인수, 정동환, 한인수 등 쟁쟁한 선배 연기자들이 앞서 받아간 상이었다.
비록 멋지고 폼 나는 역할도 아니지만 ‘아저씨’ 역할을 맡아도 연기자 맹상훈은 언제나 당당하다.
“주연과 조연이 맞닥뜨리는 장면에서 주연배우의 연기가 돋보였다면 그것은 조연이 이긴 거예요. 그만큼 주연을 잘 받쳐주었다는 얘기니까. 그 맛에 연기를 하게 되는 것 같고요.”
처음 방송국에 들어와서 출연료로 받은 ‘파우처(출연료 금액을 써주는 종이)’를 코팅해서 한동안 쓰지 않기도 했다는 탤런트 맹상훈. 앞으로 맡을 무수한 배역 중 그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역할은 매력 있는 악역이다.

주인공 못지않은 인기 누리는 안방극장의 빛나는 조연배우들

연기자로서 그의 원칙은 한꺼번에 많은 작품에 출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KBS 드라마 <고독>에 출연중인 탤런트 이미경(42). 극중 그가 맡은 역할은 주인공 이미숙의 절친한 친구 명희. 실제 성격대로 하고 싶은 말은 하고야 마는 괄괄하고 똑부러진 역할이다.
“그동안 맡은 역할들이 대체로 비슷해요. 주로 현대물에서 여자 주인공의 선배나 언니, 친구로 도시적이고 세련된 캐리어우먼 역할을 가장 많이 했죠. 하지만 한번도 제가 조연이란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적어도 제가 나오는 장면만큼은 제가 주연이니까요.”
그의 연기경력은 올해로 22년째. 서울예대 79학번으로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KBS 탤런트 시험을 치렀다. 출중한 외모에 ‘난다긴다’ 하는 친구들은 줄줄이 미역국을 마셨는데 시험 보는 친구 코디네이터를 자청하며 따라갔다가 덜컥 시험에 합격한 것이 데뷔동기. 안타깝게도 동기생 중에 남아있는 여자 탤런트는 그 혼자뿐이다.
데뷔 초에는 촌 아낙이나 KBS 드라마 <전설의 고향>의 기생 등 주로 시대물로 시청자들과 만났다. 대부분 주연을 받쳐주는 조연에 그쳤지만 단 한 장면을 찍더라도 그가 드라마에 임하는 자세는 주연 못지않다.
“한번은 지방에서 드라마 촬영을 할 때였어요. 대본을 받기는 했는데 아무리 궁리를 해도 드라마 속 인물 성격이 잡히지 않는 거예요. 밤새 끙끙거리다 새벽녘에야 ‘이거다!’ 하면서 감이 왔어요. 몇 시간후면 촬영인데 잠을 자면 애써 잡은 감정을 놓칠 것 같아서 그대로 꼬박 밤을 샌 적이 있어요.”
꼼꼼한 성격 탓에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별도의 코디네이터 도움 없이 직접 의상까지 체크하는 완벽주의자이기도 하다. 같은 캐리어우먼 역할이라도 그 인물의 성격과 취향, 심지어 연봉이 얼마냐에 따라 의상이 확 달라진다는 것이 그의 설명. 시청자들 눈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일지 몰라도 일단 어떤 역할에 캐스팅되면 옷방에 앉아 한나절은 의상과 소품을 고민한다.
“앞으로 결혼하는 게 계획이자 숙제예요”
연기자로서의 원칙은 한꺼번에 많은 작품에 출연하지 않는다는 것. 한때 이 방송사에서 사극촬영을 마치고 그대로 뛰어가 다른 방송사에서 현대물을 찍어본 적도 있다. 그때마다 그는 어느 것에도 몰입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것이 경력 20년 넘은 중견 탤런트인 그가 브라운관에서 아직도 식상하지 않고 항상 신선하게 보이는 비결이기도 하다.
그가 주요 출연작으로 꼽는 드라마는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와 <애인> <가을에 만난 남자> 등. 5년간 장기출연했던 KBS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도 잊지 못할 작품이다. 작품운이 있었다는 그가 특별히 애착을 가지는 작품은 <여명의 눈동자>. 그에게 연기의 진수를 느끼게 해준 고마운 작품이기 때문이다.
“일본 여자 정신대 하나코 역할을 맡았는데, 동굴에서 채시라씨를 앞에 두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 있었어요. 혼자 독백처럼 대사를 하는데 발끝부터 짜릿한 전율 같은 게 느껴지더라고요. 그 역할 속에 완전히 제가 들어갔던 거죠.”
수많은 드라마에 출연했으니 촬영중 겪은 에피소드도 한 보따리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은 KBS 드라마 <빨치산> 촬영 때 일어난 일이다. 당시 극중 유일한 여자대원으로 출연했는데, 한밤중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가 하면, 갑자기 차오르는 댐물 때문에 익사 직전까지 갔던 일이 있었다.
적지 않은 세월을 연기에 몸 담았지만 단 한번도 ‘이 길이 내 길인가’를 고민한 적이 없었다는 그. 한때 청담동에서 의상실을 운영하며 ‘외도’를 한 적이 있었지만 출연제의가 오면 거짓말처럼 촬영장에 다시 나오곤 했다니 천생 연기자가 분명하다.
“남들은 오히려 제게 연기가 천직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저는 한번도 천직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연기를 하는 순간에도 늘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를 두고 고민하죠. 그래서 다른 길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이렇게 연기를 하고 있네요. 연기는 제게 고향 같은 곳인가 봐요.”
좋아하는 것이라면 만사 제쳐두고 빠지고 본다는 그. 얼마전까지 골프에 빠져 1년반 만에 싱글로 나섰고 요즘엔 컴퓨터 게임에 재미를 붙여 최신 게임팩은 모두 구입했다고 한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드라마 <고독>에만 전념할 생각이라는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결혼하는 게 계획이자 숙제”라며 방긋 웃는다.

