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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유인경 아줌마의 속시원~한 수다

추억이 담긴 엄마의 옷장

■ 글·유인경

입력 2002.12.11 13:18:00

이사 하기 전 집안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엄마의 옷장을 열었다. 엄마는 늘씬한 키에 체격도 좋아 어떤 옷을 입어도 모양새가 났지만 정작 ‘옷발’이 받을 때는 좋은 옷을 입지 못했다.
자식을 모두 키운 후 환갑이 넘어서야 드디어 자신을 위해 투자하기 시작하셨고 옷을 고르고 사서 입는 재미에 흠뻑 빠져 동네에서 ‘멋쟁이 할머니’란 소리를 들을 무렵, 엄마는 치매에 걸리셨다. 이젠 대소변도 못 가려 나들이도 잘 못하신다. 엄마를 돋보이게 했던 그 예쁜 옷들을 이젠 다시 입지 못하실 것 같다. 옷장 속에 가득한 엄마의 옷을 보며 마음이 아팠지만 어떻게 보면 그 역시 사치일지 모른다. 엄마가 환자복이 아니라 평상복을 입고 계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니까. 나도 더 늙기 전에 아껴둔 액세서리도 달아보고, 너무 야하지 않을까 싶어 주저했던 핑크빛 블라우스도 입어보아야겠다.
매사 주저하며 살기에 우리 인생은 너무 짧으니까.
추억이 담긴 엄마의 옷장
이사를 한다. 새 아파트를 분양받아 가는 것도 아니고 생전 처음으로 내 집 마련을 하는 것도 아니다. 엄마가 과외 정보에 어둡고 무능력해서 그저 딸아이가 어렵지 않게 학원에 다닐 수 있도록 강남으로 가는 거라 별 감흥이 없고 귀찮기만 하다. 이사 갈 집은 지은 지 10년이 넘은 낡은 집인데 도배나 장판도 새로 하지 않고 청소만 하고 들어갈 예정이다.
새 집에 대한 기대보다는 헌 집에서 버리고 갈 물건을 정리하는 것이 더 큰 문제로 다가왔다. 참으로 무던한(?) 성격의 우리 부부는 결혼하고 17년 동안 살면서 식탁과 소파 외엔 가구를 별로 바꾸지 않았다. 이젠 아주 구닥다리 스타일이 되어버린 밤색 나무장롱, 손잡이가 반 이상 떨어져 나간 서랍장, 수시로 문이 열리는 냉장고에서 때가 찌든 전자레인지에 이르기까지 ‘복고풍’을 유지하고 있다. 남들은 수십여년을 써도 멀쩡하다지만 우리집 물건들은 온통 상처투성이다.
“엄마, 정말 우리집은 1980년대 드라마 세트장 같아. 온통 낡은 물건뿐이고, 가구도 촌스러워. 제발 이젠 새것으로 바꾸자.”
딸아이가 이렇게 애걸하지만 별로 호응하고 싶지 않다. 손잡이가 떨어져 나가긴 했어도 아직 장롱 바닥은 멀쩡하고, 집 전체 분위기가 칙칙하고 구질구질하긴 해도 오는 손님이 거의 없어 남부끄러울 일은 없다. 딸아이 친구들이 오긴 하지만 엄마의 졸렬한 인테리어 감각 때문에 우정이 상할 일은 없으리라 믿는다.
지난 4~5년간은 내가 게으른 탓도 있지만 엄마 때문에 집안 꾸미기를 하지 않았다. 치매인 엄마는 의자에 앉아서도 똥오줌을 싸실 때가 있고 꽃이나 장식품만 보면 꺾거나 망가뜨린다. 엄마 핑계를 대며 커튼도 안 달고 별다른 실내장식도 하지 않고 굳건히 잘 버텨왔다. 그런데도 막상 이사를 가려고 하니 왜 그렇게 버릴 물건이 많은지 모르겠다.
하루는 마음먹고 비디오와 책을 정리했고 하루는 그릇을 버렸다. 지난 일요일엔 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지저분한 것을 잘 참는(?) 스타일이라 뭘 버려야 할지 모르지만 정리정돈과 수납의 대가인 언니는 과감하게 물건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엄마의 옷장을 정리했다.
엄마의 옷장을 열어보니 우리 엄마의 지난 삶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 같았다. 6남매를 키워 시집장가 보내느라 엄마는 옷 한벌 제대로 사 입을 경제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164cm의 늘씬한 키에 체격도 당당해 어떤 옷을 입어도 모양새가 났는데 정작 얼굴과 몸이 아름다워 ‘옷발’이 받을 때는 좋은 옷을 해 입지 못했다. 자식들을 모두 키운 후, 환갑이 넘어서야 엄마는 자신을 위해 투자하기 시작하셨다. 백화점에 가서 유명 브랜드 옷도 사고, 모피 코트도 구입하고, 해외여행을 가서는 한국에서 사기 힘든 신발도 사오셨다.