주인공 못지않은 인기 누리는 안방극장의 빛나는 조연배우들

그는 연기자의 기본은 인간성이라고 강조한다.

SBS 일산 탄현 드라마센터. 드라마 <정>의 촬영장에서 만난 탤런트 윤기원(31)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타났다.
“하하하. 제가 3형제 중 막내예요. 귀여움 꽤 받고 자랐죠. 학창시절 남 앞에 나서기 좋아했고 그러다 연극영화과에 지원했는데 떨어졌어요. 탤런트 시험도 두번이나 떨어진 후에 붙었어요.”
96년 SBS 탤런트 공채로 데뷔했지만 그는 이전부터 방송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경원대학교 2학년 재학중 우연히 MBC 대학 개그제에 출전하면서 방송국과 인연을 맺었다. 그후 TV 개그 프로그램에서 틈틈이 얼굴을 익힌 그는 어느 날, 탤런트가 되어서 나타났다. 대학시절에는 독집 앨범까지 준비한 가수지망생이었다니 이래저래 다방면에 재주가 많다.
“아직도 저를 개그맨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요. 코믹한 이미지가 강해서 그런가 봐요. 노래를 좋아해서 대학시절에는 밴드를 결성해서 음악활동도 열심히 했었는데, 하다 보니까 한계가 보이더라고요. 어린 시절부터 항상 꿈꾸어왔던 연기를 제대로 해보고 싶어서 제대 후 열심히 탤런트 시험 준비를 했죠.”
“한국의 주성치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탤런트로 데뷔해 출연한 첫 작품은 SBS 드라마 <도시남녀>. 멋진 배역을 주겠다는 연출자의 말만 믿고 달려갔지만 주어진 역할은 도시를 내달리는 폭주족이었다. 그후 드라마 <홍길동>에서 포졸 1을 맡기도 했던 그는, 홍길동이 던진 돌에 맞아 ‘잘 죽어준’ 인연으로, 같은 연출자의 후속 드라마 <청춘의 덫>에서 전광렬의 운전기사를 맡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조연이었지만 고정이었다.
벌써 7년째 방송국에 출입하고 있지만 시청자들이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SBS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에서의 능청스러운 코믹연기.
“순풍산부인과에서 나왔던 캐릭터는 주로 일본 만화에서 많이 응용했어요. 만화뿐 아니라 평소 연기에 도움이 되겠다 싶은 것은 신경 써서 내 것으로 만들곤 했죠. 언젠가는 써먹을 때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반면 감동적이지 않는 것은 빨리 잊어버려요. 몇년을 함께 지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많거든요.”
그는 거절하지 않는 배우로도 유명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은 되도록 소화한다는 것이 연기자로서의 신념. 덕분에 단역시절에는 대사 한마디 없는 배역을 위해 지방까지 내려가 11시간이나 기다렸다 한 장면을 찍고 돌아온 적도 있다.
주요 출연작으로는 MBC 드라마 <이브의 모든 것>, SBS 드라마 <라이벌> <정> 등이 있고 최근 흥행작인 <보스상륙작전>에서는 강남 최고의 부킹 웨이터 ‘박사’로 출연하기도 했다. KBS 일일극 <결혼합시다>에 출연중인 그가 꿈꾸는 것은 ‘한국의 주성치’ 같은 배우가 되는 것.
“반짝하는 스타보다 오래가는 연기자가 좋아요. 저는 송강호 선배님, 브루스 윌리스, 주성치 같은 부류의 배우들에게 훨씬 매력을 느껴요. 특히 주성치처럼 항상 명랑한 배우가 되어 보려고요.”
TV 드라마에서 비춰지는 모습 때문에 그는 가볍게 보일 때도 많다. 하지만 연기자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느냐는 질문에 “인간이 되려고 노력한다”고 대답할 만큼 탤런트 윤기원은 속이 꽉 찬 연기자다.



주인공 못지않은 인기 누리는 안방극장의 빛나는 조연배우들

그는 <야인시대>에 함께 출연한 ‘쌍칼’ 박준규, ‘구마적’ 이원종 등선배 연기자들의 칭찬을 들을 때 큰 힘을 얻었다고 한다.

“사실 <야인시대>보다 <대망>에 먼저 캐스팅됐어요. 주변에서 저를 캐스팅한 것을 두고 반대가 많았다고 들었어요. 개그맨이 정극에 출연한다고 하니까 걱정을 많이 하신 거죠.”
올해 방송가에서 하반기 화제의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개그맨 이혁재(29)를 들 수 있다.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주인공 김두한의 오른팔인 김무옥 역할에 그가 캐스팅됐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동안 오락프로그램의 고정 패널로, 보조 진행자로 활발히 활동해오던 개그맨 이혁재가 연기자 뺨치는 연기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는 법. 김무옥 역을 제의받은 후 그는 먼저 작가 이환경씨의 소설 <야인시대>를 독파했다. 그리고 실감나는 사투리 연기를 위해 친분 있는 전라도 친구들은 모두 불러모으기도 했다. 가장 걱정스러웠던 것은 드라마 속 김무옥과 현실의 김무옥을 제대로 표현하는 일이었다고.
“김무옥은 실존인물이었음에도 관련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연기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단순하게 삼국지를 생각했죠. 유비, 관우, 장비 중에서 김무옥을 장비에 대입시킨 거예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김무옥이 철저하게 김두한이라는 인물을 잘 살려줄 수 있을까만 고민했어요. 주인공이 떠야 제가 뜨잖아요.”
“개그맨도 연기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 그가 정한 철칙은 오버하지 않을 것. 개그맨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자칫하면 드라마가 코미디로 흐를까봐 염려해서다. 한 장면을 찍고 나서도 몸 동작이 너무 크지 않았는지, 표정이 지나치지 않았는지 일일이 모니터를 하곤 했다. 결과는 노력한 만큼 돌아왔다.
“쌍칼 박준규 선배님이 ‘대사 좋아졌다’고 툭 한마디 던지시거나 구마적 이원종 선배님이 잘하고 있다며 등을 토닥여주시는 게 큰 힘이 됐어요. 한번은 분장실에서 하야시 이창훈 선배님이 ‘혁재야, 연기해도 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평소 말씀이 많지 않은 선배한테 칭찬 들으니까 기분이 더 좋았어요.”
그를 두고 차세대 기대주라며 섣부른 기대와 부추김도 많지만 그에겐 안 통하는 말이다. 개그가 좋아 어렵게 개그맨이 되었으니 평생 개그맨으로 살겠다는 것이 그의 다짐. 연기자로 전업하거나 개그맨과 겸업할 욕심도 없이 드라마에 출연한 이유는 묻자 순전히 ‘의리’ 때문이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친분 있는 분들한테 거절을 잘 못해서 출연하게 됐어요. 덕분에 새로운 분야를 경험해보고 개그맨도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죠. 제가 잘 해놓으면 후배 개그맨들의 선택의 폭이 넓어질 수 있으니까요. 제가 다시 드라마에 출연해도 의리 때문에 하는구나라고 생각해주세요.”
그는 99년 MBC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해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국토대장정’에서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개성 강한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 그의 성격은 슬럼프도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낙천적. 틈틈이 애정 어린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개그맨 이창명과 남희석 등과 친하다.
“시청자와 함께 늙어가는 개그맨이 되고 싶어요. 지금은 30대 개그맨도 10대를 위한 개그를 하고 있잖아요. 그게 아니라 개그맨이 서른이면 같은 30대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개그를 통해 웃을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어요.”
드라마 <야인시대>와 3개의 오락프로그램에 출연중이지만 주말은 꼭 아내와 함께 보낸다는 이혁재. 얼마 있으면 아빠가 된다는 그의 집에는 아기침대며 옷가지가 거실 한가득이라며 벌써부터 싱글벙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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