옷을 고르고 사서 입는 재미에 흠뻑 빠질 무렵, 아들딸이 선물로 좋은 옷을 해드려 동네에서 ‘멋쟁이 할머니’란 칭찬을 들을 무렵, 우리 엄마는 치매에 걸리셨다. 그리고 이젠 대소변도 못 가려 나들이도 잘 못하신다. 엄마를 돋보이게 했던 그 예쁜 옷들, 엄마가 자랑하던 멋진 코트를 이젠 아마 다시는 입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나는 미련이 남아서 “언니, 이 원피스는 엄마가 내년 봄 나들이 때 다시 입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 벨벳 투피스는 큰오빠가 독일서 사온 감으로 만든 거라 엄마가 너무 아끼셨어.” “이건 정말 비싸게 주고 산 건데”라고 갖가지 이유를 들며 옷을 만지작거렸지만 언니는 다 옷장에서 걷어냈다.
남은 것은 편안한 스웨터, 삶아도 줄어들지 않는 면바지, 내복류와 잠옷. 결국 최후까지 남은 것은 시장이나 좌판에서 사온 싸구려 막옷들뿐이었다.
“이건 너무 귀한 감으로 맞춘 옷이라 엄마가 아껴서 한두번밖에 못입으셨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시장에 갈 때도 입고 다니시라고 할 걸.”
방안 가득한 엄마의 옷더미 곁에 앉아 나 역시 구겨지고 빛 바랜 낡은 옷 같은 심정으로 널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옷을 입었던 엄마의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을 기억했다. 옷이 날개란 말처럼 근사한 옷차림으로 나들이를 하던 엄마는 얼마나 화사했던가. 또 동네 양장점에서 똑같은 감에 같은 디자인으로 원피스를 맞춰 입은 날 엄마와 난 얼마나 재미있어 했던가. 그 물방울 무늬 원피스는, 내건 이제 내가 너무 살이 쪄서, 엄마는 움직이는데 불편해서 더 이상 입을 수가 없다.
어쩌면 이사할 때 짐을 줄이기 위해 너무 아무 생각 없이 엄마 옷을 처분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나중에라도 엄마 옷을 만지면서 엄마의 추억을 떠올릴지도 모르는데. 하긴 엄마가 예쁜 옷을 못 입으시는 걸 안타깝게 여기는 것 역시 사치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환자복이 아니라 평상복을 입고 계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니까.
한해가 또 저문다. 곧 한살 더 나이를 먹고 난 드디어 40대 중반이 된다. 하지만 서글퍼 할 것도 없다. 오늘은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 중에 가장 젊은 날이니까. 더 늙기 전에, 더 주름살이 지기 전에, 더 뱃살이 나오기 전에, 아까워 꽁꽁 숨겨둔 액세서리도 달아보고, 너무 야하지 않을까 싶어 주저했던 핑크빛 블라우스도 입어야겠다. 매사 주저주저하며 살기에 우리 인생은 너무 짧으니까 말이다.

여성동아 2002년 12월 4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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